211209 일상의 소소한 일들
나에게 동네 원주민 친구가 있다. 그는 일요일마다 직장을 쉰다. 일주일 한번 쉬는 날에는 별일 없으면, 그는 아침등산에 나와 동행한다. 홀로가 아닌 더불어 산행은 나를 무척이나 즐겁게 한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그는 꼭 무엇인가 채집을 한다. 들꽃이 보이면 한줌 꺾는다. 고추밭을 지나가면 들려서 고추 몇 개를 따온다. 하물며 톱을 가지고 와서 자기 산도 아닌데 나뭇가지를 정지한다.
나는 그냥 구경만 한다. 본래 나는 걸으면서 무엇인가 줍거나 따지 않는다. 그걸 해서 무엇 하나? 귀찮다. 설령 구해 본들 온전히 잘 간수하여 요긴하게 사용할 수도 없다. 특히 고추 같은 농산물은 더 그렇다. 내가 농산물을 좀 얻었다 하더라도 손수 그것을 다듬거나 요리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기회가 있어도, 누군가 내 손에 쥐어줘도 나는 그냥 “됐습니다.”하고 사양한다. 누군가 과일 한 박스를 주면, “그걸 어떻게 들고 가나, 두세 개만 줘” 이런 식이다.
친구가 하산할 때 들국화 꽃을 땄다. 멀뚱멀뚱하게 기다리니 나도 은근히 욕심이 났다. 나도 한줌 땄다. 그 친구는 꽃가지를 다듬어서 꽃병에 두면 좋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꽃을 다듬어서 병에 담았다. 고놈이 생각 이상으로 예쁘고 생각 이상으로 향기가 진했다.
밖에서 집에 들어오면, 고놈의 들국화 향기에 나는 취한다. 노란 들국화를 보는 것도 별미이고, 그 향기를 맛보는 것도 특별하다. 내가 따와서 그런가? 문득문득 나는 작은 미소를 짓곤 한다. 평생 처음이다. 한 번이라도 해 본 짓이 아니다. 별 일이었다.
친구는 꽃묶음을 마누라에게 전해주고, 그 일부를 꽃병에 꽂아 손수 내 사무실에 놓았다. 이는 사무실의 작은 변화였다.
어느 날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고추밭이 보였다. 친구는 여기에 사는 원주민이다. 그래서 그 밭주인을 잘 안다. 서리가 내리면 결국 고추밭은 있는 채로 뒤집어지고 땅에 묻힌다. 상품가치가 없는 고추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인은 남이 그냥 몰래 가져가면 배가 아프다. 그래서 낮선 등산객이 몰래 따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원주민이 조금 따 가는 것까지 따지겠는가 하고 친구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고추밭에 들어가자, 나도 따라갔다. 두 손으로 급히 고추를 땄다. 어쨌든 주인 몰래 따는 것이라 느긋하게 할 수 없었다. 금방 양 호주머니와 양 바지주머니가 가득했다. 내가 이것을 가져가 봐야 별로 쓸모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매운 청양고추를 못 먹는다. 고추를 이용하여 요리를 할 줄도 모른다. 그래도, 친구가 따니, 나도 욕심이 났다.
집에 와서 그놈의 고추를 발코니에 그냥 두었다. 나에게는 고추를 한꺼번에 많이 사용할 특별한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매일 그놈들을 보고 있자니 눈에 자꾸 밟혔다. 문득 시골집 앞마당에서 고추를 말리는 광경이 떠올랐다.
어찌 가져온 것인데 그냥 썩힐 수 없었다. 그놈의 고추를 하나하나 가위로 반으로 잘라 씨를 발라내고 발코니에서 말렸다. 자르면서 눈물과 콧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흐린 날에는 방바닥에서 말렸다. 1 주일 지나니 그놈들이 바싹 말랐다.
그것을 모아 가위로 작게 설었다. 그리고 병에 담았다. 빨간 고추 편과 녹색 편이 어울려 병속에서 작은 예술품이 되었다. 요것을 요리할 때마다 5-6 조각 정도를 넣으면 깔깔한 특유의 맛깔스러운 요리가 되었다. 이것도 내 평생 해본 적이 없는 짓이다.
누님을 만났을 때, 이 사건을 말하니, 누님이 웃으며 말했다.
