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15 누님, 여동생과 함께 부모님 산소에 가다
누님 49재를 마치고 절에서 점심공양을 하였다. 그 또한 별미였다. 형제, 자매, 조카, 친척분들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바로 위 누님과 여동생이 온 김에 부모님 산소에 가고 싶다고 하였다. 내 차로 두 분을 태우고 문중산이 있는 감포 방향으로 달렸다. 다 60이 넘은 딸래들이 돌아가신 엄니를 이때(엄니의 맏딸 49재) 그렇게도 보고 싶었단 말인가?
산길로 조금 달리고 그리고 좀 산 속으로 걸어서 오르니 양지 바른 너어른 곳에 비석이 하나 보였다. 아버님 어머님 비석이다. “엄마 딸이 왔어요” 하며 누님이 묘비를 보고 말했다. 마치 어머니 영혼을 부르는 것 같았다. 황남빵, 바나나, 그리고 과일을 두고 소주 한잔을 올렸다. 그리고 절을 했다.
잔디에 달랑 비석 하나만 있다. 비석에는 아버지 이름 옆에 어머니 성만 있다. 난 여기서 어머니를 느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이미지를 떠 올리는 상징적인 봉분이나 유골함을 볼 수 없어서 그랬을까? 그래, 작은 어머니 비석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 비석이라도 붙잡고 우던가 속싹이던가…
합장은 부부를 한 봉분에 안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 옛날에는 부부를 한 몸으로 보거나 아내는 남자에게 딸린 것으로 보고 안장했으리라. 그러나 부부 각각 봉을 옆으로 두고 안장하는 것도 합장이라 한다. 후자는 아마도 개선된 형태인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가 발전하면서 부부가 죽는 시기가 다름에 따라 굳이 만든 봉분을 파헤쳐 합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단일분에서 쌍분으로 발전했으리라 나는 짐작한다.
봉분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으로 보면 사자의 이미지이다. 사자의 영혼이 봉분에 있다는 감정으로 다가간다는 뜻이다. 마치 돌아가신 분이 애뜻하게 여겼던 물건을 보고 그 자손이 그 물건을 만지거나 안고 우는 것 같다는 것이다. 대상이 없으면 감정이입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부처를 보고 합장하고 십자가나 초승달을 보고 기도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런 이미지가 없거나 다른 이미지와 겹치면 감정을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 한 봉분에 부부를 같이 모시면 그런 현상이 생긴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각각의 이미지보다 부부라는 이미지가 된다. 개별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사람 감성보다 예법을 중히 여기는 옛 사람들의 고약한 권력 때문이다. 합장 형태의 쌍분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각각의 봉분이 있으니 우리는 쉽게 나름대로 아버지 묘에 엎드려 울거나 어머니 묘에 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쌍분 앞에 하나의 비석으로 부부를 같이 표기를 하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요즈음 화장을 많이 한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시신을 화장한 후에는 화장장으로부터 작은 봉지 두 개를 받는데 그것이 유골가루이다. 보통 항아리(유골함)에 그 봉지를 담아서 상주에게 전해진다. 상주는 항아리를 납골당에 모시거나 혹은 매장을 한다. 유골함을 납골당에 모실 경우 부부일 경우 각각의 유골함을 옆으로 같이 둔다. 이때 우리는 항아리가 개별성을 가지고 있기에 어머니 유골함을 보면 어머니를 아버지 유골함을 보면 아버지를 떠 올릴 수 있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자의 이름을 한 곳에 표식하는 경우는 있겠지만 부부의 유골을 한 항아리(유골함)에 합장한다면 아마도 매우 이상할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유골을 매장할 때 많은 경우 한 곳에 합장하고 비석도 하나로 통합한다. 따져 보면 이는 전형적인 고왕조 시대 합장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화장 후 매장을 하고 그 위에 비석을 세운다. 세월이 흘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그 바로 옆에 매장을 하고(말이 매장이지 그냥 살짝 손으로 팔 정도로 파고 봉지 두개를 놓는 정도이다) 아버지 어머니 이름을 같이 한 하나의 비석으로 대체된다. 기존 아버지 비석을 그대로 두고 어머니 비석을 그 옆에 두면 더 쉬운데 말이다. 결국 평지에 남은 것은 단 하나의 비석뿐이다. 보이는 것은 이것 하나이다. 보고 느끼는 대상이 하나이니 그것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이미지도 하나이다. 이는 순장에서 출발한 전형적인 초기의 합장형태이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는 이런 합장형태이다. 산소에는 아버지 이름 옆에 어머니 성만 있은 비석 하나만 덜렁 있다. 그래서 나는 부모 산소에 갈 때마다 어머이를 떠 올리기가 어렵다. 아버지 이름 옆에 어머니 성만 있는 비석 하나에서 엄마 영혼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갈 때마다 화가 난다. 아버지만 있고 어머니는 없기 때문이다. 인근에는 아버지 형제들의 산소가 있다. 그곳에는 봉분형태로 합장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봉분이라는 개별성이 있어 부부 각각을 이미지화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처음 산소에 갔을 때, 난 붙잡고 울 어머니 비석을 찾았다. 그런데 난 난, 안절 부절하면서 그냥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울어버렸다. 아마도 어머니 영혼이 서려 있을 만한 대상을 찾지 못해서 울었는지 모른다.
자연장이나 수목장을 할 때도 우리는 최소한 각각의 표식비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돌아가신 분을 연상한다. 이미지를 연상하는 대상없이 무작정 먼 하늘을 보고 혹은 땅을 보고 돌아가신 분을 생각한다면 굳이 산소나 납골당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다.
14년 후 똑 같은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의 맏딸 즉 내 누님 돌아가시고 누님은 화장되었다. 산소에 이미 남편의 묘비가 있었는데 그곳에 누님은 합장돠었다. 물론 기존 비석은 치워지고 하나의 비석이 새로이 설치 되었다. 남자 이름 옆에 여자 이름이 있는 하나의 묘비. 나는 이때도 붙잡고 울, 보고 울, 대상이 없어서 그냥 서서 허공을 보고 울고 말았다.
비석은 죽은 자의 이름을 두는 돌이다. 각각의 봉분이나 유골함이 있는 경우에는 비석은 순전히 이름비(표식비) 역활을 한다. 그러나 봉분이 없고 오직 비석만 있는 경우에는 이름비 역활보다는 상대의 이미지를 떠 올리게 하는 대상역활이 매우 크다. 이때 비석이 없으면 대상이 없는 것과 같다.
부모에게 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 그리고 음복을 했다. 내 마음은 어머니를 보았지만 내 눈은 또 허공을 헤메었다. 산소에 올 때마다 그랬지만 이번에도, 누님과 여동생과 함께 하는 부모님 산소 방문 때도, 그랬다. 누님과 여동생은 남편을 사랑을 하던 아니 하던 형식적이라도 합장을 진정으로 원하는 옛사람이었다. 속으로 삭혔지만 내가 화가 났나 봐? 그것이 입으로 나타났다. 애꿋은 여동생에게 쓸데없는 잔소리을 퍼 부었으니까 말이다. 미안하구나 동생아, 사랑한다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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