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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병동 지음 ‘조선인의 일본관’을 읽고

Hi Yeon 2019. 8. 9. 21:50



 

금병동 지음 조선인의 일본관을 읽고

 

금병동은 1727년생 후쿠오카에서 출생(본적은 문경)하고, 전 일본 조선대학교 교수와 도서관 부관장을 지냈다. 그가 지은 조선인의 일본관은 조일의 역사에서 조선인이 남긴 자료에 근거한 조선인의 일본관에 대한 서술이다. 즉 저자는 조선인 사신, 통신사 등등이 일본을 방문하고 보고 듣고 한 기행기, 관료들이 일본에 대한 서술, 그리고 조선인들이 일제시대 항거하면서 남긴 문헌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선인의 일본에 대한 관점을 보았다. 고려 말부터 일제가 끝나는 긴 조선의 역사에서 우리는 일본을 어떻게 보고 대응하고 그리고 무엇을 준비했는지 알 수가 있다. 객관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하였더라도 일본인이 쓴 일본관은 다소 조선인을 나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반면나를 스스로 보는 관점은 또한 자가당착에 빠질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그래도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맞는 부분을 미래를 위한 투자로 사용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국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서 보낸 사신 혹은 파견사 등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아니고, 또한 전문가 그룹을 대동한 것도 아니다. 몇몇 문인이 상대국을 방문하여 보고 느낀 것을 추상적으로 적은 것이 대부분이다. ‘상대국은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기록이 아쉽다. 전문가의 파견이나 상대국을 유학한 자는 더더욱 없었다. 상대국에서 공부한 전문가의 의견을 겸허히 듣고 대응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일이고, 그것이 부국강병을 위한 방책이고 나라를 위하는 길인데 말이다.

 

설령 사신 혹은 파견사가 최소한의 보고 느낀 바를 적고 보고하였다 하더라도 그 보고는 반대세력에 의하여 철저히 무시되었다. 실상을 제대로 이야기를 한 파견사는 좌천되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나라의 안위는 무시되고 단지 권력의 안위만을 따졌다. 상대국을 알기 위해서는 전문가 그룹을 파견하여야 한다. 그러나 전문가는 커녕 문인 몇사람을 보냈고 그마저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거나 죽여 버렸던 것이다. 상대를 보고 대응하거나 배우는 최소의 기회마저 모두 잘라 버렸던 것이다. 누가 그랬는가? 그들은 집권 귀족 세력이고 입만 나불거리는 나약한 문관들이었다. 과거 그 예를 들어보자.

 

<임진왜란 전, 김성일은 당파에 의해 정사 황윤길이 반드시 병화가 있다고 한 말과 상반된 복명을 함으로서 국토와 민족 위에 영구히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임진왜란 후, 황신은 돌아오는 길, 히젠 나고야에 도착했을 때, 일본측 통역자로부터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할 것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황신이 복명하기 1개월 전 미리 함께 갔던 군관 조덕수는 선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한 집에 열 가운데 서넛은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이었다. 잡혀간 사람들이 많아서 그곳 주민의 1/3이나 되었고 대부분 노예처럼 대우 받았다. 문자를 좀 아는 양반댁 자손들은 왜승이 되어 출가하기도 하여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였다.”

 

황신은 임진 2등공신에 기록되었으나 사건에 연좌되어 유배하여 유배지에서 죽었다.>

 

<유정 사명당대사집는 임진왜란 후 조일 강화을 위하여 파견된 승려 유정이 일본에 체류할 때 지은 시이다. 이 시를 통하여 그의 일본관을 엿 볼 수 있다.> 그러나 혼란기에 적국에 파견된 사람이 시나 적고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한심하다. 시가 아닌 조목조목 사실적 기록을 통하여, 상대국 일본이 누구인지 연구하는 자세와 그에 대한 조선의 대응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이는 필자의 생각이다.

 

<수신사 김기수 일행은 강화조약(12, 불평등 강화조약, 조선 점령을 위한 첫번째 절차)의 일본측 일행에 대한 회례사 형식이었다. 김기수는 일동기유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화륜차, 철도, 육해군의 군제, 대포, 병기, 농기, 전신, 전보, 공장, 학교, 의사당, 박물원 등의 근대적 문물을 보았다. 신문의 빠름과 편리함에 혀를 내 둘렸다. 한 개의 화륜으로 천하의 모든 것을 다 만든다. 근대적 과학기술을 습득할 필요가 있음을 말했다.

 

이듬해 귀국한 그는 상산부사가 되어 이 글을 쓴 것을 기록하고 상산고을은 만첩산곡 중에 있다고 했다. 조선정부는 모처럼 근대문명의 일단을 접하고 완곡하게 그것을 채용해야 함을 역설한 유망한 인물을 깊은 산중에 가두어 버렸던 것이다.>

 

<김홍집의 일본에서 보고 느낀 복명서이다.

