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18 간략하고 쉽게 요약해 본 세계사
<세계사(Manfred Mai 지음, 독일, 1949 출생)을 읽고 정독하였다.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 책내용을 간략하고 쉽게 요약을 했다. Andrew>
최초의 인간은 수렵과 채집활동을 했고 동굴벽화와 같이 창조적인 예술활동을 했다. 정착하지 않고 이동하는 유목문화에서 농경문화로 변화하면서 도시국가형식의 공동생활을 하였다. 여기서 글자(수메르인의 설형문자)와 법률이 생겼다.
기원전 5000년경부터 비옥한 강 주위에 거대 통일왕국이 생기고, 왕은 신이 내려준 권좌(파라오)로 여기지면서 파라오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거대건축물을 만들고 숭상하였다. 사막과 함께하는 나일강의 이집트 문명은 3000년 지속되었다. 인류역사상 최초 고등문명이었다.
기원전 2600년경부터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에서 인더스문명이 있었으며 하수시설이 있는 인공도시를 만들고 살았으며, 아리안의 침공을 받은 인도에서는 신분을 구분하는 카스트 제도가 발생했고, 아리안과 원주민 사이에서 힌두교(덕행을 쌓으면 윤회를 통하여 더 높은 카스트로 태어날 수 있다)가 발생했다.
싯다르타는 누구든지 욕망이 없으면 열반으로 들어가고 영원한 안식을 찾고 죽은 후에도 환생하지 않는다 라고 깨달은 자(부처)로서 새로운 가르침(불교)을 전파했다.
기원전 1600년부터 황허유역에서 고대중국문명이 발전했다. 중국은 황하유역 정착문화와 주변 내륙의 유목문화와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으며, 도시는 목조주택을 짓고 비단옷을 입고 살았다. 중국인들은 신과 조상에 대한 숭배를 매우 중요시했다. 아마 이는 지속적인 정주문화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때 당대 정치상황을 비판하면서 나타난 사람이 공자였다. 공자의 기본주장은 우호적이고 평화로운 공동생활이다. 신이나 조상보다 이웃을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는 도시국가가 발달했고 그중 가장 강력한 도시로는 스파르타(군대식 훈련문화)와 아테네(민주적 협의문화)였다. 오늘날 민주주의와 문화 발전의 모태가 된 것은 바로 아테네식 문화였다.
로마는 아테네 민주와 군주제 중간형태인 공화제로 발달하였다. 로마는 영토를 넓혀갔고 지중해 변과 유럽에서 통일국가를 완성했다. 통일전쟁으로 세습귀족만 부유해졌다. 도시 무산자 계급(평민, 농민, 노예)은 더 가난했다. 로마의 점령으로 도시는 발전하고 도로와 건축물은 획기전 발전을 했다. 권력자와 재산가는 호화생활을 하는 반면 농민과 노동자들은 하루하루 연명했다. 예수가 설파한 교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이 분열하면서 그리스트교가 공인되었다. 서로마와 그 1000년 후 동로마(비잔티움 제국)도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다신을 믿는 로마의 지배에서 반발하면서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가 유대인 사이에서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기를 바라면서 발생했다. 그후 예수가 태어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신의 자손이고, 신의 사랑은 무한하며, 누구든지 참회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예수의 복음으로 그리스트교가 전파되었다. 예수가 태어나고 570년 후 무하마드는 아라비아 사막지역에서 알라 유일신만이 있고 그 신이 보낸 사람이 자신(예언자)이라며 아랍지역에서 세력을 넓혀갔다. 이 이슬람교의 쿠란은 종교생활만이 아니라 인간생활전체(사회, 정치, 국가, 생활)를 규정한다.
사유를 통하여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던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그리스인과 달리 아랍인은 실제 실험을 중요시했다. 물리학과 화학이 발달하고 의술분야에서도 선도적인 업적을 남겼다.
서로마가 붕괴되고 게르만족이 유럽을 차지하면서 프랑스 지역의 프랑코 왕국이 세력을 키웠다. 프랑코는 로마 교황의 지지를 얻어내어 왕과 황제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통치권으로 여기게 되면서 정치와 종교를 하나로 결합시켰다. 프랑코 왕국은 샤를마뉴 대제 때 유럽 최강 국가가 되었으며, 이후 동서로 분리되었고 동프랑크는 독일 역사의 시작이 되고 서프랑크는 프랑스가 되었다.
