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전체 인구의 1%가 세상 자본의 99%을 소유한다고 한다. 너무나 불공평하다.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폐단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자본이나 물질이외의 분야는 어떠할까하는 의문도 생긴다. 왜냐하면 사람은 물질적인 것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정신적 문화적 포만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1%가 세상 자본의 99%을 소유한다는 이론이 적용될까? 내 생각으로는 그렇다. 즉 세상사람의 1%가 정신문화의 99%을 소유하며 좌우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전체 인구의 1%가 세상 자본의 99%을 소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폐단인 자본의 이익을 용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익부 빈익빈, 즉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더 가난해지는 것이다. 그럼 그 1%는 정신 문화의 99%를 어떻게 소유하며 좌우할까? 내 생각으로는 1%는 나머지 99%사람을 정신문화적으로 매우 단순획일화시켜 그들이 주는 것, 보여 주는 것, 듣게 하는 것 만을 좋아 하도록 만들어서 자본의 이익을 바탕으로 자본을 독점함과 동시에 자본독점화를 지속 극대화시킨다는 것이다.
1%는 왜 대중의 단순획일화를 유도할까? 위정자나 가진자들 입장에서 보면 단순획일화된 대중은 쉽게 정치되고, 광고되고, 통제되고, 교육되고, 관리될 수 있는, 그리고 쉽게 예측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대중의 감성과 욕망이 이용된다. 이 중심에 발달한 산업과 문명 그리고 미디어가 그 역활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
물론 산업과 문명의 발달, 메스미디어, 유행의 범람 등으로 인간생활이 편리해지고 윤택해진 것은 사실이다. 자동차와 비행기, TV와 스마트폰, 집과 빌딩, 패션과 상품, 곡물대량생산과 저장기술이 그 예이다. 그러나 그 속에 무서운 함정이 숨어 있다. 앞으로 자동차와 비행기가 발전할수록 우리는 1%가 만든 한정된 이동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TV와 스마트 폰으로 그들이 만든 한정된 영상과 소리 그리고 그림만 보고 들어야 할 것이며, 그들이 만든 옷과 상품을 사서 입어야 하며, 그리고 그들이 생산한 한정된 종류의 음식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주는 것만 먹고 사고, 주는 것만 듣고 보고, 하물며 그들이 만든 이동장치를 이용하여 제한된 곳으로만 갈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99%은 더욱 더 단순화되는 반면 1%는 더욱 고도지능화 된다는 것이다. 그 만큼 99%의 사람들은 더욱 통제가 쉽고 또한 더욱 예측 가능한 대중으로 될 것이다. 그러면 1%는 그들의 자본을 이용하여 더 쉽게 대중을 통제할 수가 있게 되므로서 그 자본을 더욱 쉽게 집중화 할 것이다. 악순환이 연속되는 것이다. 물론 99% 대중은 그 단순함 속에서 값싼 음식으로 포만감을 느끼면서 급조된 유행과 미디어 그리고 상품을 보고 듣고 입고 누리며 편리하게 살 수 있다. 그 속에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할 수가 있다고 대중은 스스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TV나 스마트 폰에서 우리는 누군가 만든 수많은 영상물과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중에 무엇이 제일 좋더라 하고는 몇가지에 이목이 집중된다. 모든 공산품과 먹을 거리도 마찬가지이다. 즉 산업이 고도화 할수록 그 종류는 단순해진다. 만들어진 한정된 종류를 오래동안 먹고 보고 듣고 소유하다 보면 심신이 타성에 젖을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있는 능력마져 쇠퇴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하고 기획하는 능력은 점점 소멸해 갈 것이다. 설령 대중이 닫힌 공간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아주 작은 무대조차 스스로 만들어 보던 능력과 경험조차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결국 그들은 쉽게 그 1%가 만든 무대의 관객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이고 산업 문명과 미디어의 고도화의 과정이다. 누가 반대한다고 혹은 혁명한다고 흐르는 강물이 쉽게 거슬러 흐를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또한 하나의 단순한 방안에 든 99%인 우리가 고도화 된 1%를 상대로 따지고 싸우고 혁명하여 보아야 부처님 손바닥안이라고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방밖에 수 억가지의 세상이 있는 줄도 모르고 99% 모두가 단순한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맨날 1%을 비판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를 이간시킬 뿐만 아니라 99%의 대중을 분열과 혼란속으로 몰아 넣을 뿐이다. 혹은 99% 스스로 강력한 단체행동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이든 1%의 독점화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99%에게는 많은 고통의 시간과 피의 희생이 동반될 것이다. 그것은 혁명이나 전쟁같은 큰 소용돌이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살아 남은 자들의 잔치판만 될 수도 있다.
하나의 방법은 있다. 그것은 99% 모두가 다양성을 갖은 개체가 되는 것이다. 1%가 주는 것을 먹고, 보고, 듣고, 갖는 방식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 보고, 기획해 보고, 디자인해 보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즉 99%가 먹고, 입고, 보고, 듣고, 가지는 취향, 즉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취향들이 다 다를 때, 1%는 99%의 무수한 다양화로 인하여 대중을 쉽게 통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의 성향를 쉽게 예측도 할 수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때 1%는 다양한 99%의 대중을 상대하기 위해서 스스로가 다양화 될 것이다. 즉 1%의 사람들은 10% 혹은 20%로 더 나아가서 전체인구의 50%로 확대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1%의 그들도 살아 남을 수가 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적인 변화이며 조용한 혁명이다. 한마디로 손 안대고 코푸는 격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교육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 가장 요율적이다. 주입식 교육으로 온 국민이 대학교를 졸업하여 100% 현명하게 될지라도 스스로 자기 모양대로 살고 디자인하고 기획할 줄 모른다면 쉽게 1%가 관리하는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교육은 스스로 디자인하는 능력을 없애고 단순화 시킨다. 특히 같은 민족 언어 문화 지역에서는 그 폐단히 확연히 크다고 할 수가 있다. 우선 교육에서부터 다양성이 적용되어야 한다. 주입과 요구가 아니라 모두를 하고 싶은 대로 놔 두어야 한다. 자기 능력과 취미대로 흘러가도록 가만히 두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학생들이 다 달라질 수가 있다.
궁극적으로 모든 개개인이 생각의 다양화를 통하여 다양한 개체가 되어야 한다. 우선 산업문명과 미디어 특히 그 중에서 기획된 영상과 소리 그리고 엔트테인먼트에서 멀리 하여야 한다. 즉 나 스스로 나의 글을 쓰고, 나의 그림과 소리를 만들고, 나의 옷도 만들고, 나의 영상도 만들고, 그리고 나만 음식을 만들고, 나만의 자전거를 만들며, 나만의 차동차와 집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보고 스스로 그 속에서 살아보고 느껴 보아야 한다. 즉 내 방밖에는 수억가지의 셀 수 없는 또 다른 방이 있다는 것과 그 보다 더 많은 것이 새로 또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그 중에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그러한 다양한 개개인이 모여 바로 대중이 되면 1%는 다양한 99% 대중속으로 서서히 유입되면서 자본의 극단적인 쏠림 현상은 저절로 해소될 것이다. And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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