 

에도에 어학교를 세워 각국의 언어 문자를 널리 가르치고 있다. 청나라와 중국 인사들이 많이 관여하는 홍아회를 만들어 청과 일본 및 조선이 마음을 같이 하면, 유럽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기술에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과 연대의 두가지 자세를 느끼고 있는 모습이다. 연대를 침략의 숨겨진 수단으로 보는 견해도 가능하다. ‘해군은 영국제도를 사용하고, 육군은 프랑스 제도를 사용한다고 군제에 언급하고, 경찰 형법에도 미친다. 개관적인 기술이면서 군제, 경찰제도, 사법제도의 근대화의 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또 천황을 언급하며 일본 황제는 오로지 부강에만 뜻을 두고 조금도 게으르지 않으며 말타고 칼쓰는 일에 이르기까지 익숙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다.”

 

고종은 자신과 비교했을까? 조선책략을 들여온 것과 얽혀 전국 유생의 맹렬한 반대를 초래하고 국론은 비등하여 그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한동안 언동을 조심할 정도였다.>

 

<김옥균 등은 1884 12월 조선에서 처음으로 부르주아 혁명운동인 갑신정변을 일으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망명전 김옥균은 3번 도일하는데 3회 모두 조선근대화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으로 최초로 사찰여행, 두 번째는 박사절단의 수행, 세 번째는 일본에서 3백만 엔를 도입하기 위한 차관의 밀사였다. 그는 1년 가까운 차관교섭이 일본 정부의 불신으로 수포로 돌아가자 일본을 믿을 수 없다고 귀국하여 자주적인 개혁운동의 구체화에 착수한다.

 

조선 정부는 김옥균이 망명한 후 자객을 일본에 보낸다. 일본은 방관하면서 그를 오가사와라와 홋가이도에 유배를 보낸다. 김옥균은 자객에게 유인되어 상하이에서 암살된다.>

 

<최초의 수신자 김기수는 후일 중앙에 돌아가 참판까지 되었다. 김홍집은 영의정이 되어 근대적 개혁에 임하지만 친일파로 간주되어 민중에게 참살당한다. 박영효는 일본에게 후작을 받아서 매국노의 길을 걷다가 병사한다.>

 

내가 본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은 정말로 나약한 문인들이었다. 3.1 독립선언서와  동학과 비교해 보자.

 

동학은 내세운 발표문은 간단 명료하다. 그리고 국내 혁명군으로서 지킬 것은 지키면서 그 주장은 정말 강력하다.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손상시키지마라.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배성을 편안케 하라.

  3. 일본 오랑케를 쫒아 없애고 왕의 정치를 깨끗이 하라.

  4.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양반귀족을 모두 없애라.

 

그러나 3.1 독립선언서는 사뭇 다르다. 선언서가 너무 길다. 본문은 읽기 어려우며 그 뜻이 너무 어렵다. 수필을 읽는 듯하다. 너무 순수하다. 어렵게 우아하게 말하여 상대를 감동시키려고 하는 말 같다. 일제가 강압적으로 조선을 병합하여 나라를 말살하고 부모와 형제 자식을 죽였는데 3.1 운동을 한답시고 공약은 너무나 순진하고 나약하다. 얼마나 젊잖고 신사적인 글인가? 무슨 항거의 글이 이렇단 말인가? 항거 하겠다는 것인가 말겠다는 것인가?

 

선언을 한 후 일제의 탄압이 무서웠나? 자기들은 살고 싶었나? 수필같은 말로 그냥 민중만을 선동하고 자기들은 무사하고 싶었나? 3.1운동 후 그들은 어떻게 탄압받았나? 3.1운동에서 맨몸으로 만세를 부르면서 따랐던 사람들은 일제에 의해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 말이다. 조선민족대표들은 마치 입으로만 떠드는 나약한 조선말 위정자와 비슷하다. 책만 읽고 글 쓰고 고집스러운 나약한 문인이었다. 비겁한 33인이여.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독립선언서는 이 정도는 되어야지.

 

우리는 조선을 대표하여 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죽음을 무렵쓰고 싸울 것이다. 우리를 따르라. 조선인이여 항거하고 싸워라,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그런데, 3.1 독립선언서는 노동자들의 인도적 데모 선언문같다. 우리 33인이 만든 3.1 독립선언서 공약 3장은 이렇다.

 

  1.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2. 마지막 한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3. 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라

조선민족대표 손병희을 비롯하여 33

 

우리나라의 유교는 외침없는 농경사회에 아주 좋은 사상이다. 국가 외부에서 오는 압력이나 국가 간의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유교는 참으로 좋은 사상이라는 것이다. 유교는 내부의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 안위를 위한 용도로 적극적으로 고집하면서 사용한 사회이념이고 통치이념이다. 그것을 적극적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만약 외부 침략이 있으면 그들의 권력이 무서질 수 있다. 그때는 나라가 병약해지더라도 그들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소극적인 방법을 평소 고집하고 사용했다. 그것이 사대교린이다. 다행이 조선의 반도라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북으로만 경계하면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나약한 문인들은 조선 500년 동안 중국의 눈치만을 보고 살아왔다. 그리고 쓸데없는 위세와 자존심만 내세우며, 나약한 몸으로 입으로만 정치하면서 양민을 수탈했다. 삼면이 바다이니 양민이 어디 도망이라도 갈 데도 없었다. 이렇게 나라 내부 권력 세력들은 나라보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갔다.