대제국은 흥만성쇠를 거듭해 왔다. 어떤 제국은 오래 버텄지만, 어떤 제국은 바로 멸망했다. 이 사실은 전쟁을 하여 거대제국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유지 관리가 훨씬 더 어려운 일임을 말해준다. 통일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시도는 이집트 파라오에서 로마 황제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샤를마뉴 대제는 독자적인 길인 봉건제를 개척했다. 본래 모든 땅은 황제 소유이다. 충성스러운 가신을 뽑아 그 보상으로 황제의 땅(토지와 그에 딸린 농노, 이는 하나로 보았다)을 빌려 주었다. 그리고 가신은 황제에게 충성을 약속했다. 원래 가신이 죽으면 다시 봉건영주에게 그리고 다시 황제에게 땅을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유럽 대부분은 황제, 영주, 부유한 시민, 농노라는 이런 위계질서적인 구조의 봉건제(어원은 봉토이다)에 기반을 두었다. 농노는 토지에 딸린 것으로 이주의 자유가 없으며 노예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동프랑크 제국에서는 봉토세습이 확산되었고 결국 황제권력은 약화되었다. 독일이 강력한 중앙권력으로 발전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주교 임명권을 행사했으나, 1122년 황제와 교황은 협의를 통하여 정교가 분리되었다. 교황은 그리스도교의 최고 수장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중세 사람들의 삶의 중심은 종교와 신앙이었다. 중동에서 그리스트교와 이슬람교가 충돌했다. 1096년 그리스트교는 십자군을 결성하여 이슬람 지역를 점령했다. 그러나 200년 후에는 다시 이슬람 세력권으로 돌아갔다. 십자군 원정대는 대부분 시골출신 사람들이었다. 유럽보다 더 발전된 이슬람 지역의 도시와 문명을 보고 놀랐다. 이는 중세 유럽이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동경하는 르네상스(부활, 재생의 뜻)시대가 열렸다. 인간의 삶은 내세를 위함이라는 중세의 그리스트교적인 인간관은 현세가 중시되고 인간 자체가 학문이나 예술의 중심이 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이때 레오나르드 다빈치, 코페르니쿠스, 등등 역사상 최고로 많은 위대한 인물이 탄생됐다. 이때는 학자와 예술가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탐험가와 항해자의 시대이기도 했다. 1453년 투르크족은 지중해 지역을 장악하여 모든 통상로를 통재하자, 유럽은 바다로 길을 개척했다. 콜롬부스는 아메리카(처음에는 서인도 대륙으로 알았다. 그후 신대륙이라고 확인한 항해자 아메리고 베스푸지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했다) 대륙을 발견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스텍인과 잉카족을 죽이고 몰아내서 점령했다. 발견 당시 신대륙의 인구 7500만명이 1570년 경에는 겨우 1000만명만 남았다.
1500년경 서유럽의 그리스트교는 로마 교황의 지배아래 통일되었다. 그리고 긴 세월동안 세속화 되었다. 예수의 가르침이나 인간영혼의 구원보다 돈, 사치, 권력에 관심을 두었다. 이에 반발하여 루터와 칼뱅이 종교개혁을 주도했다. 이들(청교도)은 훗날 아메리카로 이주해 미국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때부터 유럽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신교, 청교도)간 세력다툼이 극대화되어 종교전쟁으로 발달했다. 신구의 두 종교간의 30년 종교전쟁이 그것이다. 열렬한 가톨릭교도인 스페인 펠리페 2세는 스페인 무적합대를 이끌고 프로테스탄트인 엘리자베스1세 여왕이 다스리는 영국을 침공했다.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세계 제1의 해상국가이자 식민제국으로 떠올랐다.
이 시절 중국은 자기 나라가 세계 어떤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나라의 문을 닫았고 일본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일본 전국이 통일 되었지만 외부 세계로부터 일본을 차단시켰다. 일본과 중국은 이런 쇄국정책의 결과로 몇 세기동안 서양에서 진행된 경제와 과학의 발전에 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에 의한 절대주의 시대였다. ‘짐은 국가다’라고 하며 군주는 나라안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베르사이유 같은 거대궁전을 세웠다. 그런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중상주의(국민노동을 동원하여 공장제 수공업으로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은 억제하여 국가수입만을 고려하는 정책)를 채택했다. 농민과 노동자에게는 조세와 부역으로 인하여 고통의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유럽 각국 군주들이 프랑스의 절대군주 왕정을 본보기로 삼아 통치하였다. 반면 영국에서는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의회와 시민의 중요한 권리를 보장하는 명예혁명을 이루어 의회가 정치 주도권을 쟁취하는 근대적 민주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16, 17세기 유럽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러시아에서는 이반 4세는 스스로 차르(황제) 칭호를 사용하고 러시아 전체를 자신의 사유물로 여기며 절대주의 체제를 확립했다. 그리고 교회의 도움으로 주변 나라를 공락하여 그리스트교를 전파했다. 표트르대제는 250명 사절단을 이끌고 서유럽에 장기간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러시아를 개혁하여 근대화 시켰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은 부역과 조세로 노예화 되어 갔다. 러시아는 근대화 되고 강대화 되었으나, 이는 폭력으로 이룬 근대화였기에 대다수 러시아인들은 군주를 증오하였다.
