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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 겨울배추는 달고 향기롭다

210104 열이틀의 이탈, '나는 무엇인가'를 찾아서

Hi Yeon 2024. 1. 17. 12:29

210104 열이틀의 이탈, '나는 무엇인가'를 찾아서

 

2020년 한해가 넘어가는 12월 중순이었다. 또한 202012월은 내가 만 62세가 되는 달이다. 1998IMF 경제환란으로 직원 없이 혼자 설계사무소를 꾸러 나갔다. 그렇게 몇 년을 견디어 나가다가 갑자기 이민을 결정하고 태평양을 건넜다. 그 후 캐나다 12년은 나에게 너무나 많은 인생 이야기를 만들어 주었다. 캐나다 생활은 나를 시험하는 시간이었고, 나는 그 시험을 극복했다. 힘들었으나 캐나다 생활은 알찼고, 나의 인생을 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다.

 

201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6년에 한국을 떠났으니 꼭 10년만이었다. 그러나 한국생활이 시작되자 캐나다 생활에서 얻은 만족과 비움은 조금씩 탈색되기 시작했다. ‘남은 다 달리고 있는데라는 강박감과 남들은 다 잘 사는데라는 상대적 빈곤함이 내 마음 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런 강박감과 빈곤함이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번민이 되었다. 이렇게 그냥 무위도식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나는 계룡에서 작은 중개사무소를 개설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가서 게임방 가게을 시작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가자마자 불경기가 시작되면서 내 가게는 내리막길에 처박혀 버렸다. 나는 가진 것 마저 다 잃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세종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중개업에 전념하기 위해서 계룡에 있는 중개사무소를 세종으로 옮겼다.

 

돌이켜 보면, 캐나다 생활에서는 무거운 짐들이 많았지만 무심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한국생활에서 지금은 상대적으로 내 짐이 가벼웠지만 어찌된 일인지 오히려 마음은 더 불안했다. 이런 티끌이 쌓이고 이런 먼지가 번지면서 나도 모르게 한 덩어리의 고민과 번뇌가 자주 나를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단순한 삶으로 마음을 비웠다고 생각하였지만 막상 한국 생활에 잠기자마자 그것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조금씩 이민 전에 내가 젖어 있었던 한국생활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한국생활이 4년째이다. 지금 2020년이 다 지나가고 있다. 2020년을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다. 나는 무엇인가?, “있고 없음에 무관할 수 있을까?, 너와 나가 다름에 달관할 수 없을까?, 나는 고요의 세계에서 머물 수 없을까? 202012, 이런 물음을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세종에 한 친구가 있다. 보통 우리는 서로 0사장이라 부른다. 그는 세종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만난 부동산업자였으며 나를 많이 도워줬다. 사무소를 열 때 그가 나를 꼬셨다.

 

정사장, 한번 내가 가는 절에 같이 가보자고.”

 

어디 절, 뭘 하려.”

 

인천인데, 공부하려.”

 

그의 간곡한 권유였다. 도움을 받는 처지이기에 무작정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의 요청에 따라 그와 함께 인천에 있는 절에 하루 머물렀다. 처음으로 가는 절 생활이 무척이나 생소했고 불편했다. 그날따라 무척이나 더운 날씨 때문에 나는 한숨도 못 잤다. 힘든 경험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계속 절에 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나는 이리저리 거절했다.

 

세종에서 너무 멀고, 가까운 곳에도 절은 있는데 굳이 먼 곳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캐나다에서 큰 교통사고를 두 번이나 당한 이후로부터는 장시간 자동차에 내 몸을 싣는 것 자체가 공황장애가 되었다. 막상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절을 해보았지만 이렇게까지 내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났다. 갇힌 공간에서 엄한 규율을 따르기가 너무 어려웠고 생소하였다. 그 이후로는 절이라는 것은 예스럽고 전통적이고 아늑하다는 건축적인 의미만 부여하였다. 자주 사찰을 방문하였지만 그때마다 관광적이었고 개인적 감성적인 시간이었다.

 

사무실에서는 자주 다른 중개사와 다양한 고객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 어느 날 중개업무로 여성중개사와 그녀의 고객인 은행지점장을 알게 되었다. 함께 차를 마시고 밥도 같이 먹었다. 그들은 열성적인 교회신도들이었다. 같이 교회에 다녀보자는 권유에 그들이 다니는 대전의 큰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코로나가 한창 유행하던 때였으나 개의치 않고 나가 보았다.