 

문명은 대륙으로부터 육지로만 오는가? 중국문명만 옳은 문명인가? 문명은 바다로도 전례가 되고 서양문명도 있었다. 노동은 하지 않고, 책 잘 읽고 잘 쓰고, 말 잘하고 시만 잘 읊으면 현자인 줄만 알았다. 문관을 최고로 여겼다. 무관, 기술자, 상인을 천대하였다. 우물 안에서 권력만 차고 수탈하면서 살면 세상은 그냥 그렇게 별일없이 돌아가는 줄 알았다. 유교는 참으로 이런 시스템에는 안성만춤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세상에는 바다도 있고 제국주의 서양이라는 세상도 있었다. 그래도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일편단심 일본을 비롯하여 서양국을 오랑케 야만국으로 치부하였다. 자기 문화가 최고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우물 안의 유교를.

 

그러나 일본은 우리와 정반대로 갔다. 무관의 나라였고 실력이 우선인 실용주의 나라였다. 유신과 쇄신을 거듭하였다. 서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배우고 실천하여 서양과 대등하게 되었다. 문화도 발달되었고 숙성되었다.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서양의 큰 국가와 견줄만했다. 그리고 서양 같이 남의 나라와 땅을 빼앗는 제국주의 나라가 되었다. 즉 힘이 지배하는 제국주의에서 일본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첫째 남을 배우고, 둘째 스스로 혁신과 쇄신하였고, 오직 부국강병만을 위해 달렸던 것이다. 그리고 서양 제국주의를 답습하여 일본도 주변국을 침범하였다. 그때 상황에서 조선이 제국주의의 제물이 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조선은 일본에게 나라를 배앗겼다. 우리가 숭상하는 유교로 본다면 일본은 영원한 패륜이다. 유교와 상관없는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영원한 패륜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 물론 어디에서나 인간은 그렇게 하면 절대 안되지만 국가는 다르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국가는 평등하지 않다. 인류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이다. 인간은 나쁜 짓을 하면 안되지만 국가는 괜찮다. 조선을 삼킨 일본이라는 국가는 패륜인가? 그러면 나라를 빼앗긴 조선은 패륜이 아닌가? 유교의 우물 속에서 자기와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고, 양민을 수탈하면서 권력 싸움만 했다. 약골이 되면서 무너져 버린 조선은 패륜인 것은 당연하다. 부폐하면 분해되어 공중으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을 지배한 문관들이 너무 순수하게 보고(유교라는 학문만 했으니), 너무 안일하게 대응하고(문관 족벌의 안위와 권력욕만 있었으니), 준비한 것은 없이 계속 양민수탈만 하였다. 그들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항거하였지만 너무 순수하게 항거하였고(문관들의 자손들이니), 독립을 위한 준비도 거의 없었다(나약한 문관들이 입만 있었다). 일본에 굴복하는 자들도 많았다. 무관이 조선 나라를 세웠으나 문관 세상이 되었고 그 문관들이 유교를 빙자하여 조선을 말아 먹었고, 결국 일본에 나라를 넘겼다. 문관들은 항쟁다운 항쟁도 하지 못했고 일제에 굴복만 일삼다 독립 준비없이 외부의 힘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미국의 도움으로 남한만 독립하여 자유민주 국가가 되었다. 또 다시 문관들의 입으로만 하는 정치가 시작되었다. 혼란만 있었다. 무관이 나섰다. 그리고 제법 크게 부국강병을 이룩하였다. 이제 문관들이 정권을 잡았다. 또 입으로만 하는 정치가 되풀이 되고 있다. 부국강병보다는 권력욕이 앞선 문관 정치인들이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파벌정치를 일삼고 있다. 앙량한 법만 공부한 나약한 문관들이 한국의 권력을 틀어잡고 나라보다 이념과 파벌이 우선으로 하여 과거 조선의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남을 침략한 적이 없었다. 그냥 책읽고 농사짓고 가난하더라도 양민을 수탈하면서 예를 지키고 살 수 있으면 되었다. 다행이 조선 500년동안은 가능했다. 행운이었다. 세상은 더 이상 평화로운 조선을 내 버려 두지 않았다. 남의 힘으로 다시 한국으로 태어났다. 제국주의 그때 시절이나 지금이나 국제사회는 정글세상이다. 아직도 그렇게 억울한가? 그렇다면 사자의 마음으로 내색하지 않고 참을 것이며, 사자의 근육질이 되기 위해서 훈련해야 할 것이며, 사자의 용기가 되기 위해서는 힘을 길려야 한다. 맨날 정치 욕망만 앞세우고 남 탓만하면서 국론분열을 야기해서는 아니된다. 과거의 감정풀이가 아닌 냉철한 머리로 역사를 인식해야 한다.

