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19 형수님을 모시고 절에 가다
4월 초파일의 전날은 부모제사이다. 사실 이 날은 아버지 제사인데 어머니 제사는 아버지 제사날에 따라갔다. 예법이란다. 큰 형님은 과거보다 더 제사에 정성을 들이는 것 같다. 형님 연세가 80이다. 몸도 마음도 노쇠할 때이다. 불교를 믿으나 유교적 불교이다. 돌아가신 부모 생각이 더 나겠지.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런 모양이다.
제사상 차람도 예전과 다름이 없다. 예전 음식으로 좌포우혜, 어동육서, 또 어떻고, 그리고 무엇이고… 술잔을 들고 술을 받다가 혼이 나고… 좌측 잔을 먼저 들다가…
아버지 형제 8남매, 그분들의 자손, 우리 형제 7남매, 옛적에는 많이 낳았고 그래서 큰집인 우리집은 많이 붐볐는데, 지금은 형님과 큰 아들(큰 조카), 그리고 나뿐이었다. 어릴 때 너무 사람들이 많으니 어수선했다. 무엇보다 나에게 떡하나 돌아오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음복할 사람이 없다. 음식을 먹을 사람이 없다. 오붓하니 더 좋았다.
다음 날은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형수님이 절에 다닌다. 이제 형님이 나이가 있어 몇 년전 자동차를 처분하였다. 자동차가 없으니 어디 가기가 매우 불편했다. 형님이 아들에게 태워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다. 동생인 내가 나섰다. 내가 작년에도 온 김에 형수님을 모시고 절에서 같이 반나절을 보냈다. 그리고 절 행사를 끝내고 댁으로 모셔 드렸다. 올해도 온 김에 형님댁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날 형수님을 모시고 절에 갔다 왔다.
내 젊었을 때 어머님을 모시고 절에 다녔다. 그때는 철이 좀 덜 들어서 어머님이 원할 때만 몇번 그랬다. 내가 좀더 적극적으로 어머니와 함께 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에 형수님과 절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내가 막내이니 큰 형수님은 부모와 같다. 형수님도 많이 늙었다. 그때 그때 잘하리라 하는 생각에 형수님과 동행을 했는 것이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울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사실은 내 젊었을 때는 형수를 도워주기는 커녕 저항아였다. “제사 힘들다 그러시지 마시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세요.” “안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항상 나는 폭풍의 눈이었다.
형수님이 다니는 절은 경주에 있는 금선사이다. 이 절 주지는 비구니 스님이다. 비구니 스님이 하는 예불은 좀 편안했다. 남자 스님보다 덜 엄했고 많이 자유로웠고 자애로웠다. 남자 스님은 보통 규칙과 예법을 많이 따진다. 무뚜둑하다. 염불 중 좀 시끌시끌하면 금방 야단이다. 예불도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법당의 그 무엇보다 산사람이 우선이고, 여기 모인 사람이 우선이다. 주지인 비구니 스님이 존경스려웠다.
요사이 자주 법당에 간다. 그때마다 무심코 보고 넘겨버린 것들이 요즈음은 눈에 들어온다. 부처상은 왜 반라일까? 왜 지금도 인도사람과 닮은 부처상일까? 부처상은 왜 우리 옷 양식이 아닐까? 왜 고급스럽운 옷으로 치장했을까? 화려한 목걸이와 머리장식은 왜 했을까? 눈은 왜 그리도 좁고 길며 눈매가 날카로울까? 입술은 왜 금방이라도 꾸짓을 것 같을까? 초기 인도 불상과는 많이 다름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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