몇 번 다니고 해보았지만 내 몸과 마음은 건성이었다. 어릴 때부터 종교를 가지지 않았던 내 영혼이 쉬이 꺾이지 않았던 것이다. 과학적인 이론과 무신론에 가까운 내 정신세계는 쉬이 변하지 않았다. 그냥 믿으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머리로만 알 뿐 마음으로는 되지 않았다. 몇 번을 다니다가 코로나 핑계로 교회 다니기를 그만 두었다.

 

일요일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하고 그리고 교인들과 차를 마시고 점심도 같이 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얼마나 좋으라? 내 일에도 엄청 도움이 된다. 일요일 사무실에 박혀 있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가 낫다. 그래, 맞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생활의 나침판도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만 마음은 쉬이 끌리지 않았다. 마음의 바다는 여전히 바람 따라 출령이지만 한 곳을 향하여 몰아치지 않는다. 어떻게 하리?

 

이민 전에 나는 건축사로 오랫동안 실무를 해 왔었다. 10년이 지난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니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다. 이 나이에 건축사로 다시 출발하기는 어려운 현실이었다. 하면 되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건축사 면허증을 서랍 깊은 곳에 넣어버렸다. 누구는 말했다.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건축사 일을 하면 되지 않느냐? 그래 맞다. 재능기부의 일종이겠지. 내 건강과 내 능력이 바닥이기에 나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비웠다 하더라도 내 능력을 넘어서서 하는 일은 신선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 대신 오래전에 따 놓았던 공인중개사 자격증으로 일을 했다. 건축사보다 훨씬 수월하다. 밑천이 별로 들지 않는다. 그런 덕에 쉽게 마음을 비울 수도 있었다. 내 성격인가 그것 또한 만족이 안 되었다. 이럴 봐야 은퇴를 하여 작은 집을 지으며 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짓기는 내 전공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향 부근에 땅을 훑어보았다.

 

건축사이고 부동산 중개업을 하니 그런 눈은 있었다. 다행이 헐값으로 넘어가는 한옥을 작은 돈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작은 돈으로 고향 경주 불국사 앞에 기와집을 마련했다. 오래 되었고 허름했지만, 리몰딩으로 내 손을 거치면 그럴 듯한 기와집이 되겠다 싶었다. 기역자 형의 기와집이고, 그 앞에 작은 마당이 있다. 남향이니 겨울에는 따스할 것이다.

 

세종의 부동산 사무실을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가 집을 수리하고 그리고 그곳에 안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러 번 사무실 인수자를 물색하였으나 이놈의 코로나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래서 0사장에게 내 사무실을 있는 그대로 운영을 제안했다. 0사장은 흔쾌히 응했다. 사무실은 내가 맡아 운영 할테니 걱정 말고 왔다 갔다 하고 싶은 데로 하라고 하였다. 그 대신 그는 나에게 절에서 공부하기를 제안했다. 일주일에서 열흘 동안을. 물론 내가 거절하더라도 그 친구는 내 사무실을 운영할 것이다. 그때 나는 답을 주지 않았다.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사무실과 연관하지 않고 친구 따라 절에서 공부를 한다, 그것만을 생각했다. 내 자신을 한번 돌아볼 기회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2020년도 12월이 마구 지나간다.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내가 찾아다니면서 만든 기회가 아니고 그냥 내가 응하면 생기는 기회였다. 건성으로 절과 교회를 가보았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평소 절이 교회보다 더 공감이 갔고 살가웠다. 불교에 더 끌렸다.

 

교회는 많이 자유롭고 우리 일상과 비슷하다. 반면 절은 그 반대였다. 엄한 규율과 빈약한 환경 때문에 절에 적응하기에는 힘들겠지만 마음만 접으면 다가가기에는 더 쉬우리라 생각되었다. 그렇다. 사무실은 한가하고 별일도 없으니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렇게 평소와 같이 2020년 마지막 달을 보내는 것 보다는 백배 낫겠다 했다.

그럼, 도대체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이 나를 기다릴까? 하고 궁금했다. 미리 아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상세히 묻지 않았다. 그냥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래 가보자

 

나는 그가 다시 요청하기를 기다렸다. 처음 그가 권유했을 때 나는 은근히 거절했다. 난 그를 잘 안다. 그는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나에게 권할 것이다. 나는 그때 정답게 응하리라 하고 기다렸다.

절에서는 많은 인내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견딜 것이라고 마음으로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매일 산행을 할 때마다 반야심경을 외웠다. 천수경이 무엇인지 읽고, 이해해 보고, 쉽게 독송할 수 있도록 입근육도 단련시켰다. 12월 중간을 지나고 며칠 후, 떠나기 이틀 전 내 예상대로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사장, 모레 떠나는 데 한번 나하고 가봅시다

 

, 알았습니다. 모레 몇 시에?”

