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 Ruth Benedict, 요약 정리>, 전중후의 중반부
국화와 칼 / 8 오명을 씻는다
‘이름(名)에 대한 기리’란 자기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이다. 분수에 맞는 위치가 요구하는 예절을 모두 지키고, 고통에 임해서는 태연 자약한 태도를 나타내며, 전문 직업이나 기능에 있어서는 자기의 명성을 옹호하는 일을 포함한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또한 비방이나 모욕을 제거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오명을 씻기 위해서는 복수를 하는 경우도 있고 자살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다. ‘세상에 대한 기리’는 친절을 갚는 의무이며, 이름에 대한 기리는 복수라는 뜻을 주로 내포한다.
서구에서는 감사와 복수라는 전혀 상반된 것으로 나누지만 일본인들은 하나의 덕으로 본다. 훌륭한 사람은 모욕에 대해서도 그가 받은 은혜만큼이나 강하게 느낀다. 어느 쪽도 그것에 보답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위이다. 단지 빚을 갚아 셈을 치르는 것일 뿐이다. 보복은 인간의 덕행이지 악덕이 아니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아시아 대륙 특유의 덕은 아니다. 즉 동양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중국인, 타이 인, 인도 인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중국인은 모욕이나 비방에 대해 그처럼 신경 과민이 되는 것은 ‘소인’, 즉 도덕적으로 보잘것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상대에게 져 주는 것이다.
이름에 대한 기리 속에는 복수 이외에 많은 조용하고 감추어진 행동이 포함된다. 고통이나 위험에 직면하여도 초연하여야 한다. 고통에 져서도 아니되고 아프다고 신음해도 안된다. 굶주림에 굴복해서도 안된다. 또한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할 것을 요구한다. 공장 주인의 아이는 전기열차 세트를 가지고, 소작농의 아이는 수수깡 인형으로 만족하는 것을 비판없이 승인하고 있다. 수입의 차이를 승인하고 그 차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인의 태도는 계급 차별은 그 자체에 있어서는 결코 굴욕적인 것이 아니다고 한다. 기한 내에 채무를 변재하지 못하면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서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전문가로서 이름에 대한 기리는 일본에선 대단히 엄격한 것이지만 고도의 전문 능력으로서 이해하고 있지 않다. 전문가로서 모르더라도 ‘알고 있는 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알고 있는 체하기보다는 정직하게 알지 못한다고 하는 편이 훌륭한 태도이다. 일본에서는 자기 방어라는 것이 대단히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그 면전에서 그가 직업상 과오를 범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예의이며 또한 평범한 사람이 취하는 태도라고 여겨진다.
이 같은 신경과민은 경쟁에 진 경우에 특히 현저하게 나타난다. 패자는 ‘챙피를 당한다’고 느끼고, 분발보다는 의기소침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보통 경쟁자가 있는 경우에 성적이나 작업 능률이 오르는데 반하여, 일본인은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시합에 질 경우 일본인들은 극단적인 행동을 하거나 분해서 울거나 소리지른다. 서양에서는 졌다고 해서 울거나 소리지르는 사람을 경멸한다. 온에 입각하는 윤리에는 경쟁을 허용하는 여지가 아주 적다. 일본의 계층제도에서 모든 관계가 경쟁관계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에든지 나타나는 중개자 제도는 만일 실패하면 치욕을 느끼게 되는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다. 혼담, 구직, 퇴직, 일상적 사무의 결정 등등이다. 일본인은 손님을 맞아들일 때에는 좋은 옷을 갈아입고 일정한 의식으로써 반갑게 맞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계획이 성공이 확실해지기까지 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예절을 요구한다.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하여 일본인은 실패로 인해 치욕을 초래하는 기회를 가능한 피한다.
일본은 예의바름의 모범이다. 실패나 잘못에 대한 치욕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극단적으로 제한하고자 함이다. 이는 성공의 더없는 자극제가 되지만 그것을 필요로 하는 특수한 사태에만 일어난다. 이러한 자극의 이용이 일본이 극동에서 지배적 지위와 미국에 대한 전쟁에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패전 이후, 일본이 취한 행동은 이름에 대한 기리에 대해 가하고 있는 특수한 제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은 분명히 예의바른 국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인은 비방에 대한 그들의 민감성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미국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 욕을 하곤 하기 때문이다.
