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1997년 발생) 3년후 경제가 안정되면서 건축업도 조금씩 살아났다. 이때부터 IMF 이후 점심값도 없이 빈둥빈둥 놀던 나는 한두건씩 작은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옛날과 다르게 동료들과 공동으로 사무실을 사용하며 작은 노트북 하나로 직원없이 혼자 설계사무소 모든 일을 해 나가야만 했다. 경비를 아끼기 위함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때는 모두들 허리띠를 졸라 메었다. 일은 적고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었다. IMF가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손님 A로부터 도심 한복판에 있는 상업지에 대한 기본설계 의뢰가 있었다. 나는 며칠 밤을 지새우며서 여러번 고치고 만들고 디자인하여 아침 일찍 의뢰인을 찾았다. A는 여러 설계사무소에 이와 같은 수법으로 기본설계를 의뢰하여 이미 여러 안을 가지고 있었다. 간락한 프리핑이 끝나자 A는 내 안이 마음에 들었는 지 하나의 제안을 하였다. 설계비 1/3을 뚝 잘라 버리고는 하겠는냐고 물었다. IMF 직후이라 나는 일을 따내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설계비를 제안하였는 데 A는 그것를 뚝 잘라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3년을 넘는 IMF의 고통을 겪은 나로서는 마다 할 리가 없었다.
A과 계약 후 계약금을 받고는 나는 직접 모든 일을 처리 하였다. 옛적 같으면 기본설계만 던져 놓고 모든 것을 직원에게 시켰었으나 그때는 직원없는 나홀로 사무실였다. 내가 북치고 춤추고 노래 부르면서 관중을 즐겁게 하여야 하다는 것이었다. 다행이 설계에 따른 경비가 많이 절감되어 뚝 잘린 설계비라 하더라도 나에게는 거금이었다. 손수 상세설계도와 공사도면을 완성하여 허가를 득하자 바로 건축주 A는 공사업체를 선정하여 공사에 들어갔다. 도심의 12층 상가빌딩이니 쉽게 눈에 띄인다. 나는 최선을 다하여 디자인하였고 공사감리를 하였다.
보통 설계자는 건축주와 공사관계자들을 자주 만나고 대화한다. 그래서 나도 A의 형편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지가는 아주 저렴하였지만 IMF를 겨우 3년이 지난 상태라 도심의 큰 땅을 현금으로 매입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A는 갑자기 큰 돈을 쥐게 되었다. 본래 그는 작은 전기공사업을 하였는 데 업무중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쳐 척추장애자가 되었고 그것으로 거금의 보험금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 특별히 여러가지 보험을 많이 들어 두었던 모양이었다. 그 돈으로 땅 사고 빌딩을 올린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현금 동원력이었다.
A는 척추장애로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차는 그 당시 최고급 리무진을 타고 다녔으며 운전과 모든 시중은 부인에게 시켰다. 그렇게 돈이 많고 허세를 부려 보아도 허리부터 하반신을 전혀 사용할 수가 없으니 내 눈에는 좀 안스러워 보였다. IMF시절 사무실 기자재를 팔아 먹고 그것도 모자라 점심마저 굶고 다닌 나였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못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그에게 잘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도 나에게는 특별히 신경을 써 가면서 잘 대해 주었다. 나는 그때 무전기 같은 모토로라 핸드폰을 계속 들고 다녔다. 그것도 핸드폰이야 하면서 주변 사람에게 놀림같은 농이 생기자 그는 최신형 핸드폰을 사서 내 손에 쥐어 줄 정도였다. 그래서 남보다 특히 더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썼고 공사감리도 잘 해 주었다.