 

사무실 앞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려고요

 

알았습니다. 그때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이런저런 말은 사족이었다. 내 의지를 분명하게 전달함이었다. 고맙다는 표시였다. 그래야 그도 좋은 기분이 될 것이고 권유하는 맛이 클 것이다. 나의 의지를 알 것이라는 생각이기도 했다.

이틀 후 이른 새벽에 그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아침 7시 그의 차에 올라탔다. 자동차 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형이 있었다. 그는 우리 남자 셋이서 절에 공부하려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마침 그의 형은 나와 동갑이었다. 비슷한 사람끼리 같이 동행하는 것은 마음이 든든하기도 하고 하나의 즐거움이기도 하였다. 그와 나는 고향 친구는 아니다. 그러나 4년 동안 같이 어울리다 보니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의 자동차를 내가 운전하기도 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밥을 같이 먹었다. 인생이라는 전장에서 함께 전진하는 동지 같은 느낌에 가는 길은 정겨웠다.

 

우리는 인천 도심에 있는 00산 중턱에 있는 00사에 도착했다. 주지 스님과 절 관리하는 분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미 서로 구면인 그와 그 형 덕분에 초면인 나까지 대우를 받았다.

평일 절의 공식적인 행사는 오전 6시에 시작하는 아침 예불과 오전 1030분에 시작하는 오전 예불이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우리는 바로 오전 예불에 참석했다. 처음 하는 예불이라 나는 어떠떨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변을 살피며 옆 신도가 하는 대로 따라했다. 절에 개인적으로 여러 번 갔었지만 이런 공식적인 예불은 처음이었다. 엄숙하고 절도가 있었다. 스님의 염불소리가 우렁찼고 매우 길었다. 옆 신도를 따라서 흉내 내느라 법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오전 1030분에 시작한 예불은 12시쯤에 끝났다. 모두들 공양실(식사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스님, 거사(남자), 보살(여자) 순으로 줄을 서서 밥그릇에 먹을 만큼 음식을 담았다. 식탁에 좌불자세로 앉아 점심공양을 했다. 모두 10명 정도였다. 앉고 보니 스님 바로 앞이었다.

대충 허리를 펴고 먹으니 허리를 반듯이 펴라는 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허리를 반듯이 폈다. 밥을 먹을 때도 좌불자세에 허리를 반듯이 펴고 말 한마디 못했다. 너무 엄숙하니 정말로 밥을 넘길 때마다 숨이 막히는 듯했다. 점심공양(절에서 식사)을 마치자마자 스님은 우리 셋을 자기 방으로 불렸다. 스님의 간단한 인사와 소개가 있었다. 나가기 위해 일어설 때 쯤 스님은 나를 불렸다.

 

정거사님은 친구 권유으로 왔나 봅니다. 여기에 이틀 있다가 집으로 가셔도 됩니다

 

나는 공양실 옆에 붙은 작은 방(자유로이 휴식하는 방)으로 돌아왔다. 스님의 말씀에 갈등이 생겼다. 그 말은 집으로 가라는 것이 아닌가? 해보지도 않고 퇴짜라는 생각에 내 마음은 요동쳤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축 가라 앉았다. 오후 5시에 저녁 공양을 마치고 스님은 우리 셋을 불려 놓고 설법(스님의 가르침)을 주었다. 설법이 끝나고 일어설 때 나는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말씀대로 이틀까지 지내보고 나갈까 합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렇게 하세요.”

 

사실 나가라고 하니 난 나갈 생각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친구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여 왔다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여기에 올 때는 내심 작정하고 왔었다. 나는 친구의 권유를 핑계 삼아 내 의지대로 작정하고 왔다. 친구의 권유에 한번 와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난 이런 결심으로 왔는데, 내일 나가도 괜찮다 한다. 가라는 것이야, 아니면 무엇이야? 해 보아야겠다는 용기가 사라지면서 괜한 자존심이 욱하였다.

 

스님이 싫어하면 난 하지 않아. 그래 나가지 뭐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친구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스님에게 간청해 보라고 했다. 공양보살님(절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불자)과 다른 보살(여성불자)들도 이왕 왔으니 해 보라고 충고를 하였다. 그의 형도 그만 두고 싶어 했다. 그는 막상 여기에 들어오니 몸 컨디션이 매우 안 좋은 모양이었다. 내가 나가면 자기도 같이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친구 권유로 왔지만 내가 진정 해보리라 작정하고 왔다. 어떤 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작정하고 왔다. 그런데 스님은 오자마자 집으로 가도 좋다고 한다. 나는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오기가 생겼다. 갑자기 내 마음이 변했다. 스님의 그 한마디에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나를 시험하는가? 사정해보고 안되면 그때 나가도 된다.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다. 최소 세 번까지는 할 생각이었다.