일본인 화가 마키노 요시오의 어린 시절은 그것에 대한 좋은 예이다. 그는 어릴 때 신뢰하였던 미국 선교사에게 화가가 되고 싶어 미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선교사는 대답했다
“뭐야, 아무런 것도 없이 너가 미국에 가고 싶다고”
그는 절망했다. 조소는 타인의 혼과 마음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그는 선교사로부터 받은 오명을 씻기 위해서 미국에 가서 훌륭한 화가가 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윤리에서 기리란 가신이 그의 주군이 죽을 때까지 충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신이 주군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게 되면 증오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군과 내통하여 주군을 살해하여 복수하곤 한다. 이는 모욕에는 복수, 즉 가신이 자신의 오명을 씻기 위함이다.
메이지 유신 이전의 시대에는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실제 복수가 행해지는 일은 실제로 서구 여러 나라보다 적다. 실패나 모욕에 대한 반응이 공격적이 아닌 방어적으로 점점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인은 여전히 심각하게 치욕을 느끼지만 그 때문에 싸움을 시작하기보다는 자신의 활동을 자제하는 경우가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회초리로 이용하든가, 또는 그것 때문에 완전히 마음을 썩혀 버리고 말든가이다.
일본인은 실패나 비방, 배척 때문에 상처받기 쉽다. 따라서 너무나도 쉽게, 타인을 괴롭히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많다. 그들은 배척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그들 내부로 돌려 스스로를 괴롭힌다. 이때 우울증이나 권태에 빠진다. 일본인은 중요한 사명을 꿈꿀 때 권태를 잊는다. 이러한 일본인 특유의 권태는 과도하게 상처받기 쉬운 국민 공통의 병이다.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행위는 자살이다.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행해지는 훌륭한 행위가 된다. 이름에 대한 기리에서 당연히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훌륭한 행동방식인 것이다. 설날에 빚을 갚지 못해 자살하는 채무자, 어떤 불운한 사건에 책임을 지고 자살하는 관리, 끝내 이루지 못할 연애를 동반자살에 의해 성취하는 연인, 정부의 대중국 정쟁 지연정책에 죽음으로써 항의하는 우국지사, 시험에 낙제한 학생이나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는 병사와 같이 최후의 폭력을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것이다.
일본인의 영원 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쓰여지는 수단은 그때의 사정에 따라 취해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도구일 뿐이다. 사태가 변하면 일본인들은 태도를 일변하여 새로운 진로를 향하여 걸어갈 수 있다.
일본인은 태도의 변경을 서구인처럼 도덕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서양은 ‘주의’에 열중하고 이데올로기 이념에 열중한다. 설령 싸움에 지더라고 여전히 전과 같은 생각을 계속 한다. 전쟁에 패한 유럽인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무리를 지어 지하운동을 계속한다. 일본인은 미국 점령군에 대하여 불복종 운동을 하거나 지하 운동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낡은 주의를 고수하는 도덕적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점령 당초부터 미국인은 혼자서 만원열차를 타고 일본 벽촌을 여행해도 위험을 느끼지 않았으며 관리들에게서 정중한 예의로써 환대를 받았다. 아직까지 한번도 복수가 이루어진 일은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헬로우’ 하며 손을 흔들고, 어머니가 아이 손을 쥐고 미국 군인에게 향하여 손을 흔들어 준다. 패전 후 일본인의 이러한 갑작스런 전향은 미국인으로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수용소의 일본인 포로의 태도 변화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유럽인은 싸우는 경우 자신들이 내세운 주장이 영원히 옳은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가슴 속에 축적된 증오나 격분에 힘을 얻는다. 그래서 미국은 어떠한 강화조약도 수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일본인의 단 한가지 복수와 공격이라는 두드러진 전통적 수단을 선택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인의 또 하나의 다른 방침을 취하는 습관을 고려하지 못했다.