그러나 공사기간동안 그의 언행에 대하여 좋은 마음으로 볼려고 해도 자주 눈에 거슬리는 일이 한두건이 아니었다. 설계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건축주의 사생활에 깊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같이 밥도 먹고 가족이 있는 곳에서도 대화를 할 때도 많다. 가만히 보니 직원과 주변가족을 마치 쥐새끼 다루 듯 하였다. 나에게도 그랬다. 처음에는 장애자가 얼마나 심적으로 고통스럽겠는가 하고 넘어갔다. 관심을 갖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사라진 육체가 돈으로 되살아나 사람들을 추잡스럽게 몰아 세웠던 것이다. 돈의 위력은 대단했다.
모두들 눈만 컴벅컴벅 거렸다. 시공회사 관계자 뿐만아니라 많은 하청업자들이 그러했다. 어떻게 하든 A의 기분을 아니 거슬면서 그 순간만을 모면하고자 했다. 건축현장은 사실 최 밑바닥 인생이 아닌가. 그때는 큰도시 전체를 다 따져보아도 공사현장이 별로 없었다. 당연히 일감도 적었다.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그때 그때 참으면서 공사대금을 받아가면 그 당시로는 다행이었다. IMF에 다들 살아가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다. 특히 그 옆에서 모든 것을 시중드는 부인의 슬픈 눈빛과 찌든 얼굴은 특별했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일이 별로 없는 시절이다 보니 나 일 좀 시켜달라고 하청업체들이 줄을 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에게는 돈휭재에 사람휭재까지 있었던 것이다. 어려운 시절 큰 돈 있고 굽신거리는 사람들까지 풍부했으니 말이다.
드디어 공사가 다 되고 사용승인을 받을 쯤이었다. 다들 그 앞에 좋은 말 혹은 남 탓만하고 그때 그때 상황을 피해가는 상황에서 현장소장도 그랬다. 현장소장도 값싼 뜨네기였다. 부실공사에 여러번 잔소리를 나로부터 들은 소장은 폭군인 건축주에게는 제대로 말은 못하고 나 핑계만 대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 그리고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사용검사를 하고 간단한 위반사항을 고치라고 소장에게 말하고 사무실로 들어 왔는 데 건축주 A로 부터 전화가 왔다.
그냥 해 줘,
안됩니다.
야, 별 것 아니잖아.
안되요, 사장님.
야! 왜 트집이냐. 이ㅅㅅㅅㅅ, 저 ㅅㅅㅅㅅ, 쌍욕이 따발총이었다. 그것도 안되자 겁을 주었다.
"애들 보내서 보내 버리겠다. 조용히 가고 싶어, 보내 버릴거야, ㅅㅅㅅ"
내 머리는 돌아 버렸다. 그리고 나도 소리쳤다. "야, 개새끼야. 니 마음대로 해 봐" 하고 전화를 꺼 버렸다.
그후 계속 두어번 전화가 왔다. 그러한 전화협박이 통하지 않자 현장 근처 차안에서 단둘이서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하고는 계속 협박을 하였다. 어쩔 수 없었다. 이야기하자는 데. 그래서 응했다. "몸이 불편한 사람 마음은 오죽 하겠는가, 그래, 사과하고 상황설명을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하고 나는 만날 장소로 갔다.
야밤 어둠속 공사현장 공터에 시커먼 리무진이 있었다. 다가가니 그의 부인이 내려서 뒷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고개를 숙이고 보니 컴컴한 뒤좌석에 그가 들어 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래서 들어가서 그 옆에 앉았다. 내가 설명하였으나 그는 협박이었다. 만약 당장 안해 주면 내가 부리는 해결사 장애인들을 불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런 장애인 결합체가 얼마나 무서운 지를 간략하게 말했다. 그들은 하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이런 무서운 곳에서 단둘이 하기 위하여 나를 불려 내었던 것이었다. 내 머리는 번쩍거렸다. 장애인단체 세계가 떠 올랐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보통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다 할 수도 있다. 이때는 일반 사람도 IMF로 피폐해진 삶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시키면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하물며 평소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괄시마저 받는 신체장애자들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IMF 시절, 그것쯤이야. 그리고 이놈은 현재 많은 돈을 쥐고 모든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놈이 아닌가. 지금 나는 크고 검은 그놈의 승용차 안에 있다. 그는 척추장애자에 정신까지 장애일 수가 있다. 밖은 캄캄한 공사장 공터. 내가 여기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 차문을 박차고 저 검은 공간을 지나가야 하는 데. 주변사황을 나는 전혀 잘 모른다. 평소 그놈이 하는 언행으로 보아 충분이 할 놈 같아 보이는 데... ...
