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01 문화재의 보고, 경주 쪽샘
경주에 살 때 ‘쪽샘’이라는 소리는 자주 들었다. 근처를 가보았지만 그땐 어떤 곳인지 몰랐고 그냥 어른들이 말하는 쪽샘이라는 언어가 주는 느낌으로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경주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하고 여기는 정도였다.
지금 나는 경주에 있다. 경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쪽샘 이야기가 나왔고 그래서 호기심에 그 다음 날 방문해 보았다. 전에 막연히 알고 있는 경주 쪽샘이었다. 실제 가보니 경주의 가장 중심지이었고 쪽샘지역이 문화재 보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경주 시내지역(Downtown)은 상업 주거지역이나 신라시대에는 죽은 자가 머무는, 즉 분묘가 많은, 요사이 말로 공동묘지였다. 대릉원(천마총, 황남대총, 미추왕릉, 등), 노서리 고분군(금관총, 서봉총, 등), 쪽샘지구가 대표적인 예이다. 과거에는 고분지역이었지만 지금은 주거 상업 중심지로 변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경주 중심지 대부분의 지역은 죽은 자가 머무는 릉 지역이다. 그 바로 외곽 남측으로 황궁인 반월성 첨성대가 있었고, 그 반대편이 주거지였을 것이라 추즉하고 있다. 남측으로 주거지(포석정 방면), 중앙에 황궁(반월성), 그리고 북측으로 경주시내(분묘지역)였던 것이다. 즉 현재 경주 시내는 죽은 자가 머무는 분묘지역이었다.
경주 평야가 산지로 둘려싸여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경주 분지 한가운데 주택과 왕궁, 그리고 분묘가 가까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보면, 신라시대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경계없이 가까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과거 오랫동안 우리는 죽은 자와 가까이 함께 했다는 것이다. 요즈음 죽은 자는 멀리 산속으로 가는 것과 크게 달랐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분리된 것은 유교가 활성화된 조선 중기부터 아니었나 한다. 그렇고 보면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근접에 두고 살아온 날이 더 많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죽은 자를 산속으로 보낸 지는 길어 봐야 300년이었다. 이런 관습에 목숨을 걸고 지금도 지키려고 하고 있다.
쪽샘지구 유물발굴 현장을 방문했다. 나는 경주를 방문할 때마다 자주 이곳을 지나갔다. 왠 체육관이 여기에 있나 생각하고 이곳을 무심히 지나쳤다. 오늘 알고 보니 발굴현장이었다. 참으로 잘 사는 세상이다. 발굴은 그냥 천막을 쳐 놓고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여기는 철골조로 제대로 된 건물을 지어 그 곳에서 발굴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좋은 방법이다. 발굴현장, 특히 분묘 발굴현장은 산 자의 집보다 더 항온 항습 하여야 한다는것을…
나는 젊었을 때 쪽샘이라는 언어를 들으면 이상한 곳으로 해석했다. 어감도 그렇고 사람들이 둘려대며 말하는 것도 그랬다. 그후는 경주를 떠난 상경시절이었다. 쪽샘이라는 언어가 다시 들리기 시작할 때는 내가 경주에 머물기 시작한 이개월 전이었다.
지인들이 경주에 대하여 말할 때 ‘쪽샘’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타났다. 물어 본 즉, 그곳은 첨성대, 대릉원(천마총이 있는 곳)이 옆으로 하고 있는 시내 지역으로 우물이 많고 그 물빛이 쪽빛이었고, 그 물을 쪽박으로 떠 마셨다 하여 쪽샘이라 했다. 한 지역에 분묘와 우물이 많았다.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뜻이다. 사실 내가 알기로는 그곳은 근대 우리나라 최고의 요정이었다. 사실 그랬다. 지금은 문화재 구역으로 건물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누구는 말한다. 그냥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괜찮다고…
쪽샘지구 발굴현장을 방문했다. 마치 실내 체육관 중앙에 운동장이 있듯 그곳에 발굴현장이 있었다. 이 분묘의 주인은 왕족의 공주라 하였다. 신라 분묘는 적석총이다. 즉 자갈을 층층 쌓아 만든 봉우리라는 것이다. 분묘의 종류는 석관으로 조립하여 만든 것과 돌을 쌓아 만든 분묘가 있는데 신라시대는 후자를 사용했다. 그런 덕분에 도굴에 매우 안전했다. 돌아 쌓아 큰 분묘를 만들었으니, 혹이여 누군가 나쁜 마음에 도굴을 하고 싶어 들어가면, 돌이 무너져 그곳이 자신의 무덤이 되었기에 도굴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신라시대 분묘가 온전하게 유지되어 전해 왔던 이유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래도 도굴된 분묘도 많았다고 한다. 어수선한 시절, 세력의 비호아래 계획적으로 도굴하는 놈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왕릉은 표가 나서 안 도굴, 왕족 릉은 들 표가 나서 도굴, 그것보다 작은 릉은 몰라서 안 도굴, 아주 작은 것은 도굴되거나 그냥 자연적으로 분묘형태가 소멸. 뭐 이런 것이었겠지 하고 나름대로 추측해 보았다.