 

지금 한일이 감정싸움을 하고 있다. 아직도 한국은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조선이다. 남 탓만 하는 감정풀이를 보자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이용하는 권력이나 멋도 모르고 부창부수하는 사람들도 꼴싸납다. 그 안에 공산주의 전락과 전술이 있음에 또한 크게 놀란다.

 

남을 이해하는 것은 상대가 아닌 나를 위함이다. 남을 배우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존심을 높이기 위함이다. 남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상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지위를 높이기 위함이다. 친일이라는 프레임을 걸어 국민을 현혹시키는 무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우리가 할 일은 상대와 친하게 지내면서 배우고, 그리고 무섭게 오직 부국강병 위해 달리는 것이다.

 

금병동 지음 조선인의 일본관에서 느낀 조선인 사신 혹은 파견사는 유교라는 우물에 바진 고집스러운 문관이었다. 상대국을 방문하여 상대국을 조사할 수 있는 전문가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발 위험성의 상대 국가와 선진화된 상대 국가를 알고 그 사실을 추상적으로나 대충적으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권은 그것마저 묵살하였고 보고자를 정치적 적으로 몰았다. 뿐만아니라 사신 혹은 파견사 의견이란 자주 상대국의 위험성이 결과로 나타나고 난 다음의 감정이었다. 항상 후행성이었다.

 

한일 합방 전후로 조선인의 일본관은 극단의 척왜였으나 항상 구호로만 그쳤다. 일부분이었지만 무인들의 척왜는 효과적이고 강력했다. 하지만 문인들은 척왜를 입으로만 외쳤다. 그나마 일부는 일본을 따랐다. 어쨋던 조선은 전적 외력에 의해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가 되었다. 독립 후에도 역시 나약한 문인들의 세상이었다. 조선은 무와 기술과 상업을 멸시하면서 자기 세력만을 우선으로 하고, 입으로만 떠들고 자존심만 내세우는 나약한 문인들이 만들어간 역사였다.

 

지금도 그것이 반복되고 있다. 무와 기술, 상업이 만들어낸 선진화를 극도로 부인하고 멸시하며, 힘과 경제를 무시하고 대신 알량한 법조문만 외치며, 입으로만 떠들고 자존심만 내세우는 이념에 병든 나약한 문인들이 지금 오직 권력욕으로 나라의 키를 잡고 있다. 다 똑 같으나 하나 다른 것은 조선에서는 짚신창 다 닳은 유교에 목을 메더니 이제는 구두창 다 닳은 공산주의 전술로 국민을 현혹하고 있다.

 

 

 

금병동 지음 조선인의 일본관의 요약

 

조선은 조선서적이 일본사회에 널리 복간되어 유포되는 것을 보고, 국내사정과 정책사항이 새고 있다고 느낀 자들이 있어 책 수출금지를 상신하기도 했다. 조태억이 그중 한사람이다. 이미 일본은 주요한 조선 서적을 수입하여 정독 연구하고 있었다. 주요 자료는 <해동제국기>, <징비록>, <고사촬요>, <경국대전>, <계림유사>, <계림기어>, <여지승람>, <팔도관직> 등이었다. 거울도 정치적으로 사용하면 공격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으로 일본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의 철칙을 살린 것이다.

 

이처럼 일본인은 상당히 오래전 부터 조선인의 일본관과 그 왜곡까지도 포함하여 자기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읽으려고 유의했다. 일본인이 조선의 일본관을 더 이상 자기의 거울로 삼지 않고 중요시 하지 않게 된 것은, 자국의 근대적 선진성에 대한 자신감과 조선을 침략대상으로 정한 이후 일것이다. 항일관계에서 양민족은 서로 싫어하는 나라(민족) 1위에 있다. 국민 감정면에서 보면(1995년 아사히, 동아일보 공동여론조사) 일본인은 11%(한국이 좋다), 21%(한국이 싫다), 이고 한국인은 6%(일본이 좋다), 69%(일본이 싫다)의 결과를 보인다.

 

한국이 일본을 싫어하는 가장 큰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히데요시 침략과 메이지 조선침략

  2. 경제력과 기술력으로 대국의식의 부활과 경제수탈

  3. 남북통일에 방해

 

한국인의 현재의 일본관과 대일감정이 호전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역사적인 인식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면 금방 험악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한일 양민족의 상호이해를 막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고려시대에서도 왜구 때문에 매우 골치가 아팠고 왜구를 종식시키는 것은 국정 최대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고려는 수차례 일본에 사절을 보냈다. 김용(공민왕 15), 김일(공민왕 16) 이때 사실상 고려와 일본의 외교관계가 열렸다. 정몽주의 왜구에게 납치당해 있던 포로 수백명의 송환작업, 이성계의 왜구토벌 등이 고려시대의 대일관계의 예이다.

 

조선사신 일본에 대한 대표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송휘경의 노송당일본행록’(1420)  

 

송희경이 일본 관찰기로 조선인의 일본기행으로서 최소이다. 그당시 일본의 정치, 외교사정, 종교, 풍속 등을 상당히 정확하게 기록되었다.

