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만 모르는 일본과 중국'(미치가미 히사시)를 읽고
지은이 미치가미 히사시는 1958년생, 오사카 출생. 도쿄대 법학부, 미국 하버드대 석사, 서울대 외교학과 석사. 동아시아와 국제경제에 정통한 외교관으로 한국과 중국에서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한국 중국 내에 폭넓은 교우관계를 갖고 있다.
그는 글에서 많은 부분을 ‘공기’에 대하여 말한다. ‘공기’란 암묵적 룰(Rule) 내지는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며 따라 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지만, 요즈음 한국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반대는 ‘정론’이다. ‘정론’이란 “진짜, 국가나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나의 언어로는 부국강병이다. 이런 공기에 속박되는 나라는 큰 실수에 빠진다. 조선은 그래서 망했다. 소수의 의견은 배제된다. 다수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을 말하는 사람은 매국, 친일, 친미라는 프레임에 걸린다. 최진실에 관한 작은 반론이라도 제기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며 탄압까지도 받는다. 공기란 우리에게는 참으로 무섭다.
그때 그 상황의 분위기에 편승하는 분위기는 너무나 위압적이다. 무거운 공기가 폭넓게 억누르는 상황이 오늘의 한국이다. 공기따라 정치가 돌아간다. 정치도 공기를 만든다. 분위기에 편승하는 언론은 오히려 공기의 압력을 더 추가하고 또한 퍼날린다.
한국의 정론은 어디에 가 버렸나? 박정희 시절 그리고 그 이후 몇 년에 걸친 시대에는 정론은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런 정론은 없다. 대신 공기가 한국을 채운다. 우리는 그런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가고 있다. 공기에 반한 말을 한마디만 하여도, 두 사람 모임이든 다수의 모임이든, 바보 취급된다. 나쁜 놈이 되는 것이다. 매국노가 되기도 한다. 입을 다물고 판단을 멈추면 눈과 귀는 열려 있으니 내 생각과 마음도 그렇게 변하는 것 같다. 나도 숨을 쉬니 허파 속으로 무거운 공기만 들어가는 모양이다.
공기, 공기, 공기………..
다들 똑똑하고, 대부분인 사람들이 대학 이상의 학벌인데? 그런 무거운 공기 속에서 스스로 공기를 만들기도 하고 마시고 살고 있다.
어느 모임에 간 적이 있었다. 한잔 술을 돌리면서 구호를 외쳤다.
“우리가 남인가” 하고 한사람이 선창을 했다. 모두들
“우리가 남인가”
물론 나도 했다. 몇번 따라해 보니 진짜 우리가 남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보니 소주 잔도 다 같고 똑 같은 소주를 들고 지랄이다. 섬뜻했다.
지은이 미치가미 히사시가 제시하는 4가지 공기에 나는 하나 더 추가하고자 한다. 통일에 의의를 걸면 안되는 무거운 공기와 북한을 용인하는 공기가 있다. 북한이 진정 자유복지로 변하지 않고, 그리고 6.25 침공을 인정하지 않으면 영원한 우리의 적인데 말이다. 내 부모 형제를 죽인 배 다른 형제 가족이 근처에 살고 있다. 배 다른 형제들은 가족들을 강압으로 인권 유린까지 하면서 맨날 칼만 갈고 있다. 설마 그 칼로 내 가족을 해칠까? 혈족인데... 우리 민족이라고 내 돈으로 함께 같이 살자고 할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모든 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남인가”를 외친다.
지은이 미치가미 히사시가 주장하는 한국의 4가지 공기는 이렇다.
우리는 일본보다 국제적이고 진취적이며, 중국보다 풍요롭고 앞선 사회이다.
일본은 아직도 높은 평가를 받고 신뢰와 존경을 얻고 있지만, 한국 안에서는 그렇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맞다.
중국이 없으면 한국 경제가 돌아가지 않으니 우선 양다리 걸치기 하자.
규정과 규칙은 엄격하게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
예의지국의 예는 어디 갔는가? 유교의 그 당당한 고집스러운 정론은 어디 갔는가? 진정 짚신창 다 닳은 유교는 이제와서 공산주의, 양다리 걸치기, 핏줄, 그리고 공기로 나라를 꿰매려 하는가? 일본은 중국과 한국을 여러 방면으로 깊이 있게 공부하고 연구하여 대응하는 데, 과연 한국은 중국과 일본을 얼마나 연구하고 공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좀 잘 산다고 우쭐대면서 과거의 컴플렉스에 걸린 감정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역사는 과거로 되돌릴 것이다. 그럴수록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국인만 모르는 일본과 중국' 글 내용 중에 중요한 사항을 꺼집어 내어 보았다. 모두 쓴소리이지만 병든 자에게는 보약이 된다. 병든 자는 오늘날의 한국이다.
일본인들의 공공 예의 범절이 특별하다. 감동한다. 예의지국이라는 중국은 왜 기본적인 예절도 없는가?
20세기 일본에는 1만명의 중국인 유학생이 있었다. 공산당 창립 멤버 리다지오와 천두슈,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루쉰, 고고학자이면서 문학가 궈모뤄, 장제스 총통, 저우언라이 총리, 쑨원, 주한대사 주일대사 청융화, 왕이 외교부장이 좋은 예이다.
