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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1 나는 무엇에 사로 잡힐까

Hi Yeon 2022. 1. 21. 10:40

220121 나는 무엇에 사로 잡힐까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을 보았다.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목사 Maclean은 두 아들 Norman과 Paul, 그리고 부인과 함께 Montana(수도 Helena) 강가의 교회에서 낚시를 즐기며 살아간다. 그의 아들도 어려서부터 낚시를 좋아하면서 가족은 틈만 나면 낚시를 즐긴다.

두 아들은 장성하여 큰 아들 Norman은 대학을 나와 교수로 살아가고, 둘째 Paul은 첫째와 다르게 고향에서 자유분망한 생활을 한다. 어느 날 포커를 즐기던 Paul이 갑자기 길에서 폭행을 당해 사망하는 사고가 생기고, 가족은 상실감에 깊은 고뇌에 빠진다.

 

Robert Redford 감독, Graig Sheffer & Brad Pitt 주연, 1993년 개봉되었으며, 큰 아들(Norman Maclean)이 자신의 유년시절을 비망록 형식으로 그린 소설을 영화화한, Montana주의 한 가정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Montana주는 미국의 북부에 위치한 주이다. 캐나다 Calgary가 있는 Albert주와 남북으로 연접해 있다. 캘거리가 록키산맥과 가까워 자연환경이 매우 좋듯이 몬타나주도 산수가 뛰어나다. 그 몬타나 자연을 배경으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강물 낚시를 무척이나 즐겼던 목사 Maclean은 두 아들을 두었고 아들들을 다소 엄하게 가정교육을 시키면서도 오후 대부분의 시간에는 애들을 자유롭게 두었다. 형제들은 자연속에서 마음껏 뛰놀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틈만나면 두 아들과 함께 낚시를 즐겼다. 아들 형제는 다 그런가? 참으로 개구장이었다. 그러나 부모는 걱정거리 아들을 항상 사랑으로 대했다.

 

 

아름다운 계곡에서 낚시를 하는 Norman & Paul의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 강물에서 낚시를 하며 즐긴다. 이런 모습에 내가 빨려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자연일까? 그곳에서 즐기는 낚시일까? 아니면 아버지와 아들이 즐기는 그 시간일까?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가족의 모습에 감동했을 것이다.

 

나는 11살 때 부모를 떠나 홀로 도시로 갔다.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은 아름다운 산과  넘실대는 동해 바다가 어울려진 곳이었다. 그곳에서 종달새를 좇고 놀래미를 잡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고향을 뒤로 하고 나는 홀로 도시로 나갔다. 그 이후로 나는 항상 도시군중 속에 홀로 있었다.

 

 

Norman & Paul는 어른이 되었다. 동생 Paul은 자주 사고를 쳤다. 싸움질을 하고 도박을 하였다. 부모는 불안하였다. 그러나 틈나면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낚시를 즐기고, 그들을 이해할 수 없어도 항상 사랑으로 대했다. 어느 날 둘째가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목사인 아버지(Maclean)가 설교하면서 한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사랑하는 이가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주여, 저 사람을 도우려 하나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이를 돕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주어야 할지 모르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주려고 해도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이해할 수 없어도 어려운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어도 오롯이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나에게도 두 아들이 있다.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가족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무척이나 놀랬다. 두 달전에 가족에게 이민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외국에 대하여 전혀 몰랐던 가족의 당혹감은 당연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자주 아들과 놀아주지 않고 함께 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두 아들이 새로운 세상에 잘 교육받고 어른스럽게 잘 적응하기만을 바랬다. 내 두 아들도 개구장이었다. 그들이 이해가 안되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만 했다.

 

아버지의 설교가 내 귀에 크게 울리면서 아들들과 함께 낚시를 즐기는 영상이 내 눈에 머문다. 그리고 나는 잠시 내 과거로 돌아간다.

 

나는 테니스를 무척이나 즐겼다. 캐나다에 이민 후에도 테니스를 즐겼다. 그때 내 두 아들은 어렸다. 그들도 나를 따라 테니스를 즐기기도 하였다. 이제 생각해 보면 아들과 함께 테니스를 즐긴 시간이 행복이었다. 언젠가 그들이 짝를 얻겠지. 그들과 함께 테니스 복식 게임을 해 보는 것이 나의 꿈이다.

 

이제 늙어 테니스를 즐길 수 없다. 테니스로 아들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들이 테니스를 즐기는 모습으로만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이것도 캐나다에 사는 그들이 나를 찾아올 때만 가능하다. 나는 애들이 자라 나를 떠난 이후부터 그림과 금속공예를 하기 시작했다. 아들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아니 관심도 없다. 아들이 어릴 때 함께 즐겼더라면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래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들을 항상 믿음으로 바라보고 항상 사랑으로 대하리라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설령 아무도 없더라도, 모두가 떠나갔더라도, 마치 이 영화의 마지막에 큰 아들 Norman이 혼자 강가에서 낚시를 하듯, 나는 그림을 그리든가, 글을 쓰든가, 책상에 앉아 금속공예를 할 예정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나는 그림과 공예에 사로 잡힐 것이다.

 

사랑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거의 떠났다. 모두들 내 마음속에 있다. 늙은 나이이지만 강에서 홀로 낚시한다. 계곡의 강물에 서면 모든 존재는 희미해져 나의 영혼과 기억과 합쳐지고 결국은 하나로 융합된다. 흐르는 강물처럼 나는 강물에 사로 잡혔다.”

 

큰 아들 Norman이 늙어 혼자 강가에서 낚시를 하면서 읖는 시어로 이 영화는 끝을 맺는다. 흐르는 강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