 

박서생 복명(1428) 

 

일본은 불교를 숭신한다. 일본의 수차 기술을 배우자. 화폐경제와 관련하여 일본의 의 효용에 크게 놀랐다. 누구나 목욕을 즐기고 몸을 깨끗하게 한다. 일본 상점에서 상품진열이 정연하고 청결하여 시중의 음식물을 귀천없이 모두 이것을 사먹는다. 류큐의 사탕수수 이식건이나 금, , , 철 등의 광산경영법을 일본식으로 해야한다. 일본의 찬미 뿐만아니라 왜구에 납치되어 노예가 된 동포의 비참한 모습을 통해 일본인의 잔인함도 말했다.

 

신숙주 해동제국기(1471)

 

일본의 국정, 지세, 교린의 연혁, 사자의 응접기 등등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조선초기조일관계의 실체가 밝혀졌고 각지의 유력자 호족의 동정 등을 통해 이 시기 일본의 역사적 규명 면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의 구조가 중국의 봉건제도와 같다고 기술하여 그 당시 일본의 정치 형태를 처음으로 한마디로 말했다.

 

그는 진무천황부터 당금의 스코 천황까지 약술하였고 조선인이 처음으로 서술한 천황기로 객관적인 기술이 인상에 남는다. 천황은 국정과 이웃 나라(일본 내의 여러나라?)의 외교관계도 모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남자는 머리털을 자르고 단검을 찼다. 부인은 눈썹을 뽑고 이마에 눈썹을 그렸다. 집은 나무판자로 지붕을 덮는다. 사람마다 차마시기를 좋아하므로 길가에 다점이 있고 길가 사람들은 돈 1문을 주고 차 한 주발을 마신다. 사람 사는 곳마다 1000, 100명이 모이게 되면 시장을 열고 가게를 둔다. 부자들은 의지할 데 없는 여자들을 데려다가 옷과 밥을 주고 얼굴을 꾸며서, 경성(미색이 뛰어난 여자)이라 부른다, 지나가는 손님을 끌어들여서 유숙시키고 술과 밥을 먹여 돈을 받는다. 그러므로 길가는 사람은 양식을 준비하지 않는다.

 

김성일 해사록

 

외교관계가 열린 고려말부터 시작된 조일 간의 교린관계는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현에 의해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국내를 통일하고 아시아 침략을 착수하였다. 일본의 통신사 파견 요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부사 김성일(정사 황윤길)은 약 7개월간 일본에 체재하면서 일본과의 교섭 경위와 그간의 견문을 정리한 것이 해사록이다. 해사록를 통하여 보면 김성일은 민족 주체성이 뛰어났고 그의 끈질긴 교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을 감동시킨다. 이것은 그후 일본인의 조선관을 바로 잡느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당파에 의해 정사 황윤길이 반드시 병화가 있다고한 말과 상반된 복명을 함으로서 국토와 민족 위에 영구히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는 일본군이 침공한 다음해 진주공관에서 병사했다. 해사록에 김성일은 그 당시 일본을 이렇게 서술했다.

 

황금빛 지붕의 천궁은 붕새가 나는 것 같다. 관료들이 사는 집은 12루나 5성과 같다. 백성이 사는 빽빽이 즐비한 집, 만천, 가게에는 보물, 얇은 옷감이 금바구니에 담겨있고 끝없는 판자집들은 땅을 메우고 사방으로 뻗은 시가는 가로 세로로 통해 있다.”

 

황신 일본왕환일기

 

임진왜란 후 조명일의 강화조건을 마무리 하기 위해서 일본에 파견된 황신은 일본왕환일기을 남겼다. 일본왕환일기는 왕래, 각지에서 응접, 교섭 경위, 포로조선인 등등을 하나하나 귀록한 귀중한 사료이다. 동시에 일본사회의 사정을 관찰하여 풍속 등을 기록한 점에서, 당시 일본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중요 사료이다.

 

천왕은 지긋이 높아 나랏일에는 참견하지 않는다. 국민중에 문자를 해독하는 자는 승려와 공족(왕의 친족)뿐이다. 상인이 가장 부귀하고 나라의 크고 작은 비용을 모두 상인들에게 책임을 지운다. 농민은 전답마다 그 절반을 거두어 들이고 그 외에는 다른 부역은 없다. 사람들은 사우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안다. 중이나 상인이외의 남자는 각각 길고 짧은 두가지 칼을 차고 다닌다.

 

황신은 돌아오는 길, 히젠 나고야에 도착했을 때, 일본측 통역자로부터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할 것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황신이 복명하기 1개월 전 미리 함께 갔던 군관 조덕수는 선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한 집에 열 가운데 서넛은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이었다. 잡혀간 사람들이 많아서 그곳 주민의 1/3이나 되었고 대부분 노예처럼 대우 받았다. 문자를 좀 아는 양반댁 자손들은 왜승이 되어 출가하기도 하여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였다.”

 

황신은 임진 2등공신에 기록되었으나 사건에 연좌되어 유배하여 유배지에서 죽었다.

