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부모 제사였다. 사월 초파일 하루 전날인 것이다. 제사는 기일이 시작되는 시각에 지낸다. 그래서 0시가 지나면 방문을 열고 제사상을 차리기 시작한다. 하루에서 가장 조용하고 신성한 시각이기 때문이다. 옛적부터 모든 제사는 그렇게 지내 왔었다.
아버지께서 맏손이다 보니 큰 형님은 1년에 크고 작은 많은 제사를 지내 왔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그때부터 제사가 합쳐지면서 회수가 많이 줄여지고 단순화 되었다. 그리고 제사지내는 시간이 기일의 시작 시간에서 저녁 시간으로 변경되었다. 많은 친척과 형제들이 쉽게 참석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함이였다. 그 덕분에 형제들이 그때는 모두 모였다. 옛날이었다. 네 분의 삼촌과 그에 딸린 사촌들까지 올 때면 그 숫자가 몇 십명이 되기도 하였다. 맏이인 아버지와 세분의 삼촌들이 다 돌아가시고 이제는 막내 삼촌 가족과 우리 형제들만 모인다. 큰 형님은 섭섭하다고 매번 투덜대지만 나는 단촐하여서 좋았다.
제사 며칠 전 내가 형님과 누님에게 전화를 올렸다. "저가 제사에 참석하는 데 오시지요?" 모두들 합창했다. "그럼 당근이지, 너를 보기 위해서도 가야지." 10년 전이었다. 이민을 가고 1년도 아니되어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막내 만큼은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없자 기력을 놓아 버렸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을 홀로 둔 죄인, 가시는 길조차 어머니 곁에서 함께 하지 못한 죄인이 되고 말았다. 그때 나는 캐나다에서 정신을 잃고 술만 마셔댔다.
그후 귀국할 기회가 있으면 산소에서 어머님을 뵈었지만 제사 참석은 10년만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을 직접 못 뵈었으니 지금도 내 눈에 비치는 어머니는 살아 계실 때의 모습에서 정지된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지 가슴으로는 모른다.
그 뿐만 아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휴전전에서 군복무를 할 때 나는 운좋게 포상 휴가를 나왔다. 달려달려 고향 언저리에 도달하여 보니 우리집 앞이 흰 천막으로 둘려쳐 있었다. 내일이면 꽃상여가 나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 모습도 내 눈에는 군대에 입영할 때의 젊은 모습으로 정지되어 있다. 역시 아버지께서는 하늘 아래에 안 계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못 느낀다. 그래서 간혹 착각한다. 부모님이 고향집에 계신다는 막연한 느낌이 그것이다.
제사를 지내고 저녁상에 모든 형제가 둘려 앉았다. 7형제 중 서울 누님이 빠졌다. 그 대신 막내 삼촌 가족이 대신했다. 두 형님, 두 누님과 여동생, 그리고 나, 그냥 같이 있는 것으로 배가 불렸다. 법주 한잔으로 음복을 하니 그때부터 왁자지껄해진다. 팔순이 다 되어가시는 큰 누님이 한소리 하신다. "책도 내고 그래, 무엇보다도 니가 돌아와서 무척이나 좋구나." And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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