“나보고 그런 일을 한다고 잔소리 하더니, 동생은 한 술 더 떠네."
산에서 내려오다 보면 친구네 산을 지나간다. 친구는 그 산에 버섯을 조금 키운다. 도토리나무에 구멍을 뚫고, 버섯 균체를 삽입하고, 그리고 햇빛가리개를 한 채로 두면, 버섯 싹이 구멍에서 나와 자연적으로 자란다.
그는 버섯을 전문적으로 키우는 것은 아니다. 자라는 대로 조금씩 따서 손수 먹고 남으면 이웃에 준다. 그래서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둔지가 오래되었다. 하산 길에 나보고 가보자고 하였다.
“가서 그것을 따오면 무얼 해.”
나는 바로 집에 가고 싶었으나 그는 굳이 나를 데리고 갔다. 햇빛가리개를 치우고 보니 버섯이 모두 손바닥보다 훨씬 컸다. 많이 웃자랐다고 친구는 무조건 다 따라고 하였다. 대충 다 따보니 큰 보따리로 하나가 되었다. 그 보따리를 매고 친구 집에 내려왔다.
버섯은 크기가 손바닥보다 작은 것이 좋단다. 이렇게 큰 것은 맛이 없단다. 이왕 따 온 것이다. 친구는 자기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는 괜히 욕심이 나서 많이 가져왔다. 과거에는 손에 쥐어 주어도 싫다고 내팽겨 쳤는데 말이다. 그 많은 것을 집에 가져와 보니 감당이 안 되었다. 일부는 볶아 먹고, 나머지는 그냥 두었다.
그놈을 볼 때마다 신경이 갔다. 문득 묘안이 떠올랐다. 이놈들을 잘라서 말려보자, 전에 고추를 말릴 듯 칼로 버섯을 작게 잘라 방바닥에 펼쳐서 며칠을 두었다.
내 방은 항상 따뜻하게 보일러가 돌아간다. 그 건조한 열기에 그놈들이 며칠 만에 바싹 말랐다. 비닐봉지에 넣으니 부피가 절반으로 줄었다. 이것도 내 평생 처음해 보는 짓이었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나에게 일어났다. 꽃병에 들국화를 심어 방에 두고, 고추를 조각조각 설어 말리고, 버섯을 편으로 설어 바닥에 펼치면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시간을 잊는다. 내 참, 허허…
요즈음 우리 노년의 부부사이를 생각해 본다. 참는 것은 경제적으로 삶이 어려울 때는 별일 없이 넘어가지만, 그것이 경제적 풍요와 자유로운 사고와 만나면 큰 상처가 되며 고름마저 생긴다. 세상의 이치이다.
나이 먹어 세상이 변하고 각자 자기 고집이 생기면, 나는 ‘집 귀신’이었다고, 나는 ‘폐기처분’되었다고 서로 아우성 친다. 그래서 요즈음 황혼이혼이 늘어난다. 이제는 여자가 요구한다. 그 결과 여자는 보통 행복의 날개를 달지만 남자는 대부분 고독으로 추락한다.
남녀 기대 수명으로는 남자는 81세, 여자는 87세이다. 기대수명의 남녀차이는 6년으로 계산된다. 질병 없이 건강하게 걸어 다니는 건강수명은 남자는 72세, 여자는 74세이다. 건강수명의 남녀차이는 2년으로 셈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10 년 정도는 앓다가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는 건강수명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람은 73세 되면 인생 다 갔다고 보면 된다. 그럼, 나는 몇 년 남았나? 아찔하다. 작은 일상의 행복이라도 소중히 하면서 남은 세월을 누려야 할 것만 같다. 아니야. 더 도전적으로 살아야 할 것만 같다.
어느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는 사람마다 가치관 따라 다르다. 단지 오늘 또 불평하면서, 혹은 또 내일을 위해서 사는 것은 큰 착각이 아닌가 하고 나에게 추궁해 본다. 풍요로워지고 자유가 확대됨에 따라 스스로 변하여야 함에도 우리는 여전히 예전처럼 달린다.
생활수준과 양식에 맞는 삶의 방식이 그때마다 늘 있거늘, 우린 늘 고집하며 살아왔지 않나 한다. 그러게 말이다. 나에게도 이런 작은 일상의 행복이 처음부터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자료출처: 조선일보 이은경기자, 20211204, 통계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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