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오카다 히데히로 지음)을 읽고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 문명에서 역사의 성격을 결정했다. 황제가 통치하는 범위가 ‘천하’, 즉 세계이며 이 ‘천하’만이 역사 서술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 문명의 역사는 황제의 역사이며 영구히 변하지 않는 ‘정통’ 역사이다는 것이다. '사기' 이후에도 각각의 시대마다 공인된 ‘정사’가 ‘사기’의 형식을 한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답습하여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중국)에 관한 서술을 계속해가는 것이 중국 역사가들이 지니 숙명인 것이다.
어떤 정권이 어떤 정권을 계승했다고 하는 ‘정통’이란 관념은 중국인이 가진 역사관의 핵심을 이루는 특이한 관념이며, 중국 세계 최초의 역사였던 ‘사기’에서 가장 먼저 완성된 형태이다.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자는 황제에게 맞서는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연호와 함께 시간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황제만이 역법을 만들고 그것을 배포할 수가 있었다.
‘중국’은 국가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 개념이기 때문에 국경이라는 관념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외국이라는 관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황제가 직할하는 도시를 가진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이 있을 뿐이다. 황제의 직할지 이외의 지역에서 사는 주민들이 황제와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를 기술하는 것이 ‘열전(흉노열전, 남월열전, 동월열전, 조선열전, 서남이열전, 대완열전-사기에서, 동이열전, 왜인전-삼국지에서)들의 목적이며, 이 또한 황제의 역사를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후세인에게 객관적인 역사를 전해 주고자 하는 가상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황제는 천명에 의해 전하지는 것이고 이것이 전통이다. 이 전통에 의해 쓰여지지 않는 역사서는 반역이 되는 것이다.
오제 – 하 (은의 탕왕에게 무력으로멸망) – 은 (주의 무왕에 의해 멸망) – 주 – 진 – 한으로 내려오면서 계보상으로 모두 한 계통 황제의 자손이라고 하여 정통을 보유한 천명을 받은 천자라고 한다. 전한의 고조 유방은 평민이이었다. 즉 천명을 보유하고 있음을 입증해야 할 상황일 경우에는 선양의 형식을 가장하거나 이전 완조의 황제권을 상징하는 유품(옥새, 황제의 비보 등)을 과시하거나 하는 식으로 혁명과 수명을 정당화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하 왕조는 동남아시아계 사람들이 황하 이남 각처에 도시를 세웠을 것으로 추측하고, 은 왕조는 북아시아 수렵민 출신이며, 그리고 주는 서방의 유목민들이 건국한 나라이다. 시황제의 천하통일까지는 중국은 없었다. 황제의 직위는 진 시황제부터 시작했다. 이전에는 중국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민족조차 없었다.
사기가 다루는 시대 범위는 오제에서 시작하여 하, 은, 주, 진 왕조를 거쳐 사마천이 살았던 한 무제 치세의 중반까지이다. 여러 왕조에 걸쳐 있는 체제의 역사서를 통사라 한다. 반면 하나의 왕조만을 다루는 역사서를 '단대사'라 부른다. 한서는 사기와 다르게 단대사 체제를 취해 서기 전 206년 한 고조의 즉위에서 시작하여 한의 찬탈자 왕망이 서기 23년에 멸망하기까지를 기술하고 있다. 즉 실질적으로 한 왕조만을 다루는 역사서인 것이다. 한서 이후의 정사는 모두 단대사 체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서는 기본적으로 사기를 그대로 본뜬 데 불과하다. 사기와 한서를 통해서 중국식 역사 문화가 완성되었다. 이후 1735년 명사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같은 형식의 기전체와 황제 중심의 역사관을 취하는 정사가 2,000년 동안 역대 왕조에 의해 쓰여 왔으니 이를 가리켜 일반적으로 24사라 통칭한다. 중국의 운명은 유동과 변환이 되풀이 되었지만 역사서의 체제와 역사관 자체 그리고 정통(황제가 지배하는 변하지 않는 세계)과 중화는 고정되어 왔다.
삼국지에서 서술체제는 위, 오, 촉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서 정통이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촉서, 오서는 열전으로 기술하고 위서를 본기에 수록함으로서 정통이 후한에서 위나라로, 다시 진나라로 바뀌었음을 꾸몄다. 318년 이전의 중국 대륙에서는 흉노의 시대였고, 318년 이후에 겨우 황제라는 칭호가 있었다. 그것도 강남지역의 작은 도시(남경과 무한)에 모여 살았던 동진(318 - 420년)이었다. 동진이 - 송 - 남제 - 양 - 진으로 바뀌었고 이 모든 것도 비중국 지역에 세워진 망명 정권에 불과했다. 이것이 중국의 정통이라고 한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439년 선비족이 화북을 통일함으로서 중국은 남북조 시대가 시작된다. 나중 수의 문제가 중국 세계를 통일하는데 중국계가 아닌 선비족이었다. 수는 당으로 연결되고 수와 당 황실은 모두 선비족들이었다. 남북조의 두 정사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당나라는 선비계가 세운 북조를 계승한 당나라가 정통이라고 주장했다. 그후 후당, 후진, 후한 모두 투르크계 출신이었다. 후한 이후 후주 그리고 북송으로 이어지는데 북송의 태조 조광윤은 북방 민족 출신이었다.
북송의 재상 사마광은 자치통감(진 시황 이전 서기전 403에서 시작하여 북송의 태조 조광윤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 해인 959년까지 약 1,362년동안 일어났던 사건을 추적하여 기록한 역사서)을 편찬하였는데 동진, 송, 남제, 양, 진, 등 남조에 속하는 황제들은 황제라 부르는 반면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로 이어지는 북조의 황제들은 위주, 제주, 주주 라 부르고 있다. 이는 정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통을 만들기 위해서 남조에서 북조로 옮겨가기도 했다. 수나라가 그 예이다. 수가 정통이 아니면 당도 정통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북조의 요는 정통이 아니다고 하였다. 아무리 강력한 군사력과 드넓은 영토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적은 문화를 가지지 못한 인간 이하의 존재이며, 오로지 중화만이 문화를 향유하는 참된 인간이라는 것이 중화사상의 핵심이다. 이러한 중화사상은 오늘날에도 중국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어서 중국인들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되고 있다.
청나라에서 편찬한 명사에서 원나라의 몽골을 외국으로 취급하고 있다. 몽골이 원나라의 후예라고 확언하는 것은 중국인의 역사관에서 본다면 몽골에게 정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정사는 명사에서 종결되나 단지 만주족이 만든 청나라의 청사고에서만 전통적인 역사 서술 체제에 사로 잡히지 않았다을 뿐이다.
어쨌던 우리는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이 편찬한 정통과 중화사상에 근거한 정사에 속고 있다. 사실은 중국의 대부분의 역사는 역사와 중화가 없었던 시대가 더 많았다. 그들이 그것을 애써 부정하고 중화사상를 꾸미고 포장하고 만든 것이다.
"누가 중국을 만들었는가?"
그들은 바로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이다. 즉 "만들어지고 왜곡된 역사"라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은 그 선상에 있고 그 선상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가깝게 오랫동안 대립하고 이어져 왔던 우리는 이점을 반드시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중국의 세계, 즉 그들의 세계는 "우리(한국)를 포함하고 지배하는 불변의 영역"인 것이다.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오카다 히데히로 지음)의 내용을 인용 요약하고 그리고 의견을 첨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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