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2일 오후 5시 55분, 보행자 신호에서 도로을 건너다 버스에 치이는 사고를 당하고 5개월 후 다시 자동차 사고를 겪었다. 2018년 4월 30일 오전 8시 55분, 캐나다 친구가 운전하는 벤츠 승용차에 동승하여 전문 크리닉(Professional Clinic)에 가다가 반대편에서 중앙선을 넘어 오는 자동차와 정면충돌하였다. 나는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4월 30일 월요일 아침이었다. 전날 일요일 하루 종일 학교에서 작업을 하고 저녁이 되자 심심하고 무료한 차에 다시 YMCA에서 간단히 운동을 하였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보니 피곤함이 컸다.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자마자 YMCA에 가서 재활훈련을 하고 학교로 가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이날은 매우 피곤하였다. 가기 싫어하면서 침대에서 딩굴다가 결국은 YMCA에 갔다. 1시간 운동을 하니 오전 8시였다. 오전 9시에 전문 크리닉에 예약이 있었다. 작년 11월 22일 버스에 치어 생긴 목 부상에 대하여 정밀진단을 받고자 함이었다. 의지보다는 몸이 말하는 데로 따라, 억지로 일어나지 말고 만약 YMCA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의지대로 한 죄, 첫 번째 나의 악연이었다.
운동을 마친 오전 8시, 그때부터 계속 Taxi를 불렸다. 9시가 다 되도록 전화하였으나 계속 불통이었다. 이때는 이 도시를 관통하는 Saint John River가 범람하여 다운타운이 강물에 잠기고 있었다. 10년 마다 겪는 행사라고 하였다. 모든 택시 운행이 중단된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전화를 계속 해댔으니 나도 무식했다. 몇 번 시도하다가 안되면 그냥 포기할 줄 알아야 하거늘, 그것이 나의 두 번째 악연이었다.
오전 8시부터 40분 동안 수 없이 택시회사에 전화를 하고 나서야 겨우 클리닉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YMCA 라운지에서 나오려하는 데, 캐나다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Mark가 지나갔다. 그는 허둥대는 나를 발견하고는 나를 그의 차로 태워 주었다. 내가 캐나다에 이민오자마자 Gas Station을 매입하여 운영하게 되었는데 Mark는 그 건물 소유자였다. 변호사로 은퇴한 그는 나에게 많은 도음을 주었다. 1년 후 그 Gas Station를 매도하게 되었고 그후로 그를 계속 알고 지냈다. 최근 YMCA에서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도 그곳에서 운동을 하였다. YMCA에서 자주 그를 보게 되었고 그때마다 그는 가끔 나를 학교까지 태워주곤 하였다. 어찌 딱 이 시간에 그가 내 앞을 지나가는가? 이것이 나의 세 번째 악연이었다.
8시 40분에 나는 그의 벤츠 자동차에 동승하였다. 우리는 업타운을 벗어나 목적지가 있는 Hanwell Road에 들어섰다. 이 도로는 욍복 2차선으로 우리의 국도같은 것이다. 이 도시와 변두리 타운을 연결하는 주도로였다. 이날 아침은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자동차 한 대가 우리 차 앞에서 꾸물꾸물거렸다. 우리 차는 저절로 속력이 줄었다. 운전자인 Mark는 그것을 못참고 앞차 꽁무에 붙었다. 그때 꾸물대던 앞차가 우회전으로 빠져나갔고 바로 무엇인가가 우리 차를 박았다. 반대편 차선에서 달리던 자동차가 도로 중앙선을 넘어 우리 차를 박은 것이다.
나는 엉급결에 자동차 안에서 꼬꾸라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 얼굴은 에어백에 파뭍혀 있었다. 얼른 탈출하고자 안전밸트를 풀었다. 그런데 참을 수 없는 허리 고통으로 내 몸은 차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고통 때문에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끙끙대다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앞차는 꾸물대면서 용케 우회전 하면서 피하였다. 그 대신 우리 차는 충돌을 피하지 못하였다. 해필 그 시간에 우리는 Hanwell Road에 왔으며, 상대차는 하필 앞차를 용케 비껴 우리 차에게 달려들었는가? 네 번째 나의 악연이었다.
엠브란스가 도착하고 응급요원이 도착했다. 그들은 소리도 내지 않고 끙끙거리며 자동차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나를 감히 만져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2차 피해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20분이 지나자 겨우 나는 숨을 몰아 쉴 수가 있었다. 그리고 열려진 자동차 앞문을 통해 기어나왔고 바로 바닥에 쓰려졌다.
들것에 실리면서 내 몸은 알몸이 되었다. 그리고 나를 실은 앰브란스는 병원으로 급히 달렸다. 진통제 투여 후 X-ray 검사가 시작되었다. 병원에 머물면서 심한 허리 고통이 있어 허리 뼈가 부셔졌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사지를 움직일 수가 있었기 많이 안심이 되었다. 5개월 전 자동차 사고 경험 덕분에 이때 나는 죽고 싶을 정도의 큰 정신적 동요는 없었다. 운명에 맡겼던 것이다. 오전 10시부터 검사를 하였고 밤이 되어야 결과가 나왔다.
담당 의사의 말이었다.
“It’s OK.”