 

유정 사명당대사집

 

임진왜란 후 조일 강화을 위하여 파견된 승려 유정이 일본에 체류할 때 지은 시이다. 여기에서 그의 일본관을 엿 볼 수 있다. 통신사의 파견은 도쿠가와 전기 12(1회에 1내지 3회 기행기로 이루짐)가 만들어진다. 이를 근거로 하여 조선인의 대 일본관은 3가지 경향을 보인다.

 

  1. 조선은 교린하면서 경계심을 잃고 일본 탐정을 계속한다.

  2. 일본 유학의 성대한 모습과 우수한 학자 문인의 존재를 알고 일본과 평화우호정책에 마음을 열어간다.

  3. 일본 국학 융성과 존황론의 출현으로 전통적인 교린의 붕괴를 예감하고 새로운 대응을 모색하려는 경향이다.

 

그러나 큰 물줄기는 역시 일본에 대한 불신감과 강한 경계심이다.

 

경심 경칠송해사록

 

1607년 경섬 340여 명의 사절단의 부사였다.  이 일행은 회담겸 쇄환사(사로잡힌 조선인의 쇄환)이다. 경섬이 이때 쓴 기행일기이다. 일본의 지세, 관제, 농민, 공송, 성씨, , 일반풍속 등 소개할 만한 것이 많다.

 

소 요시도모의 종이 할복 자살하였다. 어느 오후에 원근의 장정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여 전법에 의해 칼로 교전하고 살인이 많고 적음을 가지고 승부를 결정한다. 일본의 66주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싸우게 되면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일본의 속국은 사람 잘 죽이는 것을 담용으로 한다. 살인을 많이 하는 자는 비록 천한 사람일지라도 평판은 배가 되고,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자는 비록 권위의 자제라 하더라도 온나라가 그를 버린다. 일본인은 성을 용이하게 바꾼다. 사람은 정해진 성이 없으며 비록 길가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길러서 자식으로 삼으면 그의 성을 이어 받는다. 천왕의 아들은 그의 일족에게 장가든다.

 

경심은 여행기 마지막에 이렇게 섰다.

 

강항이 포로되어 온 지 5년동안 형체를 고치지 않고 의관을 바꾸지 않으면서 방에 조용히 앉아 책을 보고 글을 짓기만 일삼고 왜인들과 상대해서 입을 연 적이 없다. 송상현의 첩은 수절을 지켰다. 유정의 일행이 오게 되자 절조를 지키고 돌아갔으므로 일본 원근에서 전파되어 아름다운 일로 일컫는다라고 했다. 대개 일본 나라는 오로지 용맹과 무용만을 숭상하는 인륜도 모르지만 절의한 일을 보게 되면 감탄하여 일컫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또한 천리인 본연의 성품을 알 수가 있다

 

조선 일본의 상호 이해의 원점을 민족주체성에 두고 인격존엄성에 구한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고 저자는 말한다.

 

2차 통신사 기행기

 

1671, 광해군 9, , , 종사관 모두 기행기를 저술했다. 일본은 조선의 원수라는 관점이 뿌리 깊었고, 이에 더하여 일본측도 대응에 독선적인 것이 있었다. 조선 사신을 접대하는 중 일본인 문위와 조선인 종자 사이에 싸움이 있어, 칼을 뺀 문위에게 여러 명의 종자가 상처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쇄환문제에서 일본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방문한 사절단은 눈물을 흘리고 통분함을 견디지 못했다고 하였다. 손으로 오장을 끄집어 내어 죽으면 보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 칭찬해 주고, 그 자손의 이름도 세상에 높아지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2차 통신사 기행기

 

1624, 인조 2년에 파견되었다. 명분상 쇄환문제와 청에 대한 방위 문제로 일본의 조총과 도금 조달이 임무였다. 부사 강홍중 동사록에서

 

두어살 된 아이도 반드시 단검을 차고 연습한다. 나라 풍속이 싸움을 좋아한다. 집집마다 군사를 기르고 병기가 정련되었다. 군량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전함이 바다에 가득하고 항상 출동준비가 되어 있다. 근래 오랫동안 군사를 쓰지 않아 군사들은 전쟁을 일으켜 공을 세울 것을 항상 생각한다. 생명을 가벼이 여기며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아 의기를 서로 흠모하니 참으로 무적의 강병이라고 하겠다고 서술했다. 풍속에 관하여, 남녀 구별이 없고 친척끼리 정을 통한다. 간부(간악한 남자)를 두는 집이 곳곳에 있었다.

 

4차 이후 통신사 (4차이후를 통신사라 하였다)

 

일본은 중국정세의 정보수집과 불안정한 조선(인조의 청에 항복하던 시대)의 양보를 끌어내려 하였다. 이때 기행기이다.