아아, 별 것 아닌 것, 안전에 반하는 것도 아니고, 건물 외부 공터 바닥을 조금만 고치면 되는 것, 그냥 봐 줘, 간단한 거야... ... 대충 살어, 이놈아. 그러면서 스스로 다독거려 보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나는 독이 너무 올라 와 있었다. 감성적으로 대해 주었다면 아마도 모든 것을 다 주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사실 나는 IMF를 거치면서 독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아마도 나도 살고 싶지가 않았는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해 봐, 나도 별로 살고 싶지가 않거든." 하고는 나는 차문을 열고 천천히 검은 공사장 공터를 지나 도로가 보이는 쪽으로 걸어 나갔다. 운명에 맞겼다.
다행이 아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 후 위법사항이 고쳐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는 설계비 잔금을 받지도 않은 채 사용승인을 시청에 신청했다. 보통 잔금을 아니 받고 승인해 주면 돈은 날아가는 것이다. "똥 누고 난 다음 사람마음 다 그런 것." 많은 경험을 통해 이미 나는 잘 알고 있었으나 이때 만큼은 나는 그러하지 않았다. 난 얼른 처리해 주고 잊고 싶었던 것이다.
승인서가 나왔다. 그것을 들고 그를 찾아 갔다. 서류를 그의 책상에 놓고는 돌아서는 데 그는 봉투를 하나 주었다. 보니 잔금이었다. 이미 포기 했던 돈을 받고 보니 야릇한 심정과 함께 악마같은 그의 얼굴과 찌들은 그의 부인 얼굴이 겹쳤다.
그 이후 나는 그를 보지 못하였다. 1-2년후 경기가 회복되면서 부동산 가격은 수직상승하였다. 그 빌딩이 팔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그가 펑티기한 돈으로 다시 큰 상업지를 구입하여 큰 건물을 신축한다는 소문도 났다. 거의 바겐세일 값으로 땅사고 건축한 도심 큰 상가빌딩이 제 가격을 회복하고 다시 수직 상승했다면 아마도 2-3년만에 최소 두배 이상은 되었으리라. 투자금액도 그 시절 일반적인 부자가 가질 수 없는 큰 돈인데 그 두배 이상을 받고 팔고 그리고 더 큰 빌딩을 건축하다니 돈복 있는 놈은 부려져도 있구먼.
그후 가끔 그곳을 지나치면 그때 그 일이 악몽처럼 되살아 났다. 그리고 그때 그놈에게 고분고분 하였더라면 아마도 이후 계속 큰 덩어리의 일이 그로부터 의뢰가 있었을 텐데... 아니 그놈이 마지막까지 막 갔었다면... 하면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상상하고는 쓴웃음을 짖곤 하였다. 그때도 나는 계속 벌이가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도 가끔 이 사건이 생각났다. 그동안 망각해 버렸던 그때의 순간 순간들이 되살아 나더니 그놈의 잔머리가 번떡거렸다. 그것은"그가 잔금을 떼 먹었어도 나 같은 조무래기가 반항도 못 했을텐데, 그런데 도대체 그놈은 왜 나에게 잔금을 주었을까?" 하는 그 당시의 나의 의구심과 아쉬움... 그리고 그놈의 의심이었다. 즉, 그는 공갈쟁이였고 그리고 끝까지 빈틈을 남기지 않은 철저한 사업가였던 것이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의 일반적인 서술입니다. 장애자에 대한 나쁜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And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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