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다 자기 형편에 따라 다 다르다.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어 불편한 사람은 외관상 결핍이 눈에 보이기에 장애자의 형편을 쉽게 알아 차린다. 그러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알기란 그리 쉽지를 않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혹은 마음의 상처가 있는 경우에는 그 상황을 알기에는 매우 어렵다. 어릴 때의 상처, 주변환경에 의한 다침, 젊었을 때 실패, 편협된 가족생활, 강요당하는 교육환경과 경쟁심리, 그리고 성격과 기호의 차이, 경제와 배움의 차이, 생각의 차이, 등등 우리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다르게 이 세상에 놓여 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과거 시절이든 살만한 경제적인 환경인 지금이든 그 많음은 별 차이가 없다. 아니 현재에 더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많은 다름속에서 인간이란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열길 물속은 알 수가 있어도 한길 사람 마음속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래동안 같은 지붕속에서 살아와도 진정 그 속은 알기가 어렵다. 한 이불속에서 그리 많은 세월를 지냈는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모른다. 하물며 서로 겪어 보지 않고 어떻게 서로를 이해 할 수가 있을 것인가? 평생을 하나가 되어 살아왔던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데 남을 알 수는 더더욱 없다. 특히 말없이 행동으로만 표출된다면 서로를 알 길은 묘연하다.
우리는 부부, 자식, 동료, 사회라는 여러 구성체를 만들며 살아간다. 여기서 남으로 만나 같이 살아가는 부부사이가 매우 특별한 관계이다. 살아보고 삶을 약속하여도 알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한 순간의 사랑으로 우리는 만나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가 무섭게 변해가는 세상속에 있다. 살아보아도 알기 어려운 서로의 다름이 모자람과 닫힌 관습에서 풍부와 열린세계로 나아감으로서 우리의 가정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는 것이다. 특히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길들어진 남녀역활의 구분이라는 것과 본능의 차단이라는 우리의 방식은 이민이라는 개방사회로 진입함으로서 특히 요동을 친다. 그속에서 스스로의 변화를 꾀하여 더욱 하나가 되기 보다 서로의 주장만을 한다.
보통 여성보다 변화에 능동적이지 못하고, 태생적으로 여성보다 더 충동적인 남성의 경우가 더 위험해 보인다. 왜냐하면 사회적 경제적 능력을 가족으로부터 이민전과 똑 같이 혹은 그 이상으로 요구되는 이민생활에서 사회적으로 자기능력이 박탈당하는 남성의 경우 설 자리는 많이 좁아지고 웅켜질 가슴은 급격히 적어진다. 반면, 여성은 사회 적응이 빠르나 남성을 감싸면서 이해하는 속도보다는 자기요구의 속도도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같이 시간을 보내고 같이 노는 것보다 서로 각자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 경제활동이나 놀이를 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는 우리의 방식, 서로의 다름을 잘 인정하지 않는 우리네 특성, 그리고 모두가 비슷해야 한다는 보편화된 욕구가 우리에게는 매우 팽배하다. 그래서 우리 이민생활은 많이 힘든 것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면 쉽게 수정하거나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서양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포장을 한다. 위험해도 위험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알 수가 없는 것이 우리네 가정이다. 겉으로는 평범하거나 좋아 보여도 이민가정에서 한국에서 삶보다 더 아슬아슬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길위에 서서 둘려보니 경제적으로 외관상으로 그럴 듯해 보이지만 다들 "같이 한 공간 한 때" 보다는 "떨어져 다른 공간 다른 때"가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언뜩 보면 경제적인 요인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요리조리 보면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위험해도 위험해 보이지 않다는 것이다. And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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