일본인은 그 침략의 근거를 다른 데서 구한다. 그들은 반드시 세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것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대국이 존경을 얻는 것은 무력에 의해서였다고 생각하고 이들 나라에 필적하는 나라가 될 방침을 취하였다. 비상한 노력을 경주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실패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에게는 결국 침략은 명예를 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기리는 항상 침략행위의 행사와 상호 존경관계의 준수를 동시에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패전에 이르러 일본인은 전자에서 후자로 방향을 바꾸었다.
지금도 그들의 목표는 여전히 명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과거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말이다. 이러 경우는 일본의 역사에 여러번 있었다. 일본에서 가장 호전적인 사쓰마 번이 영국과 전쟁에서 지자, 복수 대신에 오히러 영국과의 우호를 청하였다. 그들은 영국과 통상조약을 맺고 다음 해에는 사쓰마에 서양과학과 지식을 가르키는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 하나의 번인 조슈는 일체의 서양 오랑캐를 쫓아내야 한다고 하며 서구제국과 싸웠다. 패하고는 서구 제국이 300만 달러 배상금을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이 성립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적인 현실주의는 일본인의 이름에 대한 기리의 밝은 면이다.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인 배척 법안을 만들게 하고 해군 군축조약을 크나큰 국가적 치욕으로 느끼게 하고, 마침내는 그처럼 불행한 전쟁계획에 내몰리게 한 것은 그 어두운 면이었다. 1945년에 항복의 여러 결과를 호의를 지니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은 그 밝은 면이다. 일본은 변함없이 일본 특유의 방법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기리는 모든 계급에서 공통된 덕이다. 일본인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에서 존경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보답이 된다. 그래서 ‘기리를 모르는 인간’은 아직도 ‘비천한 놈’이 된다. 그는 친구로부터 경멸을 받고 추방된다.
국화와 칼 / 9 인정의 세계
일본의 도덕률처럼 그토록 극단적인 의무의 변제와 철저한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도덕률에서 당연히 개인적인 욕망은 인간의 가슴 속에서 제거해야 할 죄악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고전 불교의 가르침이 그러하다. 그런데, 일본의 도덕률이 그처럼 관대하게 오관의 쾌락을 허용하고 있는 것은 의외로운 느낌을 준다.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죄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이지 않다. 쾌락은 추구되고 존경받는다. 그렇지만 쾌락은 인생의 중대한 사항의 영역을 침법해서는 안된다. 그것에 빠져들어서는 않된다고 하는 생활 양식으로서 도덕률을 설치함으로서 육체적 쾌락을 마치 예술처럼 연마한다. 그리고 나서 쾌락의 맛을 충분히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의무를 위해 희생한다.
일본인 가장 즐기는 조그만한 육체적 쾌락의 하나는 온욕이다. 아무리 가난한 농부라도, 또 아무리 천한 하인일지라도, 부유한 귀족과 조금도 다름없이 매일 저녁 뜨겁게 데운 탕에 몸을 담그는 것이 하나의 일과이다.
수면 또한 일본인이 애호하는 즐거움이다. 그것은 일본인의 가장 완성된 기능의 하나이다. 그들은 어떤 자세로든, 또 도저히 잠들 것 같지 않는 상황 아래에서도 너끈히 잘 잔다. 그들은 또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든다. 사람들은 모두 해가 지면 곧 자버리는 데, 그것이 이튼날을 위해 정력을 저장한다고 하는 처세술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런 계산을 하지 않는다.
먹는 것 또한,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나 잠자는 것과 마찬가지로 즐거움으로서 크게 향략되는 휴식인 동시에, 훈련을 위해 과해지는 수업(식사는 생명유지를 위해 필요하다)이기도 하다. 조반조분(아침 밥 아침 변)에이 일본의 최고의 덕의 하나이다.
로맨틱한 연애 또한 일본인이 함양하는 ‘인정(human feeling)’이다. 성의 향락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까다롭게 말하지 않는다. 아내에 속하는 영역과 성적 향락에 속하는 영역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그 둘을 명확히 구별한다. 다른 한쪽에 남의 눈을 피하여 몰래 발을 들여 놓는 것이 아니라, 두 영역은 모두 다 공공연히 인정된다. 일본인은 연애와 결혼을 동일시하는 이상을 내걸지 않는다. 일본의 남자가 그와 같은 생활 속에서만 갇혀 있다고 품행이 방정하다고 하지 않는다.
