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5 자기를 버리고 더러움을 담는 무명옷
젊었을 때는 직장 때문에 양복을 주로 입었다. 고놈의 양복도 천이 울이면, 그때 기억으로 메리노 울로 기억한다, 겨울철용은 상쾌하면서 따뜻하였고, 반면 여름철용은 기분 좋게 시원했다. 확실히 근본이 있는 자연의 천은 탁월했다.
실용성 때문에 화학제품 양복을 입어 보았다. 착용 느낌이 좋지 않았다. 따뜻한 맛도 없었다. 통풍이 잘 되지 않아 땀도 찼다. 그러나 입어도 구김이 없어 다리미질 할 필요도 없었고 땟깔도 좋았다. 막 입어도 되었다. 가격도 저렴했다. 물을 잘 흡수하지 않으니 빨래하기도 쉬웠다.
울양복은 입을수록 정이 갔다. 두고두고 잘 간직하면서 입게 되었다. 그런데 화섬은 입다 보면 영 정이 가질 않았다. 고놈은 땀이나 먼지같은 나의 더러움을 훔치지 않았다. 고놈은 비비면 소리가 많이 났다. 그리고 피부에 자극을 주었다. 겉만 번지르했다. 값도 쌌다. 근본이 없는 것들… 정말로 한번 입고 버렸다.
이민을 하면서 양복 대신에 무명옷을 입었다. 청바지, 티, 속옷, 모두 무명이었다. 거라지 세일에서 구입하여 보면 대부분 무명이었다. 양말도 무명이었다. 추리하고 빨아도 얼룩이 있고, 입으면 입을수록 구김이 많이 갔다. 결국 불품없는 옷이 되었다. 새옷이라 해도 색깔은 선명하지 않았다. 입어도 폼이 잘 나지 않고 몸에 걸치면 축 처졌다. 한마디로 폼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입으면 매우 편하고 느낌이 상쾌했다. 자주 빨지 않아도 입는 데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우 부드러웠다. 그뿐인가, 손에 무엇인가 오물이 묻으면 쓱하고 옷에 닦기가 아주 쉬웠다. 여러 번 딱아도 괜찮았다. 헤진 것은 꿔메어 입었다.
부드럽고 오물을 잘 품기에 매우 위생적이다. 통풍이 잘 되어 끈적임이 없어 산뜻하다. 그래서 무명옷은 살갓에 직접 닿는 옷으로 많이 쓰인다. 수술용 꺼즈, 속옷, 애기 옷은 당연 무명옷이다.
이렇게 자기를 버려가면서 남의 허물과 더러움을 품어 주고 그리고 따뜻하고 부드럽기조차 하다. 그런데 남루하다는 이유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래도 무명옷은 아무 말이 없다. 비벼도 별로 마찰소리가 나지 않는다.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화섬옷을 좋아한다. 그놈은 질기고, 색깔도 선명하고, 아주 실용적이다. 바람도 막아준다. 그런데 맨살에 느낌이 그리 좋지 않다. 따뜻하지 않고 부드럽지도 않다. 그놈은 더러움이나 물끼를 품지 않는다. 자기 모습만 뽐낸다. 그래서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한번 입고 버린다.
무명옷 같으면서 화섬제품은 없을까? 지금도 과학자들은 연구중이다. 화학섬유로 무명옷 같은 느낌과 성능을 만들어 보자는 연구가 끊임없이 되고 있다. 그래서 최근 착용감이 좋은 화섬이 많아졌다. 특히 스포츠용, 산업용, 특수용도에 많이 쓰인다. 당연 이런 화학섬유일수록 인내의 연구가 많았기에 그나마 고급제품이 될 수 있었다.
무명옷은 이런 합섬이 유행함에 따라 시장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요사이 그놈도 인내의 연구를 많이 함에 따라 고급 패션시장에서 합섬옷을 따라 잡고 있다. 바람과 물을 막고 질긴 합섬같은 장점이 있는 무명옷 말이다.