일본의 국가 이미지는 세계 최고이다. 경제 뿐만 아니라 안전, 주권 권력, 국제적 존엄, 민족 가치, 사회 안정, 우수한 복지, 국민의 행복도, 군사능력, 교육능력, 등등 세계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중국은 말한다. 만약 우리가 원한으로 두 눈을 가리고, 분노로 이성을 마비시키고, 편견과 적의에 가득찬 눈으로 전후 일본을 바라본다면, 상상만으로 일본 이미지를 구축한다면, 우리들은 필시 정체되어 스스로의 생각을 속박해 버릴 것이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버리고 공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일본을 봐야 한다.
일본의 중국 연구는 세밀하고 깊이가 있다. 중국인이 상상할 수 없는 분야까지 연구하고 있다. 중국의 일본 연구는 한참 뒤 떨어져 있다.
역사를 모르고 슬로우건만 내세우는 민족주의는 중국의 큰 장애가 될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 뿐만 아니라 일본인,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해 무조건 돌을 던지거나 욕을 한다. 강한 민족은 반드시 자신이 있으며, 자신있는 민족은 반드시 개방적이다.
중국에서는 ‘애국’이나 ‘민족’이라고 하면 거의 무조건 정의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후 일본에서는 ‘애국’이나 ‘민족’은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일본은 공동체(커뮤니티)를 중시하는 유럽적인 사회이고, 한국이나 중국은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미국적 사회이다.
중국인들이 많이 쓰는 기본 어휘가 실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사실에 놀랐다. 일본에서 먼저 서양개념을 이해하고 번역하였던 것이다.
어느 여론 조사에서 중국인이 싫어하는 나라는 한국인 1위이고 2위가 일본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좋아하는 나라 1위는 파키스탄, 2위 러시아, 3위가 일본이었다.
한국은 중국에 대해 국가적인 측면(외교적 이념적인 면에서 중국은 실제 이상으로 크게 본다)과 개인적인 측면(일상적 실생활 면에서 중국 사람은 수준이 낮다)이 다르다고 본다.
일본인들은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알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당한 외교, 열린 자세는 일본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한국에 대한 호감을 크게 상승시켰다. 그런 한국은 지금 어디로 갔단 말인가?
중국에는 그렇게 신경을 쓰면서 일본에 대해서는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한국은 합리적인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해도 허사이다.
일본인의 반응이다. 우경화라니 어느 나라 얘기인가요? 한국은 완전히 오른쪽인데.
한국은 60% 소국의식, 40% 대국의식이 결합하여 무력감과 외교표류를 하고 있다. 한국도 발전했으니 국제사회에 공헌도 할 수 있는데 그런 의식이 희박하다. 약소국이 대국에 갖는 콤플렉스, 미성숙한 모습이다. 줏대없이 소국의식과 대국의식을 감정적으로 왔다갔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의 주목을 받는 강대국이 되었다는 자기 교만과 오만함도 있다. 이는 실상과 매우 뛰떨어진 편견으로 굳어지기 쉽다.
한국은 ‘공기에 따른 부담이 적은’ 방향으로 안이하게 넘어 가려고 한다.
한국인들은 국가간 조약이든 무엇이든 ‘진정성이 없다’라고 하는 추상적인 말로 모든 것을 부정한다. 자기의 주관, 감정, 이념을 기준으로 일본을 바라본다.
한국은 누구 못지 않게 잘 살고 세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혈연’에 대한 집착과 ‘아시아’와 ‘동양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역사가 아닌 민족의 스토리에만 집착한다. '역사가 기억에 지면 안된다'고 한 중국 현자의 말을 인용했다.
많은 일본인들은 한국은 일본을 얕잡아 보면서 중국은 중요하게 여긴다. 미국과 일본보다 중국에 쏠리고 있다. 한국은 중국의 지배와 영향 아래 놓였던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미국과 한국은 동맹관계다. 일본은 미국과 동맹관계이다. 동맹이란 중요한 국면에서 적과 아군으로 갈린다. 중국과 미일, 양쪽 반반이니 괜찮은 걸로 해달라는 것은 말이 안되는 안보정책이고 외교정책이다.
중국이 한국을 끌어당기는 가장 큰 연결고리는 ‘역사’이다.
중국 견제는 미국이나 일본 혹은 ASEAN에 맡기고 나는 이익만 누리겠다는 어부지리식 계산이 있다면,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이고 몽상에 가깝다.
중국은 1970년 이후에만 하더라도 베트남 침공, 영토문제로 다른 나라에 군사력을 행사했다. 근래 들어 중국의 물리력에 의한 팽창주의는 주위 각국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한국이야 말로 고대 이래 중국으로부터 침략을 여러번 받은 당사자이다. 6.25도 있었다.
한국의 교과서는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의식 형성에 강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기 중심적으로 밖에 역사를 보지 않는다.
한국 측은 항상 결자해지를 주장한다. 내가 만족할 만큼 너희가 하지 않으면 그것은 역사 왜곡이고 위험한 우경화이다. 이는 결자해지도 아니고 단순한 폭론이다.
러일전쟁에 있어서 서양열강에 괴로워하는 세계의 많은 나라가 일본의 승리에 용기를 얻었다는 사실, 그 세계사적 의의는 부정할 수 없다.
중국의 58년생은 가난이 넘쳐 굶주림의 기억이고 한국의 58년생은 오전 오후반과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시대의 기억이다. 그런 말에 일본 58년생은 놀란다. 같은 세대이라 할지라도 동아시아 중국 일본 한국은 이렇게도 다르다. And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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