17세기 후반 18세기에서는 절대주의에 반하여 이성의 시대가 열렸다. 미신과 맹목적인 신앙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이성적으로 행동하라는 계몽주의가 그것이다. 인간의 자유평등 상태를 주장했다.
이때부터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로 이주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청교도적 근면성과 절약정신이 아메리카의 빠른 성장과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이때 최초로 세워진 대학이 하버드 대학이었다. 신대륙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이 주도권을 다투었다.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영국은 전쟁비용으로 식민지 미국에 관세를 부과하였다. 미국은 여기에 반하여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독립국가가 되었다. 독립 미국은 계몽주의에 입각하여 만들어졌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자유, 민주, 질서를 수립한 미국은 이후 많은 국가의 모범이 되었다.
미국혁명의 성공은 유럽에서도 큰 반향을 불려 일으켰다. 프랑스에서 시민들의 봉기에 의하여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 유럽 최초로 헌법에 의한 민주적 국민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정치체재는 여전히 불안했고 소요는 계속되었다. 프랑스 혁명에 불안을 느낀 주변 절대국가와의 전쟁도 계속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나폴레옹이 대중의 인기를 받았다. 혁명 이후 10년간의 혼란속에서 국민은 안정과 질서를 원했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정권 출현을 환영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공화국의 제1통령에 올랐고, 야심가인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프랑스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일으켜 유럽 전체를 지배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군대를 전멸시킴으로서 신성로마 제국의 역사를 종결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 실패하였고, 그 틈을 타 주변국가들이 동맹하여 프랑스를 공격했다. 이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또 참패했다. 나폴레옹은 유배를 당했다. 그러나 바로 그는 다시 권좌를 되찾았으나 프로이센 영국 연합군과 전쟁을 치렸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참패하였다. 나폴레옹은 다시 유배를 당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나폴레옹은 많은 업적을 세웠다. ‘법 앞에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다’ 라고 하는 민법전(나폴레옹 법전)을 도입하였고, 이는 유럽과 전세계 민법의 본보기가 되었다. 행정도 개혁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개혁으로 이제 주변 유럽 군주들은 민중의 혁명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래서 유럽군주 스스로 개혁에 앞장섰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모두가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막대한 부의 축적과 계몽주의 정신을 가진 시민계급의 성장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도시가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였으며, 운송수단은 획기적으로 발달하고, 산업이 혁신적으로 발달했다. 도시의 팽창, 공기와 물의 오염, 인간의 노동화, 빈부의 격차심화라는 문제가 나타났다. 그러나 영국은 산업화로 모범국가가 되었고, 그리고 많은 주변 나라가 영국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은 노동자에게는 많은 문제를 남겼다. 낮은 임금, 긴 노동시간, 주거지 부족, 노후대비 상실, 공장주와의 종속관계, 등으로 노동자에게는 더욱 힘든 생활이 되었다. 엥겔스는 산업화는 유산계급(부르주아)과 임금에만 의존하는 노동계급(프롤레타리아)을 출현시켰고, 이 두계급은 서로 투쟁을 한다고 했다. 엥겔스와 그의 친구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이라는 문서를 발표하고 자본가의 재산을 박탈하여 공동재산으로 만들어야 하며 폭력으로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마지막 단계는 무계급 공산주의였다. 이러한 혁명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대했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추후 사회주의 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아메리카 대륙 중부 남부에서는 연합국가를 만들어 독립하였으며, 라틴아메리카 대부분도 독자적인 국가를 만들어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는 아직까지도 정치는 불안하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메리카는 노예해방을 지지하는 중부지방과 반대하는 남부지방이 대립하여 남북전쟁을 하였으며, 공화당을 지지하는 북부가 승리함으로서 미국에서는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바로 링컨대통령 때의 일이었다. 남북이 다시 통합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를 잃고 난 후 눈을 돌려 동남아시아로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선두에 선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다. 인도를 식민화하고, 그리고 쇄국주의 중국과 아편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고,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 대륙 일부를 할양받고 강제로 개항을 하게 되었다. 중국의 경제는 영국과 프랑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미국은 일본에게 개항을 요구하였고 일본은 기꺼히 굴복하고 개항했다. 그러나 일본(무츠히토)은 이런 수모가 다시는 없도록 하기 위해서 서양문물을 열심히 배웠다. 일본은 개항한 지 50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근대산업국가로 변모했고 곧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역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표현했듯이 ‘일본은 전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 이후 식민지화는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본격적인 쟁탈전은 1869년 수에즈운하의 개통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원료와 천연자원이 채굴되었고 이때 2000만 내지는 3000만명의 흑인이 노예로 팔려나갔다. 이로 인하여 아프리카 많은 지역에서 전통적인 부족사회가 파괴되었다.