 

임광은 병자일본일기

김동명 해사록

황만낭 동사록

 

남녀가 함께 목욕한다. 그나라 홍법대가가 만든 48자의 왜의 언문은 우리나라 언문과 매우 닮았다. 여기서 일본에서 문자가 보급된 모양과 그해 출판 사정이 조선본과 관계가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해사일기에 의하면 방일한 조엄 사절단 중 도훈도 최천종이 쓰시마의 전어관 스즈키 덴조에게 이유 없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조일관계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폭발할지도 모르는 잠재적 위험성을 상징한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

 

일본동향에 대한 새로운 위기감

 

18세기 유형원의 실학사상을 계승한 이익과 그의 제자 안정복은 일본관계저서가 많다. 이익은 교활한 풍속은 우리나라가 더욱 심하다고 하여 자민족의 결점을 숨기지 않았다. 일본의 출판계나 유학의 발전을 칭찬하고 있다. ‘그들은 황이라고 하고 우리는 왕이라는 파악과 위구(염려하고 두려워함)는 이익의 사후 104년에 현실로 나타난다. 일본 국내의 동향을 빨리 파악해서 대책을 구하는 예민한 감각과 통찰력은 아무리 평가해도 충분하지 않다. 조제국의 해사록에서도 같은 통찰력이었다. 이익과 조제국의 공통점은 양자 모두 실학자 유형원에게 사숙하여 그 학통을 계승하고 좌조창을 부산포에 우조창을 진주 가산포에 설치하여 조운의 폐단을 고치는 실적을 올렸다. 이익은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지기 백년 전에 일본의 충위 무사가 일어나 천황을 도워 정원을 잡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즈음 당사자 일본인조차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 예언은 맞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장 우러한 그들은 황이라고 하고 우리는 왕이라는 사태가 정말로 발생한 것이다.

 

김기수 일동기유

 

수신사 김기수 일행은 강화조약(12, 불평등 강화조약, 조선 점령을 위한 첫번째 절차)의 일본측 일행에 대한 회례사 형식이었다. 때는 1976년 고종 13, 메이지 9년이었다. 일본은 근대 일본 모습을 보여주어 조선의 청국 의존 체질을 고치게 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생각이었고 조선 사신에게는 일본의 물정을 상세하게 정탐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김기수는 일동기유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화륜차, 철도, 육해군의 군제, 대포, 병기, 농기, 전신, 전보, 공장, 학교, 의사당, 박물원 등의 근대적 문물을 보았다. 신문의 빠름과 편리함에 혀를 내 둘렸다. 한 개의 화륜으로 천하의 모든 것을 다 만든다. 근대적 과학기술을 습득할 필요가 있음을 말했다. 이듬해 귀국한 그는 상산부사가 되어 이 글을 쓴 것을 기록하고 상산고을은 만첩산곡 중에 있다고 했다. 조선정부는 모처럼 근대문명의 일단을 접하고 완곡하게 그것을 채용해야 함을 역설한 유망한 인물을 깊은 산중에 가두어 버렸던 것이다.

 

김홍집 수신사일기

 

1880 7월 제2차 수신사로 파견되었다. 일본의 개화정세를 상세하게 탐사하는 것이었다. 김홍집은 귀국 후 바로 복명하게 되는 데, 조선이 취해야 할 외교정책을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국왕에게 바쳤다. 이 소책자의 요점은 러시아의 조선침략을 역설하여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탁하고 미국과 연합하여 자강을 도모할 뿐이라는 점이다. 김홍집은 일본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그의 복명서에서 몇가지를 골라보자

 

에도에 어학교를 세워 각국의 언어 문자를 널리 가르치고 있다. 청나라와 중국 인사들이 많이 관여하는 홍아회를 만들어 청과 일본 및 조선이 마음을 같이 하면, 유럽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기술에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과 연대의 두가지 자세를 느끼고 있는 모습이다. 연대를 침략의 숨겨진 수단으로 보는 견해도 가능하다. ‘해군은  영국제도를 사용하고, 육군은 프랑스 제도를 사용한다고 군제에 언급하고 경찰 형법에도 미친다. 개관적인 기술이면서 군제, 경찰제도, 사법제도의 근대화의 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또 천황을 언급하며 일본 황제는 오로지 부강에만 뜻을 두고 조금도 게으르지 않으며 말타고 칼쓰는 일에 이르기까지 익숙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고종은 자신과 비교했을까? 조선책략을 들여온 것과 얽혀 전국 유생의 맹렬한 반대를 초래하고 국론은 비등하여 그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한동안 언동을 조심할 정도였다.

 

박영효 사화기략

 

임오군란 후 조선 일본간 제물포 조약이 맺어지고 사죄사를 일본에 파견한다는 명목으로 1882 9, 고종19, 메이지 15, 박영효 일행의 일본 방문이 이루어졌다. 이때 김만식, 서광범, 민영익, 김옥균 등이 수행했다. 그들이 가장 감명을 받은 것은, 일본이 유신으로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고 자본주의의 길을 나아가면서 일대 부강국가를 향해 그것을 건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옥균 갑신일록

 

김옥균 등은 1884 12월 조선에서 처음으로 부르주아 혁명운동인 갑신정변을 일으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망명전 김옥균은 3번 도일하는데 3회 모두 조선근대화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으로 최초로 사찰여행, 두 번째는 박사절단의 수행, 세 번째는 일본에서 3백만 엔를 도입하기 위한 차관의 밀사였다. 그는 1년 가까운 차관교섭이 일본 정부의 불신으로 수포로 돌아가자 일본을 믿을 수 없다고 귀국하여 자주적인 개혁운동의 구체화에 착수한다.