 

다음날 아침 예불을 마치고 아침 공양을 하였다. 바로 나는 스님 방에서 스님과 독대를 했다. 그리고 단호히 간청했다.

 

스님,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머리(꽁지머리)부터 깎게

 

우매, 이것이 무엇이어, 왠 머리 타령이여, 이것이 아닌가? 내 머리는 번갯불보다 더 바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스님, 그만큼 더 열심히 하겠으니 머리만큼은 그대로 두고 하면 안 될까요?

 

머리 긴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하고자 하는 마음이 문제이지요! 라고 반문하고 싶었으나 스님에게 반감을 줄 것 같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파토를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안됩니다. 하고 싶으면 깎으세요

 

예 스님, 깎고 오겠습니다.”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이왕 하려면 절연한 태도가 필요한 것이었다. 스님 방을 나서니 스님은 친구가 이 근처 이발소를 잘 알고 있으니 친구에게 말해보라며 은근히 관심을 보였다. 밖에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잘 됐어?”

 

물론 잘 됐지, 이발소 알지, 그리로 가자고

 

그가 함께 간 이발소는 정말로 70년대 이발소였다. 외부 모습도 그랬지만 내부에 들어서니 어두침침하며 거무직직 했다. 중년의 남자와 중년의 여자(물어 본즉 그들은 부부였다), 즉 이발사 아저씨와 아주마가 나를 맞이했다. 마스크를 했으니 그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따스했다. 나는 권하는 이발의자에 앉았다. 이발사가 내 꽁지머리를 보고 나에게 조심스런 눈빛을 보냈다.

 

아저씨, 저기 앉아있는 내 친구 머리는 아저씨가 깎았지요. 그런 스타일에 조금 더 짧게 깎아 주세요.”

 

내가 요청한 것은 짧은 스포츠 스타일이었다. 이 말은 들은 옆에서 서빙 하던 아주마가 다가와서 어머머 아까워, 이런 스타일이 더 좋아 보이는데 왜 자르느냐?’고 되묻는다. ‘정말 그렇게 보이느냐?’고 나는 능청스럽게 다시 물었다. 정말 그렇다고 그녀는 되받아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데, 그래도 지금은 잘라야 합니다. 잘라 주세요.”

 

내 긴 머리는 잘뚝잘뚝 잘려 나갔다. 2년 이상을 알뜰살뜰 기른 머리가 한 순간에 잘려나갔다. 몇 번의 가위질로 모든 것이 끝났다. 아주 쉬웠다. 내 마음은 무덤덤했다. 이미 작심했기 때문이다.

긴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아주마가 이 머리 보관하면 좋을 텐데 하는 소리에 나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무슨 마음으로 왜 보관해야 할까? 여자의 마음은 참으로 섬세하고 솔직한 모양이다.

 

아저씨가 내 머리를 깎고 난 후 바로 아주마가 나를 의자에 눕혔다. 그리고 따뜻한 수선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 후 그녀는 면도를 하기 시작했다. 짧은 과도 같이 생긴 옛날 면도칼이 그녀의 손길과 함께 내 얼굴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눈 주위에도, 귓구멍에도, 콧구멍에도그 다음 따뜻한 수건을 얼굴에 덮고 벗기고, 그리고 로션으로 얼굴 에 마사지를 했다. 물론 간단한 마사지이지만.

 

자리를 옮겼다. 아주마가 내 머리를 감겼다. , 내 머리가 이렇게 간단해, 씻을 것도 없네? 내 영혼의 아쉬움인가? 내 영혼의 벌거벗음인가? 아무튼 시원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다시 의자로 몸을 옮겼다. 아저씨는 내 머리를 말린 후 다시 고르기 깎기를 했다.

거울에 선 내 얼굴은 마치 중년의 장교 같았다. 타임머신이 작동했나? 옛날로 돌아갔다. 섭섭하였다. 다시 보니 이 모습도 괜찮아 보였다. 난 웃었다.

 

어이, 친구 어때?”