만일 여유가 있다면 남자는 정부를 갖는다. 단 중국과 크게 다른 것은 반한 여자를 가정의 일원으로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두 영역을 확실히 구별하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가족적 의무와 인정을 공간적으로 구별한다. 남편이 놀다간 집에서 아내한테 청구서를 보내는 경우가 있는데, 아내는 당연한 일로 여겨 지불을 한다. 아내가 밤에 놀려가는 남편의 옷차림을 도워주는 일도 있다. 그것들은 ‘인정의 세계 속에’ 있는 것으로 ‘효의 세계’에 염증이 나고 지쳐 있는 사람에게 위안을 준다. 도락에 빠져들 위험이 없지 않으나, 이 두 영역은 소속을 달리하고 있다.
창부와 게이샤(무용, 가요, 경묘한 응답을 겸하는)가 있는데 창부 쪽이 돈이 적게 들기 때문에 지갑이 가벼운 사람은 창부에 만족한다. 대개의 남자는 언젠가 한 번은 게이샤나 창부와 논 경험을 가지고 있다. 동성애 또한 전통적인 ‘인정’의 일부분을 이룬다. 일본은 서구인의 비평에 신경을 써서 많은 관습을 법률로 금지하였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관습은 심하게 비난받을 일이 아닌 ‘인정’의 하나로 치부되고 있다. 일본인은 또 자음적 향락에 대하여서도 과히 까다롭게 말하지 않는다. 일본인만큼 이 목적을 위해 여러가지 도구를 고안한 국민은 달리 없다.
술에 취하는 것 또한 용서받을 수 있는 ‘인정’의 하나이다. 음주는 정상적인 인간이 향유하는 마땅한 쾌락이다. 알코올은 하찮은 기분 전환의 한 가지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은 이에 사로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동성애 상습자가 ‘될’ 염려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알코올 중독자가 ‘될’ 우려도 없다고 한다. 완고한 구식 일본인은 음주와 식사를 엄중히 구별한다. 술이 나오는 연회에서 누군가가 밥을 먹기 시작하면, 그것은 그 사람이 이미 술 마시기를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밥을 먹는 그 사람은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두개의 ‘세계’를 확실히 구별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의 즐거움에 전념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인간의 성질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며,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자기의 나쁜 반절과 싸울 필요가 없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만 마음의 창문을 깨끗이 하고, 경우에 따라 알맞는 행위를 하는 것뿐이다. 만일 그것이 ‘더럽혀졌다’ 하더라도, 더러움은 용이하게 제거되며, 인간의 본질인 선이 다시 빛나기 시작한다. 정신과 육체는 대립관계가 아니다. 일본인 철학에서 육은 악이 아니다. 가능한 육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세계는 선과 악의 싸움터가 아니라고 하는 결론으로까지 가져간다.
사실 일본인은 악의 문제를 인생관으로 승인하는 것을 거부해 왔다. 그것은 서로 싸우는 선의 충동과 악의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온화한 영혼’과 거칠은 영혼’으로 그들은 모든 인간의 생애에는 온화해야 할 경우와 거칠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믿는다. 한쪽은 지옥, 다른 한쪽은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 두개의 영혼은 모두 저마다 다른 경우에 필요하며 선이다.
인정은 비난해서는 안 되는 축복이다. 그들은 온을 갚는 일이 개인적인 욕망이나 쾌락을 희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일본인은 의무의 수행을 인생 최고의 임무로 정해 놓고 있다. 일본의 영화나 연극 소설에서는 해피엔드로 끝나는 것은 극히 드물다. 온을 갚거나 인생 최고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주인공은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다. 그와 같은 줄거리야말로 하루 저녁 오락의 클라이맥스다.