제국주의는 국가의 정책이 다른 민족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할 때 우리는 이를 제국주의라 부른다. 제국주의 역사는 국가가 존재하는 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세계 최강국인 영국은 자국민을 세계제일의 인종이라 주장했으며 다른 나라에서도 생겨났다. 독일도 그런 나라 중의 하나였다. 독일 황제가 된 빌헬름 2세는 ‘독일적인 것이 세계를 치유해야 한다’고 하며 전력을 강화했다. 여기서 자신의 지위가 도전받고 있다고 느낀 영국과 대립하게 되었다.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다. 이 사고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러시아, 프랑스, 영국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했다. 1917년 중립을 지키던 미국도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결국 독일은 항복하였고 승전국 앞에서 베르사유조약(모든 손실을 배상해야 한다는 내용)에 서명했다. 굴욕적인 평화와 베르사유의 치욕은 2차 세계대전의 씨앗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전쟁에서 1000만명 이상이 죽었고 3000만명이 불구가 되었다. 이후 유럽은 약화되었고, 미국이 강대국으로 세계무대에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19세기말 제정 러시아에서는 마르크스 엥겔스 영향이 확산되었다. 렌닌은 고도 산업사회가 아닌 낙후된 러시아 상황에 맞추어 마르크스 엥겔스 주장을 ‘프롤레타리아를 인도하기 위해서는 직업혁명가들의 엄격한 조직체인 간부정당이 있어야 한다’라고 수정하여 인민들을 선동하였다. 그리고 혁명을 일으켰다. 여기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탄생했다. 이는 러시아 내전으로 발전했고 렌닌의 러시아 공산당은 반혁명 진영을 무력화시키고 러시아를 장악했다. 이 내전 희생자는 1100만명에 이르렸고 나라 경제는 나빠졌다. 결국 렌닌은 일부 시장경제와 사유화를 인정했다. 렌닌이 죽자, 1929년부터 스탈린이 지배했다. 집단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시베리아로 추방되어 노역으로 혹사되거나 사살되었다. 200만에서 1000만명이 희생되었고 1000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농업의 집단화와 아울러 중공업 위주의 산업화가 추진되었다. 계획경제는 성공했으나 노동자의 생활은 더 나빠졌다. 반면 소련의 산업생산량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성장율은 미국 다음이었다. 스탈린주의로 숙청당한 사람은 1200만명에 달했다. 노동자를 해방시키겠다고 하고 정권을 잡고 나서 그 민중을 상대로 엄청난 학살행위를 저지른 공산당과 그 지도자는 과거 어떤 폭군보다 더했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과 인도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독립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마르크스렌닌주의 이론과 중국 독자적인 길을 절충하여 중국공산당을 결성하여 국민당과 싸웠다. 다수의 농촌빈농의 지지을 얻은 공산당이 승리하여 중국을 장악하였고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마오쩌둥의 30년 통치는 중국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이 자신들을 봉건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여기고 그를 성인처럼 숭배했다.
인도의 간디는 이와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비폭력주의와 초인적인 인내심을 통하여 인도독립을 실현했다. 그러나 모든 인종, 모든 종교, 모든 카스트들이 평화롭게 함께 살고자 하는 간디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힌두교와 이슬람 사이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인도(힌두교)는 파키스탄(이슬람교)과 분리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 의회민주주의의 체제가 들어섰으나 역사가 길지 않아 전후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인해 곤경에 처했다. 이런 혼란을 틈타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우익집단이 권력을 잡고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그 예였다. 이 시대 민주주의 정부는 좌우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과거지향적인 우익정치 세력들은 민주주의 이전으로 돌아가려 했고, 좌익은 소련을 모범으로하는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하려 했다. 이때 좌익과 우익의 개념이 생겼다. 민주주의는 미국과 같이 경제가 안정적으로 발전해가는 나라에서는 탄력을 받았다.