 

정말 정사장 답다, 최고야

 

스포츠 스타일 머리가 되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눈빛도 초롱초롱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달리기 경기의 출발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친구가 좋아하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이발 요금이 12,000원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적은 금액이다. 15000원을 건네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는 출입문에 나와서 인사를 했다. 그녀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머리를 깎는 내내 나는 마치 80년도 도시 이발소에 온 기분이었다. 아저씨 아주머니 서빙도 너무 좋았다. 그 옛날 그때는 젊은 아가씨인 것만 달랐다.

 

우리는 이발소를 나와서 절로 향했다. 절로 들어가는 골목의 포장마차에서 붕어빵을 팔았다. 큰 한 봉지를 샀다. 붕어빵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붕어빵 하나를 그에게 건네면서 물었다. 이렇게 좋은 이발소를 어떻게 알았지 하고.

내가 절에 오자마자 머리 깎는 곳이 이곳이야. 정말 잘 해줘. 부부 심성도 너무 좋고. 보통 이발소는 한가한데 여기는 항상 손님이 있다. 그는 이발소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친구는 전에 이발 요금으로 얼마를 주었어? 하고 물었다. 친구의 대답이었다. 난 만원을 더 얹어 주었지. 나는 그의 성품을 잘 안다. 역시나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이발을 하고 절에 돌아오니 절에 계시는 분들이 나를 보고는 환성으로 반가이 맞이했다.

 

잘 했어요, 훨씬 좋아요, 확 젊어졌어요, 미남인데요.”

 

친구가 잠깐 비는 시간에 인천시내를 들려보자고 하였다. 우리는 시내와 연안부두를 둘려보고 난 후 인천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절에서 잠깐 나와 세상 속에 있으니 우리는 어린애 같았다. 차이나타운은 알록달록하였다. 외국의 차이나타운과 다르게 여기는 아기자기하면서 정돈된 느낌이었다. 친구는 나를 근사한데 앉혀 놓고 기념사진을 찍어 주었다. 어디 분위기 좋은 곳에 앉아 커피 향을 풍겨나 볼까? 어디 향기 나는 곳에 앉아 빼갈 한잔을 해볼거나? 그러나 우리는 빨리 되돌아가야 했다.

 

저녁공양 시간이었다. 절 가족 다 해봐야 10명 내외이다. 세 사람, 즉 나, 친구, 친구 형이 스님 주위에 앉았다. ‘머리를 깎으니 이렇게 좋은데 말이야!’ 스님이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무서운 스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나는 열심히 하겠다 고만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내일은 동짓날이다. 오전부터 절에서는 동짓날 팥죽준비에 바빴다. 우리는 새알을 만드는 작업을 도왔다. 내일 동짓날 법회에 참석하는 불자들을 위한 팥죽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처음에는 한 알을 손바닥에 놓고 만들었다. 숙달이 되자 손바닥에 세 개의 새알을 한꺼번에 넣어서 만들었다.

 

여러 명이 한방에 앉아 수다를 떨며 새알을 만드니 정다운 한 가족 같았다. 옛날 가족들이 둘려 앉아 새알을 만들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어린 나이였다. 남자이다 보니 한 발자국 물러서서 어머니와 누나들이 하는 일을 지켜만 보았다.

동짓날 예불을 마치고 먹는 팥죽은 별미였다. 팥은 액운과 잡귀를 물리친다고 하였다. 동짓날 예불을 마치고 스님이 팥을 직접 우리에게 뿌려 주었다.

 

동짓날을 보내고 우리는 정해진 규율대로 창문도 없는 아주 작은 방에 들어갔다. 이제부터 나는 무엇인가?’를 찾는 수련이 시작되었다. 벽을 보고 참회를 하면서 좌불자세로 명상에 들어갔다. 이것은 예불(아침예불과 오전예불)과 공양시간(아침, 점심, 저녁의 3번의 식사)을 제외하고는 계속되는 수련이었고, 이런 하루 일정이 8일 이상 계속되었다. 밤낮으로 잠은 없었다.

 

처음에는 시키는 데로 내 몸과 마음을 다잡았다. 나를 죽이고 내 평생을 뒤집어 참회를 해야 했다. 참회라는 것이 무조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과관계를 찾아야 참회가 되는 것이 아닌가? 내 탓임을 깨달아야 했다. 잠도 안자고 하는 작업이라 죽을 지경이었다. 다리에는 쥐가 났다. 작은 방에서 장시간 계속 있으니 답답했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것보다 정신집중이 되는 듯하면서 금방 망상이 생겼다. 이런 혼돈의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공양시간에 잠깐 나갈 수 있으나 밥 먹고 바로 돌아와야 했다. 잡담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내 의지에 따른 실천이 내 마음을 자극시켰던 것 같았다. 처음에는 뻣뻣하게 엎드려 절을 하였지만, 점점 나도 모르게 절에 마음이라는 것이 실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건성으로 참회를 하였지만, 조금씩 나를 잊는 삼매에 들기 시작하면서 어느 듯 나도 모르게 참회할 때 마음이라는 것이 실리기 시작했다. 가끔이었다. 모든 일이 나로부터 나오고 나로부터 기인됐다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느끼는 순간순간이 반복되면서 내 가슴은 아팠다. 감정이 북박치기도 했다.