국화와 칼 / 10 덕의 딜레마
일본인의 인생관은 그들의 주(충), 고(효), 기리(의리), 진(인), 닌조(인정, human feeling) 등의 표현에 나타나 있는 대로이다. 그들은 인간의 의무 전체가 마치 지도 위의 여러 지역처럼 명확하게 구별된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주의 세계, 고의 세계, 기리의 세계, 진의 세계, 닌조의 세계, 그 밖에 또 많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표현한다. 저마다의 세계는 각각 특유하고 세밀하게 규정된 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은 다른 인간을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판단하지 않고 ‘고를 모른다’든지, ‘기리를 모른다’든지 하는 말로 판단한다. 인간의 행동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지 않고 의무 수행 여부로 판단하는 것이다.
옳다고 여겨지는 행동은 그 행동이 나타나는 세계와 상대적이다. 사람은 ‘고를 위해’ 행동할 때와 ‘단순히 기리를 위해’, 혹은 ‘진의 세계에서’ 행동할 때에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 또한 각각의 세계에서 법도는 그 세계 속의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서 현저히 다른 행동이 요구된다. 주군에 대한 기리는 주군이 부하를 모욕하지 않을 동안에는 최고도의 충성을 요구하지만, 일단 모욕을 받은 뒤에는 모반을 일으켜도 전혀 상관이 없다.
1945년 8월까지 주(충)는 일본 국민에게 최후의 한 사람까지 항전할 것을 요구했다. 천황이 항복을 고함으로서 주의 요구내용이 변경되었다. 그와 동시에 일본인은 그때까지와 정반대로 외래자에게 협력하는 양상을 보였다. 서구인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또한 일본인이 정신적인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도 하나의 행동에서 다른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일본인이 생활을 구분하고 있는 세계 속에는 악의 세계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나쁜 행동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인생을 선의 힘과 악의 힘이 싸우는 무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혼은 본래 선하다. 영혼을 관리하지 않으면 녹슨다. 그렇지만 설사 녹이 슨다 하더라도 그 녹 밑에는 여전히 빛나는 영혼이 있다. 그것을 다시 한 번 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구속력을 가진 두 의무 사이의 충돌이나 갈등이 생기면 한 의무를 선택하고 다른 의무를 무시한다. 여러 부채를 지고 있는 채무자가 어떤 부채를 지불하고 다른 부채를 우선 무시하는 것과 같다. 무시한 부채를 면제 받을 수는 없다. 이때 마지막에 가서는 무시한 세계와 결산한다. 보통 죽음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주제는 일본의 참다운 국민적 서사인 <47 로닌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주(충)와 이름에 대한 기리(명예)가 충돌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1 쇼군 앞에서 영주(아사노)가 상관(기라)으로부터 모욕을 당했다. - 이름(명예)에 대한 기리
2 아사노는 칼을 빼어 기라에 상처를 준다. - 오명을 씻는 의무를 행사.
3 아사노는 할복 자살한다 - 쇼군의 어전에서 칼을 뽑는 것은 주에 반한다. - 무시한 세계와 결산.
4 아사노 영주의 사람들은 해체되고 그중에 남은 아사노의 47 로닌(사무라이)는 모든 희생(부모, 형제, 정의, 일체)을 감수하고 기라 암살 계획을 꾸민다. - 기리를 위하여.
5 기라를 살해한다. – 아사노의 사무라이도 주(아사노)와 같은 의무를 진다 / 오명을 씻기 위하여
6 아사노 47 로닌은 모두 자살한다 - 무시한 세계와 결산.
7. 모든 사람은 그들의 명예를 기린다.
서구인들은 인습에 반기를 들고 수 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행복을 획득하는 것을 강함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반면 일본인은 강자란 개인적인 행복을 도외시하고 의무를 완수하는 인간이다. 만약 의무의 법도를 저버리고 개인적인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약자로 판단한다.