그런데 1929년 세계경제공황이 왔을 때는 유럽의 경제는 더 어려웠다. 이때 히틀러는 ‘모든 책임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있다’고 외치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히틀러의 허망하고 망상적인 주장은 혼란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는 돌파구가 되었다.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불과 반년만에 독일에 비민주적인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하여 독재로 국민들을 선동하였고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탄압을 가했다. 국민의 감정과 사고까지 지배했다. 그리고 독일민에게 반유대주의를 선동하면서 유대인을 탄압했다. 이런 상황에서 600만명의 유대인들이 살해되었다.
그는 4년안에 전쟁준비를 마치고 유럽주변국을 침공했다. 1939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독일군이 폴란드를 급습함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까지 항복했다. 베르사이유 치욕을 씻어냈다고 하여 독일인들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추앙했다. 독일군은 러시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참패를 당했다. 유럽의 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산되었다. 독일은 파시즘의 이탈리아와 일본과 동맹을 맺었고 일본은 미국을 기습공격했다.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체포되고, 히틀러는 1945년 자살했고 독일은 항복했다. 3달 후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제2차세계대전은 55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종전후 세계는 두 강대국이 서로 대립하는 소련(사회주의)과 미국(민주주의) 사이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면서 동서의 냉전체제가 이어졌다. 핵무기 개발과 군비경쟁으로 위태로운 평화가 지속되었고 두 강대국의 공격적인 대결에서 군비경쟁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세계는 평화공존의 시대로 들어갔다.
세계2차 세계대전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 대부분은 독립하였다. 이들 신생 국가는 종교적 민족적 사회적 갈등이 이어졌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이런 개발도상국들을 총칭하여 제3세계라는 개념이 생겼다. 제3세계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소련 미국의 두 강대국의 세력권에 벗어나려고 했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건국을 하면서 이스라엘과 아랍의 투쟁이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갈등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는 이스라엘을 지지함으로서 이슬람과 아랍은 서방의 가치와 충돌하는 결과가 되었다. 극단적인 아랍인들은 서방세계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편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테러를 저질렸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2001년 9월11일 미국 세계무역센터 폭파 테러였다.
1949년 건국당시 중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마오쩌둥의 지도하에 공산주의자들은 농업국가인 중국을 근대화 했다. 중공업 우선 정책을 펼쳤다. 이때 소련은 분야별 전문가들을 파견함으로써 많이 도웠다. 토지개혁이 단행되었다. 이때 대지주들은 토지를 몰수당하고 그들 가운데 80만명이 처형되었다. 마오쩌둥은 경제성장과 공상주의 사회의 이행을 동시에 이루었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후 중국은 실용주의 노선으로 완전 선회하였으며, 개방하면서 경제는 매년 10%이상 성장하면서 일본을 능가하는 경제대국이 되었다. 중국은 경제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 군사 부분에서도 초강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인권을 탄압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의회민주국가가 되었고 미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국의 지원으로 일본경제는 고도성장하였다. 일제 전자, 컴퓨트, 자동차는 전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일본은 20년만에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개방개혁 정책에 따라 사회주의 형제들인 동구권 국가들이 소련으로부터 해체되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내 최고 공화국이었던 러시아는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면서 강대국에서 밀려났다.
1991년 유럽국가들이 모여 경제, 정치, 군사, 외교를 협력하고 통합할 수 있도록 유럽공동체인 유럽연합(EU)을 만들었다. 유럽연합은 단일화폐(유로)를 사용하기로 했다.
소련이 해체된 후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미국은 세계 곳곳에서 세계 경찰역활을 하고 있다. 중국이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미국과 대립함으로서 경제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경쟁구도가 되었다.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미국은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중국은 이제 경제, 과학, 군사 분야에서 발전하는 단계이다. 인구가 많고 대륙이 커서 경제규모만 거대한 중국은 미국의 압박에 대처하고 있다.
옛 영광을 꿈꾸는 민족주의의 사회주의 공상당이 지배하고 있는 중국의 경제대국화는 아시아 지역에서 큰 불안을 초래하고 있다. 그런 미국은 중국을 압박하고 있고 고립화시키고 있다.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변방의 여러 민족이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가 분열되면서 약화 되었듯이 중국을 바라보는 초강대국인 미국의 목표와 전략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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