4월 말이면 봄날이다. 추워도 그렇게 춥지 않았다. 환자복을 입고 있었지만 용케 바지는 입은 상태였다. 안전 요원은 상체만 다쳤다고 생각하고 바지를 그냥 둔 모양이었다. 상의 T셔츠를 구해서 입고 찟어진 옷과 소지품을 챙겨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불러 렌트 방에 왔다. 나는 바로 침대에 쓰려졌다. 이제는 기가 차서 눈물도 안나왔다. 대신 세상과 하늘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또 나를 이렇게 해, 이렇게 할 바야 죽이지 왜 살려. 창피해서 말도 못해, 이 새끼야, 너 나에게 간을 떠 보는 거야. 죽일 놈의 세상아.”
"네번의 악연이 정확하게 서로 모의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되어야 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우연이라고 할 수가 없어. 이것은 의도된 저주야, 죽일 놈의 하늘아"
이틀 후 Family Doctor를 보았다. 첫 번째 자동차사고로 한달 전에 미리 해 두었던 예약이었다. 의사도 기가 찼던 모양이었다. 원하는 모든 처방을 바로 해 주었다. 나는 의사에게 말했다.
“가족도 집도 음식도 물도 없는 여기서는 이런 몸으로 잘못하다가는 굶어서 죽을 것 같다. 잘못하다가는 나는 미칠 수도 있다.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바로 한국으로 갈 것이다.”
의사는 좋은 생각이라고 다독거려 주었지만 괜히 죄없는 의사에게 악만 쓴 꼴이 되었다. 사고가 나고 나흘 후 5월 3일, 긴급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사는 Fredericton에서 Toronto까지 3시간 비행, 6시간 기다려 13시간 서울행 비행, 1시간 기다려 2시간 공항버스, 그리고 세종의 내 집에 왔다. 오는 동안 통증, 좁은 공간에서 못 욺직임, 그래도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견딜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와인을 세 번이나 시켜 마셨다. 드디어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살았구나" 하고 안도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다니던 정형외과에서 MRI와 함께 정밀 검사를 하였다. 척추뼈 두 개가 압착되어 찌거려졌다고 하였다. 나는 정말 놀랬다.
“그럼, 저는 병신이 되는 건가요?”
“괜찮아요. 보통 이런 경우가 많아요. 3개월 잘 관리하면 괜찮아집니다.”
의사의 말에 마음을 놓고는 다시 재활훈련을 시작했다. 별 수가 있나? 잔 기침마저 할 수가 없었다. 몸을 구부리고 펼 때마다 그 고통은 대단했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말이다. 한국에서 재활훈련과 약 복용, 그리고 보양과 휴식을 취하니 조금씩 몸과 마음은 좋아졌다. 18일 동안 한국에 머물고 다시 5월 22일 캐나다로 되돌아갔다.
캐나다 Fredericton에 도착하자마자 변호사를 찾았다. 첫 번째 사고로 선임한 변호사가 있으니 변호사로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한국에서 실시한 MRI 사진와 혈액검사 결과, 그리고 자동차 사고 경위서와 보험회사로부터 받은 서류 양식에 정보를 채워넣고 경비 증빙서류와 함께 제출하였다. 며칠 후 Family Doctor를 찾아 보고(한국 입국전에 미리 예약을 해 두었다) 의사 소견서를 받아 변호사에게 제출하였다. 두 번째 사고이니 훨씬 서류 작업이 쉬웠다. 육체적, 정신적 부상 정도는 의사가 판단한다. 의사 소견서가 매우 중요하다. 캐나다에서는 Family Doctor의 인성에 의존하는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나의 Family Doctor는 매우 인간적이었고 나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첫 번째 사고 경험으로 두 번째 자동차 사고를 이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규칙적인 재활훈련과 마음적 안정이 중요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과 같이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YMCA에서 1시간 운동을 하고 학교로 갔다. 학교 작업에 더 몰입했다. 나를 잊는 것이 나를 이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자동차 사고를 당했을 때는 마구 떠들고 다녔다. 많은 동료와 학교 관계자들이 도워 주었다. 두 번째는 창피해서 말도 못했다. 그냥 작업에만 몰입했다.
내 잘못도 없이 연달아 두 번의 자동차 사고를 겪은 후 가끔 혹은 자주 세상을 나도 모르게 저주했다. 아침마다 18번씩 바닥에 머리와 배를 대고 절을 했다. 내 친구의 말대로 나를 낮추기 위함이었다. 지금은 아주 가끔 사고 기억으로 힘들어 할 뿐이다. 내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내가 하고 싶은 창작작업에 몰입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냥 열심히 몰입할 뿐이다. 6월 15일 졸업식은 나에게 감회가 깊었다. 졸업복을 입고 모자를를 쓰고 이 도시 다운타운을 행진할 때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졸업식까지 내가 계획하였던 모든 작품을 만들었고 핼리팩스에서 한 번 그리고 이 도시에서 두 번 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몇몇은 판매가 되었고 그 돈은 비행기 비용에 조금 보탬이 되었다. 졸업식을 갖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3일 동안 나는 캐나다 동부의 가장 오래된 이 도시의 봄과 경치 그리고 다운타운에서 여유로움을 즐겼다. 봄 햇살 아래 커피 한잔을 마시며 하는 일 없이 다운타운을 어스렁거렸던 것이다. 6월 18일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And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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