근대 일본인은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한가지 덕목을 들으려 할 때는 마토코(성실)을 선택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서양인이 생각하는 성실의 의미와는 많이 다르다. 일본인의 마토코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본의 도덕률 및 일본 정신에 의하여 지도 상에 그려진 길(road)을 따르려는 열의라는 뜻이다. 성실하다는 것은 <47 로닌 이야기> 속에 유감없이 예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영국인은 성실하지 않다. 혹은 미국인이 성실하지 않다고 일본인이 말 할 때의 그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성실하다’라는 말은 사리를 추구하지 않는 인간을 칭찬할 때도 많이 사용한다. 계층제도의 당연한 결과가 아닌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윤을 얻는 것은 매우 나쁘다고 생각한다. 이윤을 얻기 위하여 빗나간 중개인을 마코토가 없는 인간으로 경멸한다. 마코토는 또 항상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칭찬하는 말로 쓰인다. 싸움을 걸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모욕될 만한 위험에는 절대 접근하지 않는다. 마코토가 있는 사람만이 사람을 위해 그 수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인의 자존(자신을 존중한다, self-respect)는 항상 스스로 주의 깊은 경기자, 묵직한 자아라는 것이다. 그 반대는 경조부박(말과 행동이 가벼움)이다. ‘너는 자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모가 청년에게 끊임없이 올리는 말이다. 예절을 지키고 타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을 가르킨다.
대금업자의 빚을 갚지 못한 자의 ‘나는 자중했어야 했다’라는 말은 그런 궁지에 빠질 경우를 예상해서 보다 조심스러운 행동을 했어야 했다는 뜻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나의 자존심이 이러이러한 것을 요구한다’라는 말은 정직이라는 도덕적 원리가 아닌 그의 가문(신분의 세계)을 고려하면서 그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업가의 자중은 신중 또 신중이고, 복수하고자 하는 자의 ‘자중해서 복수한다’라는 뜻은 면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모든 요소를 고려하여 복수하겠다는 뜻이다. ‘자중에 자중을 거듭한다’는 것은 무한의 조심을 뜻한다. 그것은 결코 경솔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목표를 위하여 필요 이상의 노력도, 이하의 노력도 소비하지 않도록 여러가지 방법과 수단을 강구하는 것을 의미하다.
의도가 좋았다는 이유로 실패의 이유를 주장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남을 비평해도 전혀 상관이 없지만, 비평한다면 상대자의 원한 일체의 결과를 감당할 각오로 덤빈다.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당신의 은혜로 상대가 느끼는 감정도 미리 예견하여야 하기에 조심한다.
일본인은 죄의 중대성보다도 수치(수치심)의 중대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일본인은 치욕감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다. 분명히 정해진 선행의 도표에 따를 수 없는 것, 여러 가지 의무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일어날 수 있는 우연을 예견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치욕이다(하지). 수치는 일본인의 덕의 근본이다. 따라서 그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서 일본인은 사후에 벌을 받는 일이 없다. 이 세상에서 쌓은 공적에 따라 다른 상태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사상을 전혀 알지 못한다. 사후의 상벌,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각자가 자기 행동에 대한 세상의 평판에 마음을 쓴다. 다만 타인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 하는 것을 추측하고 그 판단을 기준으로 하여 자기의 행동방침을 정한다. 모두가 같은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하여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있을 때에는 일본인은 쾌활하고 쉽게 행동한다. 그들은 일본인의 사명을 수행하는 길이라고 느끼는 경우에 게임에 열중할 수 있다. 그들이 가장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은 그들의 덕을 일본 특유의 선행 도표가 그대로 통용되지 않는 외국에 적용하려고 시도한 때이다. 그들은 선의에 의거한 대동아의 사명에 실패했는데, 중국인이나 필리핀 인이 그들에게 취한 태도에 대하여 많은 일본인이 느낀 분노는 거짓없는 감정이다.
일본인이 미국에서 생활할 때 중국인이나 태국인보다 더 많이 곤란을 느낀다. 일본인은 일정한 법도를 지키며 행동하기만 하면 반드시 타인이 자기의 행동을 인정해 줄 것이 틀림없다는 안심감에 의지하여 생활하도록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이런 예절이 일체 무시되는 것을 보고 일본인은 어찌 할 바를 모른다. 화가 났다고 말하고 깜작 놀랐다고도 말한다.
미시다의 자서전 <나의 좁은 섬 나라>에서 그녀는 말했다.
미국유학 시절 교수와 학생이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한층 그녀는 괴로웠다. 내가 이때까지 받아 온 예절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진 환경에 대하여 분노를 느꼈다. 나는 어느 다른 세계에서 온 생물체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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