 

하는 도중 졸다가 바닥에 엎어지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잠시 쪽잠에 빠지기도 했다.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뜬눈으로 계속 명상한다. 이것이 가능해창문도 없는 독방에서는 무엇을 했는지 귀신도 몰라? 그래서 잠깐 자기 위해서 눕기도 했다. 그런데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앉았다 누웠다 하다가 차라리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좌불자세로 명상을 밤새도록 억지로 했다.

 

이렇게 여러 날 뜬 눈으로 지새우고 낮에는 불공을 드리면 과연 내 몸이 견딜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마음이 흔들릴 때는 108배를 했다. 매일매일 아침공양과 저녁공양 후 스님과의 독대에서 스님의 매서운 설법과 불호령을 들어야 했다. ‘볼펜을 들고 이것이 무엇이야?’ 하는 스님의 뜬금없는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갈팡질팡할 때가 많았다. 내가 말하면 머리를 돌려 대답한다는 무서운 핀잔을 들어야 했다. 절대로 잠을 자지 말 것을 강하게 주문하였다.

 

육체를 죽이고 과거를 시간 순으로 사건마다 미분하여 그 인과관계를 진정으로 참회할 것을 요청했다. 빠진 것이 있거나 스쳐 지나간 것이 있다면 다시 해야 했다. 가족, 부모, 친구, 직장, 등등 사건별로 모아 참회를 집중적으로 하기도 했다. 안되면 법당으로 와서 스스로의 벌로 108배를 하면서 참회를 했다.

 

모든 참회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내 영혼을 버린 후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매일 밤마다 낮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 나를 삼매에 몰아넣어야 했다. 잘 안될 때는 108배를 하였고, 어떤 때는 끙끙거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신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힘든 독방 3일 째가 지나자 다소 견딜 만했다. 이때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용기가 생겼다. ‘뭔지 모르지만, 그래 해 보지 뭐이런 것이었다.

 

어느 밤이었다. 참회의 마지막에 내 영혼을 버리고는 한층 더 몰입하면서 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벌써 3시간 째 눈을 부릅뜨고 벽에 있는 작은 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눈빛이 총알이 되어 그곳에 구멍이 날 정도였다. 자정을 훌쩍 넘겼다. 마침 내 눈앞에 벽이 없어지고 이상한 형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벽은 스크린이 되고 그 너머 무엇인가 보였다.

 

이때 나는 무엇인가 나타나 나에게 너는 이것이야하는 말 혹은 형상이 나오는 줄을 알았다. 그래서 그 얼른거리는 스크린 너머 열심히 무엇인가를 구하면서 찾았다. 마치 안개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며 헤매는 것처럼몇 시간 째 눈 깜박하지 않고 뜬 눈은 마를 대로 말라 뻑뻑했고 충혈 되었다. 차라리 감정이 북박처 눈물을 흘릴 때가 좋았다. 다음 날 스님에게 물었다.

 

그것은 허상입니까?”

 

물론 허상이다

 

이때 나는 알았다. 내가 있지도 않는 마술 방망이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나는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은 없으며,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이라는 것을...

그 다음날 이었다. 빠진 기억이 있다면 철저히 끄집어내어 철저히 참회를 하라. 대상별로 기억을 묶어서 참회를 해보라는 스님의 엄한 말씀이 있었다. 나는 점심공양을 배부르지 않게 먹고 내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내심 작정하고 들어왔던 것이다.

 

다시 해 보지 뭐?”

 

다시 내 육체를 죽이고 난 후 나는 어릴 때부터 기억을 하나하나 차례로 끄집어냈다. 가족, 부모, 친구, 사회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한 덩어리로 뭉쳐 보았다. 내가 그때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했다. 상대와 관계없이 내가 가지고 싶어서 가졌고, 내가 미워서 미워했다. 내가 슬퍼서 슬펐고, 내가 노여워서 성냈고, 내가 안타까워서 원망했고, 내가 즐거워서 즐거워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하고 싶어서 했을 것이다. 내 주위 모든 것은 그냥 있었을 뿐이다. 다 내 잣대로 했음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엉엉 울었다.