무명옷의 특징은 남의 오물을 품는다는 것과 부드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한번 구입하면 두고두고 간직하면서 애용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와 비슷하게 돌아간다. 겉으로 보기에 별 볼일 없고 추리하지만 부드럽고 남의 더러움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비벼지고 걸레질되어도 별 소리를 내지 않고 그냥 부드럽게 더러움을 품어버린다.
그런데 보기는 좋고 땟깔도 좋아도 남의 더러움을 품지 않고 바싹바싹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 더우기 부드럽지도 못하며, 아무리 비벼도 구김이 가지 않고 하물며 질기기조차 하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의 여론을 몰고 간다.
그러나 오래 입고 보면 결국 무명이 좋다는 것을 안다. 입어 보면 알고, 그리고 오래 지나 보면 안다. 사람은 더 그렇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몇번 만나보면 금방 서로 반한다. 화섬옷 같이 때깔 좋지, 구김 없지, 가격 좋지, 대충 입어도 괜찮지, 젊었을 때야 하느님이 주신 정열로 그냥 한 눈에 딱 붙지만, 60이 넘은 사람이야 그렇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늙어도 사람 심성은 그렇지 않는 것 같다. 한두 번 만남으로 감정과 이익따라 딱 들어 붙는 경우를 많이 본다. 특히 이민자에게는 그렇다. 외로움과 소외감이 많은 이민 생활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여자도 살아 봐야 알 수 있고, 친구도 같이 오래 지내 봐야 알 수 있다. 늙어서 새로이 만난 친구는 더 그렇다. 입으면 입을수록 추리해지고 구김이 가도 오래 입다 보면 따뜻하고 부드럽고 자기를 버리고 남의 오물까지 품어주니 요놈의 무명옷이 최고이다. 물론 화섬도 연구개발을 많이 하여 무명옷 같은 화섬이 나오지만, 근데 사람들은 늙으면 자기 개발 보다는 고집이 더 세어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민하여 나는 무명 청바지와 무명 티를 주로 입었다. 캐나다에서는 그런 옷이 대세였고 입고 보니 나도 좋았다. 저렴하고 따뜻하고 상쾌하고 부드럽고 편하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계속 그런 옷을 입으니 형제들이 나무랬다. 좀 때깔 좋은 옷을 입어라고. 그래서 큰 돈 주고 좋은 화섬옷을 사 입어 보았다. 무명 옷보다 더 비쌌다. 누님이 그런 옷을 싸 주기도 했다. 한 두번 입다가 지금은 장농에 그대로 있다. 저렴하고 자기를 버리고 내 더러움을 품는다. 그리고 부드럽다. 어느 날 내 무명 내복옷을 세탁하면서 문득 나는 노년에 이제라도 이런 무명옷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즈음 오랫동안 연구실에서 인내의 연구와 개발 덕분에 화학섬유제품도 인기가 높고 고급제품도 출고 된다. 무명옷은 또 나름대로 질기고 바람과 방수가 있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런데 사람은 늙으면 늙을수록 자기 수양보다는 고집이 많아진다. 더러움을 품지 않고 부드럽지 않는 화섬같은 사람들이 자기 개발마저 없다. 더구나 늙어서 자기 고집만 부린다. 만약 화섬이 자기 개발과 연구가 없었다면 무명의 장점에 밀려 이미 오래전에 세상에서 퇴출되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새로이 만나면 당연 소란스럽다. 어디 가나 번뜩하고 깔끔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이 인기가 좋다. 화섬이 비비면 소리가 많은 것처럼, 말까지 많고 참견까지 많으면 그 사람이 한 동안 유명해지고 여론까지도 좌우한다. 아무리 그래도 무명옷 같이 자기를 버리고 남의 허물을 담아야, 그리고 또한 부드러움이 있어야 대중으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는다. 늙으면 고집만 남을수록 특히 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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