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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 겨울배추는 달고 향기롭다

230510 대도시 진학을 포기하다

Hi Yeon 2023. 5. 10. 18:32

230510 대도시 진학을 포기하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에 나는 크게 고무가 되어 학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하면 할수록 성적은 올라갔고 그 만큼 칭찬이 많아지면서 신이 났고 학교생활은 즐거웠다. 교과서를 넘어 참고서를 달달 외우기도 했다. 학업에 몰입함으로서 답답함과 외로움은 많이 해소되었으나 집에 돌아오면 여전히 형수님 눈치가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아버님이 올라와서 형님 댁에 묵었다. 아버지는 장손으로 매우 엄했고 말씀이 별로 없는 분이었다. 나는 용기를 잔득 내었다. 그리고 저녁을 마치고 아버지에게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아버지, 저 형님 댁에서 나가 독립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같은 도시에서 너 형 댁을 두고, 어찌 나가서 너 혼자 살게 할 수 있겠나?”

 

맞는 말씀이었다. 나는 한마디도 더 못하고 물려났다.

 

경주에서 최상위급 중학생은 보통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그 당시 고등학교는 시험을 보고 들어갔다. 성적이 오르면서 나도 공부에 자신이 붙었다. 나와 같이 공부하는 상위 그룹의 학우들은 보통 경주에서 의사, 공무원, 사장, 부농의 아들, 등등으로 경제적으로 풍족한 애들이었다. 그들과 같이 공부하며 놀다 보니 내 형편을 잊어버리고 나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럼, 나도 대구로 진학하면 되겠구나!”

 

고등학교를 대구로 진학하면 저절로 대구에서 나 혼자 자유롭게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 나도 성적이 최고가 되면 대구로 떠날 수 있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그래, 맞아 하면서 혼자 맞장구를 치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왜 공부를 할까, 공부해서 무엇이 될까 하는 관심은 전혀 없었다. 오직 경주 탈출,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었다.

 

목표가 생기니 공부는 더 즐거웠고 더 재미가 났다. 성적은 쭉쭉 오르고 올라 대구 최고의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 성적까지 올랐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정말 별 문제가 없었다. 대구로 진학을 하는 것은 오직 성적만 좋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작성할 때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힘이 쭉 빠졌다. 그때 내 현실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내가 대구에 가서 혼자 살면, 학비는 어떻게 하든지 지원받는다고 하자. 먹고 자고는? 그곳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대도시이다. 경주에서 고향 가는데 덜덜거리는 버스를 타고 2-3시간을 가야 하는데, 그것도 일 년에 몇 번이다. 돌아올 때는 학비 때문에 어머님이 혼자 눈물을 지우시는데내가 혼자 대구로 공부하려 간다 말인가?

 

우리 집 현실이 눈에 아련거렸다. 부모님은 여러 자식에 삼촌들까지 도우고 있다. 어머니께서 밤낮으로 고생하시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만약 내가 대구로 진학하면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더욱 피폐해질 것이고 어머님의 고통은 더 커진다. 나로 인하여 형제들은 그만큼 공부를 못하게 되고 결국 돈을 벌려 나가야 한다.

 

내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는데, 그래서 충분히 합격할 수 있는 성적을 성취했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느냐고 마구 고집을 부릴 수도 있다. 내가 막 우기면 체면에 아버지가 대놓고 반대를 못할 수도 있다. 모를 일이다. 장하다고 하면서 흔쾌히 받아줄 수도 있다.

우리 집 경제적 형편이 내 느낌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다를 수도 있다. 혹이여 아버지에게 어떤 복안이 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아버지 반응이 어떨까 하고 눈치를 한번 살펴보자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아버지에게 말씀 드렸다. 그런데...

 

대구에는 어느 친척도 없는데, 어린 너를 객지에 혼자 보낼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물려났다. 그 말씀은 형편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초등학교 때 나를 삼촌 따라 경주로 전학을 보낸 것은 많은 형제 중에 막내 하나라도 제대로 교육시켜 보자는 의도였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또한 아버지는 내가 학업에 몰두하여 성적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반대하였다는 것도 나는 잘 안다. 경제적인 문제와 함께 비실비실한 어린 내가 대구에서 홀로 객지생활하며 고생하는 것을 정말로 안타까워 만류했을 수도 있었다.

 

설령 체면으로 아버님이 승낙 했다 하더라도 나는 쉬이 대구진학을 결정할 수 없었다. 우리 집 형편이 내 눈에 보였고 고생하는 어머님만 보아도 우리 집 경제적 형편을 충분히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대구에도 신세질 수 있는 친척 분들이 있다 한들 또 나는 친척집에 붙어서 살게 된다. 그럼, 대구에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내가 왜 공부하는지도 모르면서 삐뚤어진 목표로 부모님을 고생시킬 수는 없다. 현실을 무시하는 철없는 내 욕망이다. 내가 참으면 된다. 다시 3년이 지나면 성년이 되고, 그때 다른 곳으로 얼마든지 떠날 수 있다.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하고 돈 벌러 나가는 내 고향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 경주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아먹고 보니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여기 고등학교를 지원하고 시험일까지 2개월 동안 그냥 놀았다. 모든 중학교 책과 자료를 다 버렸다. 평소 만나던 그룹 친구들은 나와 다른 부류의 애들이다. 나는 그들과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어깨가 축 처졌고, 답답하고, 외로웠다. 만사가 귀찮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방안에 처박혀 소설책, 위인전기, 등등을 읽는 그런 일들이었다. 책으로 다른 세상을 보는 것이 쪼그만 하고 비실비실한 놈이 가장 하기 쉽고 돈도 들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