 

나를 죽이고 순간순간으로 미분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참회를 한 후 그 기억을 나로부터 멀리 버렸다. 마지막으로 내 영혼을 버렸다. 다 버리고 난 다음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남아 있는 것이 바로 나일 텐데그때 나는 무엇인가?

 

텅 비었다. 우주공간의 한 곳에 내가 있음을 느꼈다. 그 텅 빈 것이 바로 나였다. 어디에나 있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단지 느낄 수만 있는 그 빈 공간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우주인가? 그때 나는 희미하게나마 느꼈다. 이것이 내 마음, 본래의 마음이다 는 것을. 허상을 찾고자 했던 어제 저녁 그때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법당으로 들어갔다. 108배를 하면서 내 참회가 진정으로 모두에게 받아지기를 빌었다.

 

시작 후 반환점을 돌 무렵 우리는 1230일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갈 날이 지정되니 힘이 더 생겼다. 마라토너는 반환점을 돌면 그때부터 전력을 다한다. 꼭 그런 심정이었다. 왔으면 무엇인가 얻고 가야지 했다. 현재 지금 걱정거리는 없고 간소한 음식이지만 삼시세끼 제시간에 먹을 수 있다. 남을 잡는 것이 아닌 나를 잡는 일이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생각에 골인지점을 향해 부단히 달렸다.

어느 듯 마지막 날이 되었다. 우리는 저녁 공양을 마치고 스님과 독대를 했다. 스님이 각자 느낌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감사의 답을 했다.

 

나를 돌아보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연유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나와 네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깐 빌린 육체였습니다. 캐나다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지요. 스님과 만남을 행운으로 생각하며 인생의 스승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여기서 배운 것을 항상 일상생활에서 실천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노력해도 흩트리러질 때가 있지요. 그때마다 다시 스님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못했다. 너무 앞서 가는 말 같아 보였고 마음이 아닌 머리로 말하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맞는 말인지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마음으로 안다면 나는 이미 도인인 걸 말이다. “내 몸을 죽인 후 내가 참회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때 내 영혼마저 버려보니 그곳은 텅 비었다. 그 자체가 우주인가요? 본래 마음이 아닌가요? 이 마음을 조금 느껴보니, 마음은 있음과 없음이 없고, 변함과 크기도 없으며, 오감으로 알 수 없고, 또한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닌 어디에나 있다는 글귀를 알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면 건방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엄한 큰 스님이었다. 여기 머무는 내내 엄한 지시와 독한 말의 연속이었다. 공양(식사)할 때도 그랬고 독대할 때도 그랬다. 예불할 때도 그랬고 설법할 때도 그랬다. 스님은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TV로 눈여겨보고 있었다. 한번은 30분 동안 관세음보살을 말하면서 좌선할 때 크게 말하지 않았다고 나 보고 당장 집으로 가라고 했다. 물론 그때 크게 사죄했었다.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엄했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오랫동안 바닥에 좌불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스님 스스로 그렇게 독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알아주는 생불이고 도사스님이라고 하니 할 만 했겠다 싶었고, 안 보아도 우리의 마음을 다 알겠다 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한 것 아닌가? 웃고자 하는 말로, 나와 나이도 비슷한데 말이다.

스님은 엄함 속에 따뜻한 면도 있었다. 스님 방에서 덕담을 들을 때 따뜻한 차 한 잔은 너무 좋았고, 손수 만든 커피의 향도 너무 좋았다. 우리가 열심히 할 때는 말씀이 많아지면서 스님도 즐거워하였다.

스님과 독대 할 때 가끔 나에게 짤막하게 불호령 하였다. 그리고 법당에서 예불을 마치고 여러 불자에게 설법할 때였다. 그 설법 내용이 마치 그때 불호령을 나에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감동했다. 공양보살(식사 준비하는 불자)과 절에서 같이 지내는 불자들의 정성과 따뜻함도 특별했다.

 

아무튼 내가 적극적으로 생각하니 큰 스님의 엄함이 조금씩 괜찮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 열심히 하였고, 그리고 스스로 작으나마 성과가 있다고 생각하니, 몸은 힘들어도 내 마음은 조금씩 안정되었다. 중반에 들어가면서부터 스님의 엄함에서 따뜻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스님의 나에 대한 관심이었나? 그러자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부담감마저 생겼다. 물론 몰래 작은 요령을 피웠지만 말이다.