나름대로 잘 살아서 후대에, 아주 먼 후대까지, 남겨 줄 무엇인가 있다면 명당에 묘를 만들어 이것 저것 적고 함께 보존하면 괜찮겠지. 먼 후대에 그것이 발굴되어 하나의 역사가 되기도 하지만, 그때는 전달하는 방법이 단지 무덤 뿐이었기에 이해는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우리는 내 죽은 몸을 비석과 큰 봉분으로 보관한다. 죽어서도 멸하지 않으려는 있는 자들의 욕심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발굴현장의 안내원에게 물었다.
“그럼 그 당시에 쪽샘은 공동묘지였고, 여기서 산 자 와 죽은 자가 이웃으로 함께 했는데, 지금은 죽은 자를 멀리 산속으로 보내는 현실은 어떻게 생각 하세요?”
“조선 중기 유교와 억불정책에 의하여 절은 산속으로 가고 분묘도 멀리 갔지요. 그것이 우리의 관습이 된지는 300년 채 되지 않지요. 이 발굴 분묘는 공주의 묘입니다.”
“조선초기까지는 남자 여자 차별이 없었고 심지어 남자는 처가살이를 했다. 고려시대는 왕비도 여러번 혼인하는 시대였어요. 남성 우위 역사가 채 300년인데 지금도 대부분의 여자들은 여자의 도리에 스스로 목숨을 걸지요.
내가 답했다. 그 안내 여성에게 되돌아온 답은 이랬다.
“지금, 그것은 관습법이잖아요?”
경주에 올 때에는 사람들은 보통 불국사, 보문단지, 첨성대, 반월성, 대릉원, 등 이런 곳을 방문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 곳은 역사적 관광지이다. 한번은 가보아야 한다. 사실 더 가 보아야 할 곳이 있다. 물론 꼭 역사적 사실적 정보에 흥미가 있어야 좋겠지만, 쪽샘 같은 허름한 곳, 무엇인가 시간의 냄새가 나는 곳을 방문해 보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고적지를 방문할 때는 설명자는 주관적인 역사관으로 그곳을 설명한다. 나는 그냥 그것은 참고로 여긴다. 자서전은 상대 입장 없이 항상 자신만 찬양한다. 역사도 그렇다. 세계사를 알고 너의 입장에서 나를 보면 쉬이 알 수 있다. 설명자의 말은 그냥 참고만 하고 그곳에서 삶을 느끼면 된다.
쪽샘이 도굴이 되지 않고 잘 보존된 이유는 하나 더 있는 것 같다. 과거 쪽샘지역은 생활터전이었다. 많은 분묘와 주거 상업 건물이 섞여 있었다는 뜻이다. 분묘가 상시 일반사람들의 삶 공간에서 함께 하였기에 누군가가 도굴하고 싶어도 불가능 하였을 것이다. 만약 삶의 터전에서 먼 외딴 곳었다면 아마도 쉬이 도굴되었을 것이다. 즉 삶의 터전이 죽은 자의 터전을 지킨 셈이 된다. 이는 내 생각이다.
쪽샘지역을 방문하여 릉 사이를 걸어보고, 발굴현장을 보고, 그리고 한옥 서까래 아래에서 커피 한잔을 한다면 그 느낌이 남다를 수 있다. 강력히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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