 

조선정부는 김옥균이 망명한 후 자객을 일본에 보낸다. 일본은 방관하면서 그를 오가사와라와 홋가이도에 유배를 보낸다. 김옥균은 자객에게 유인되어 상하이에서 암살된다. 친구 와타나베 하지메는 김옥균 일본관과 그의 죽음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김옥균의 상하이 암살은 본인과 일본을 위해 자된 것이다. 김옥균은 일본이 강하게 나오면 러시아로 달리고 러시아가 강하게 나오면 일본에게 의지하는 식으로 러일을 조정해서 조선독립을 유지하는 외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암살이 없었더라면 일본인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뭏튼 여러 종류의 자료는 이 암살사건이 조 청 일 삼국의 암묵의 공모자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최초의 수신자 김기수는 후일 중앙에 돌아가 참판까지 되었다. 김홍집은 영의정이 되어 근대적 개혁에 임하지만 친일파로 간주되어 민중에게 참살당한다. 박영효는 일본에게 후작을 받아서 매국노의 길을 걷다가 병사한다.

 

기정진 이항로의 서양관

 

위정척사에서 위정은 정학을 지킨다는 것이고 정학은 주자학을 말한다. 위정척사파란 유학 이외의 일체의 학론을 사학(이단)으로 배척하는 것이다. 서양 오량케와 교통하면 머지 않아 우리 백성은 금수화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이정책의 사상적 배경이 이정진, 이항로를 비롯하여 전국의 유림의 위정척사론에 있다.

 

최익현의 일본관

 

최익현은 이항로의 제자이다. 그는 대원군 실각후 민씨 정권과 대결한다. 이때 최익현은 조약반대의 선두에 서서 행동하고 있었다. 그의 상소문에 일관하는 것은 화이사상에 기본을 둔 위정척사론의 자기 및 자민족, 정치제도, 풍속의 우위성에의 절대적인 확신이다. 그러나 일본에 관한 문제에서 그가 열거한 다섯가지는 비웃기란 어렵다. 그가 지적한 것이 거의가 맞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군사적 압박, 경제적 약탈, 조선 부녀자의 약탈, 나라마저 빠앗아버리는 행위 등등이다. 그가 일본을 금수라 부른 문제는 일본 자신도 얼마 전에 미국과 일본을 귀축영미(축은 짐승이고, 귀는 인간을 먹는다)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화를 내거나 비웃을 자격이 없다.

 

이만손, 홍재학, 송병선의 일본관

 

황준헌의 조선책락에 반대하고 위정척사를 주장했다. 이만손(이황의 직계자손) 경상도 유자들과 함께 상소하였다. 먼섬에 유배된다. 홍재학은 참형에 처해진다.

 

유생의 반발은 시세에 어둡고, 세계적 조류, 당시의 정치상황을 미세하게 파악하지 못한 측면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민족적인 위기의식에서 나온 애국적인 것이다. 이 높은 민족적 위기의식은 참으로 자주적 개화사상이나 그 운동과 연결될 때,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커다란 에너지로 전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양자의 결합을 모색하고 실현할 수 없었던 것이 조선에게는 불행이었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주고 있다.

 

동학도의 일본관

 

동학이란 경주 최제우가 창시한 것으로 그 가르침의 내용은 유 불 선을 합일화 한 것이다. 나중에 제 3세 교주 손병인은 동학 중심사상을 한마디로 잘라 인내천이라고 했다.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란 사람은 태어나면서 모두 평등하다는 뜻이다. 이는 정말로 그 시대에서는 혁명적인 사상이고 가르침이다. 조선은 이단의 학문으로 단속하는 것만 아니라 반역으로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왕명으로 최제우는 1964 3월 참형에 처했다. 그 죄명은 혹세무민이었다.

 

동학은 전국적으로 퍼졌다.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을 배척하여 의병을 일으킴)라는 전민중을 끌어넣는 일대 정치운동으로, 또한 내셔널리즘을 고양시키는 일대 민족운동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1894 2월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반란은 갑오농민전쟁의 출발점이었다. 농민군의 투쟁목표는 축멸왜이(일본 오랑캐를 쫓아 없앰)와 진멸권귀(권세가와 귀족을 몰아냄), 즉 반봉건, 반침략이다. 농민군의 대장인 전봉준은 반권력 투쟁과 반일 침락 투쟁을 결합시켜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농민군 역시 이것을 신조로 싸워나간 것이다.

 

갑오농민전쟁으로 일본은 청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포로로 삼는다. 이때 전봉준의 2차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때는 확실히 척왜(왜를 물리친다)의 반침락 투쟁에 목표를 정했다. 농민군은 일본의 근대병기 때문에 패하고 전봉준은 한성으로 압송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당시 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의 개인의 일본관이라기 보다 전국민의 일본관이었다. 이 농민전쟁은 망국기의 장대한 반일의병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