 

큰 스님은 가끔 자기 이야기를 했다. 스님의 과거 수련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상 그 이상이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 하고 수련 중 칼로 자기 살을 찔렸다고 했다. 영하의 암자에서 얼은 몸으로 오랫동안 염불을 해야 했다고 했다. 20대 그 젊은 나이에 우리나라 최고의 사찰에서 생불이 되었다면 아마도 피나는 노력이 있었으리라. 스님은 내 나이 또래이다. 지금까지 현실과 돈에 타협하지 않는 그 고집은 대단해 보였다. 내가 그런 스타일을 좋아 하나 보다. 그래서 스님이 나더러 다시 올 사람이라고 했었나 보다. 마지막 날 이틀 전이었나? 스님이 나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기분은 어때요?”

 

그때 스님의 얼굴에서 옛 어른이 자존심을 세우면서 기뻐하는 모습 같은 것을 보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스님께서 기뻐하시니 저도 매우 기쁩니다.”

 

집으로 가는 날이었다. 우리 셋은 한 차에 올라탔다. 스님 차가 우리를 앞섰다. 방어회를 사기 위해서 스님이 소개하는 방어 도매상에 도착했다. 친구가 대방어 두 마리를 사서 다시 어시장에 들려 회로 쳤다. 일부는 절에 계시는 불자를 위하여 스님에게 드리고, 일부는 우리가 세종에 도착하여 마실 한잔의 술안주용이고, 나머지는 친구가 다니는 세종의 어느 절에 갖다 드리기 위함이었다.

 

세종에 도착했다. 우리는 자주 가는 단골 음식점에 판을 벌리고 대방어회를 펼쳤다. 2020년이 막 가고 있다. 해를 보내기 전에 각자 우리는 무엇인가 했다. 수고했다고 나에게 소주 한잔의 여유를 주고 싶었다. 나 역시 중생인가 보다. 오늘 이 순간만 빼고소주 한잔에 방어회를 입안에 넣었다. 그 향기와 맛은 일품이었다. 소주의 쌉쌉함과 대방어회의 감미로움은 최상이었다. 두어 잔에 벌써 내 영혼이 황홀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잠이 솟아졌다. 자고 싶을 때 자는 잠이 얼마나 달콤하고 고마운지? 늦은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좌불자세가 아닌 의자에 앉아 지낼 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엉덩이 살이 불편했다. 보니 살이 없는 내 엉덩이가 헐고 정강이에는 물집이 생겼다. 하루 내내 열흘 동안 좌불로 앉아 있었으니 그럴 만했다. 그것을 보니 나를 낮추고자 하였던 내 자신이 떠올랐다.

 

다음 날 집 근처에 있는 원수산에 올랐다. 2020년 마지막 날이었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었다. 오르는 발걸음이 예전과 달랐다. 마음도 달랐다. 무엇이 다른지는 몰라도 발걸음은 더 가벼웠고 왠지 모르게 마음은 즐거웠다. 하얀 눈을 보는 마음도 달라졌음을 느꼈다. 눈 덮인 나무로 짠 긴 길이 보였다. 저 끝에서 갈라지는 길에는 오직 마음만이 있겠다 싶었다. 눈도, 길도, 나무도, 나도 다 같음을 느꼈다. 내 눈으로 본 것, 내 귀로 들은 것, 내 감각으로 느낀 것, 내 생각, 이 모든 것들이 허상임을 느꼈다. 다 내 탓이다. 바닥에 나를 낮추었다. 본래 마음, 그것을 느껴 보았다.

 

열이틀의 이탈은 내 일생동안 이리저리 끼인 스케일(여기서는 업이라 했다)을 없애는 작업이었다. 내 눈에 쓴 색안경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완전히 그 스케일을 없애면 본래의 나가 남을 것이다. 그러면 (본래) 나를 볼 수 있고, 또한 너를 볼 수 있고, 나아가 만물을 볼 수가 있다. 그때 나는 있지도 없지도 않는 어디에나 있는 공간 같은 것일까? , (본래) 마음인가? 하나의 예로, 본래 마음을 알면 상대(, 그들, 세상)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체험도 하나의 보람이었다.

 

스케일, 이것을 완전히 녹이고 없애기 위해서는 진정한 참회의 시간이 필요하다. 열이틀은 이런 시간이었다. 이는 보람된 큰 시작이었다. 진정 나는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수련이 반복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을 얻은 후 다시 업을 짓지 않는 방도는 무엇일까? 또 다른 크고 깊은 삼매와 더불어 혹독한 공부가 수없이 필요하겠지. 우선적으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참회를 통하여 지은 업을 녹이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저절로 더하는 업마저 더 이상 없을 것 같아 보였다. 문득 절방에 붙여 있는 시구가 떠오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욕심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