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는 어머니는 나무로 불을 때고 밥을 짓고 방을 따뜻하게 했다. 보통 땔감을 산에서 해 오는 시골집과 다르게 우리 집은 작은 읍내에 있었기에 땔감 나무를 사야 했다. 장날에는 나무 꾸러미를 새끼로 묶어서 지게로 날라다 파는 나무꾼들이 많았다. 땔감으로는 소나무 가지가 많았고 잡목 가지도 있었으며 장작도 있었다. 소나무나 잡목 가지는 연기가 많이 났고 장작은 덜했다. 장작은 화력이 좋았지만 그 대신 비쌌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전국적으로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시골 작은 읍내에도 보급되었다. 우리 집 작은 방도 연탄아궁이가 설치되었다. 연탄아궁이는 참 편리했다. 장작아궁이는 저녁마다 많은 땔감을 태워야 했고 아래 목은 뜨끈뜨끈 했으나 아침이나 낮에는 추웠다. 연탄아궁이는 간단히 하루 세네 번만 연탄을 갈기만 하면 되었고 아래 목은 하루 종일 따뜻했다. 그뿐인가 원할 때 언제나 음식을 아궁이에서 해 먹을 수가 있고 불을 조절할 수도 있었다. 밥을 해 먹고 방을 따뜻하게 하고 물을 데우고 가게를 돌리는 데는 그때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일구가 이구 화덕으로 발전하더니 다구 화덕도 나왔다. 한마디로 혁신이었다.
덕분에 어머니는 땔감을 사려 장에 갈 일도 줄었다. 저녁마다 장작을 태울 필요가 없었다. 매일 장작 연기를 마시지 않아도 되었다. 모두 편해서 좋았다. 큰 솥이 걸져 있는 안방 장작아궁이는 명절이나 제사와 같은 큰날에는 안성맞춤이었고 작은 방 연탄아궁이는 평소 밥과 음식을 해 먹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먹거리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따뜻하게 지낼 수가 있는 것도 큰 득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연탄아궁이는 연탄보일러가 아닌 연탄 열기가 방구들 짝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형식이었다. 땔감아궁이에서 단지 땔감을 연탄이라는 형식의 열원만을 바꾼 것이었다. 나무 땔감은 일산화탄소가 그리 많이 발생하지 않았다. 발생한다 하더라도 저녁 일시적으로 사용하고 잠잘 시간에는 그 여열만 이용하기 때문에 가스로 인한 문제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연탄은 하루 종일 서서히 열을 발생시키는 대신에 일산화탄소를 끊임없이 발생시켰다. 특히 겨울의 밀폐된 방에서는 악마가 되었다. 우리 가족이 자는 사이에 구들 짝 깨진 틈으로 죽음의 연기를 피웠다. 편리성과 실용성이 가끔 죽음의 전령사가 되는 것이다. 득이 있으면 그것에 상응한 폐단이 항상 있다는 세상의 이치였다.
겨울이 되면 내 누님 두 분과 내 여동생 그리고 나는 연례행사처럼 새벽녘에 죽음의 가스에 취해 오줌을 누려 밖으로 나와서는 그 자리에 머리를 처박고 쓰려졌다. 주변에서는 연탄가스로 죽었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으나 다행히 우리 가족에게는 그런 일은 없었다. 김치 국물 덕이었나 며칠 죽을 고생을 하고 나서 다시 일상생활로 되돌아왔다. 그런 일이 반복되어도 연탄아궁이는 계속 사용되었다.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연탄아궁이는 연탄보일러로 발전되고 이제는 가스보일러, 전기보일러, 열병합 시설로 대체되었다. 계속 좋은 일만 생겼으면 좋으려만 어른이 되면서 연탄가스로 망가진 내 머리 속 골이 내 육체를 힘들게 했다. 정신적으로는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연탄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때의 트라우마로 과거의 그때로 돌아간다. 그 망상 속에서 내가 살았던 우리 집의 연탄아궁이를 매번 괭이로 파헤쳐 버린다. '죽음을 부르는 이 따위 것이 무엇이 필요해!' 하며 울부짖는다.
그런데 이렇게 살기 좋은 요즈음도 연탄을 사용하는 곳이 많다. 산동네, 시골, 혹은 영세 공장에서 연탄을 사용한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층층이 쌓인 연탄을 본다. 구역실이 난다. 그러나 이제 그 연탄을 저주하거나 짓밟거나 돌을 던지지는 않는다. 그냥 웃곤 만다. 과거의 추억으로 생각하고 과정과 필연으로 여길뿐이다.
그때 연탄을 만들지 말고 왜 천연가스를 보급하지 않았느냐고 어기 짱을 부릴까? 연탄을 도입한 공무원과 그 가족들을 멸할까? 그 당시 연탄을 만들었던 사람을 저주할까? 연탄아궁이를 시공한 그때 그 사람들을 불려내어 죽여 버릴까? 연탄아궁이를 설치해 준 내 아버지를 원망할까? 아니다. 아무리 춥고 어려웠다 하더라도 연탄온수보일러가 개발될 때까지 계속 참고 인내하며 기다렸어야 했는가?. 아니 바로 천연가스보일러을 사용하는 지금의 시대로 바로 왔어야 했는가? 아우성 쳐봐야 인간이 만든 산업화의 이기로서 연탄이고 연탄아궁이일 뿐이다.
죽음의 연기를 마시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자주 잠깐 죽었지만 나는 연탄을 피할 수가 없었다. 연탄은 산업화의 필수 과정이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어도 연탄 득분에 따뜻하게 지내고 쉽게 음식을 해 먹을 수가 있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쉽게 가족을 부양할 수가 있었다. 지금 아무리 고통스러운 트라우마가 있다 하더라도 연탄을 사용한 시절을 그래서 나는 부정할 수 없다.
극복해야 할 것은 바로 연탄가스 트라우마이다. 천연가스보일러나 열병합 발전도 산업화를 위한 하나의 이기이다. 당연 그에 따른 폐해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지금 다 없애거나 부셔 버릴 수는 없다. 트라우마는 복수나 응징, 혹은 욕심이라는 수단으로는 치유되지 않는다. 오히러 악화시킬 뿐이다.
연탄을 부정하면 지금 나를 부정하게 된다. 연탄을 만든 사람, 연탄을 도입한 공무원, 연탄아궁이를 시공한 사람, 연탄아궁이를 설치한 내 아버지를 부관참시하면,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최신 열병합 난방 아파트를 버리고 형편을 무시하고 무작정 시골 오두막으로 떠나지 못하는 용기 없는 나도 죽어서 언젠가는 내 자식에게 부관참시될 것이다. 연탄아궁이, 그 시절을 이해하고 용서할 때만이 내 트라우마는 조금씩 나아질 뿐이다. Andrew
'2015 겨울 고국으로 돌아와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촌식당 '콩콩이와 청청이'를 아시나요 (0) | 2017.05.18 |
---|---|
쓰레기 같은 공짜 뉴스에서 진실을 캔다 (0) | 2017.05.07 |
내가 만약 품위 있는 차를 타게 된다면 (0) | 2017.03.25 |
술에 취하고 세상사에 취하다 (0) | 2017.03.25 |
탄핵 인용과 무사안일 (0) | 2017.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