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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도루’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을 읽고 - 2

Hi Yeon 2019. 8. 3. 11:45

'다카하시 도루’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을 읽고 - 2

 

다카하시 도루는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에서 10 가지의 조선인의 일반적인 특성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했다.

 

  1. 사상의 고착성

 

고착성은 유동성과 반대이다. 다양성과 반대이다. 조선처럼 오랜동안 사상의 한 원리에만 만족하여 다른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민족은 세계 사상사에서 드물다.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힘들지만 정치적으나 외력으로 한번 받아들니면, 그 이후 새로운 사상이 전래되더라도 그것으로 옮겨가는 일은 없다. 한 예로, 오랜 동안 똑 같은 불교가 그랬고, 학문도 그랬다. 학술은 다양한데 오직 정자와 주자만 칭송할 뿐, 다른 학문에 종사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조선인의 의복제도는 현저한 변화가 없었다. 흰 옷의 유래는 매우 오래 되었다. 조선민족의 의복이 흰색인 것은 부여 이래 옛 관습으로서 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열에 아홉은 흰색이다.

 

중국의 국체는 한 시대 가장 덕이 있는 자가 시대의 주권자의 위치에 있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데, 반면 조선은 13백여 년간 주권자의 성씨를 바꾼 사례는 겨우 세 번에 불구하다. 게다가 역성혁명의 때에도 특별히 격렬한 쟁탈의 활극을 벌인 일이 없이, 거의 스스로 힘이 다하여 자연스럽게 쇠망해서 다른 성씨에게 주권을 물려주었다. 조선말기 정치와 법이 부폐하여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체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았던 사정도 중국의 민성과 크게 다르다. 이는 고착성으로 설명된다. 피폐한 정치로 괴로워하면서 감히 새로운 왕가를 세우려 하는 일은 조선인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며 신라, 고려, 조선, 저마다 400년 동안이나 나라의 운명을 이어갔다.

 

조선인이 이러한 특성을 지니게 된 주된 원인은 조선반도를 구성하는 지질적 원인에 찾는다. 조선반도의 지질은 고대에 속하여 안정되고 은은한 상태이다. 무사무위의 상태이다. 연기를 토하는 산도 없고, 불을 뿜는 굴도 없고, 산을 무너뜨리고 땅을 가르고 바다를 요동치게 하는 지진도 없다. 이러한 지반에서 사는 생물과 식물도 새로운 지층에서 생장하는 토지와 달리 안정되고 특별하지 않다. 이와 같은 땅 위에 사는 민족은 지반변화가 많은 땅에 사는 민족에 비해 자연히 고요하고 은은하다. 변화없이 안온함을 지켜 위태로운 데로 나아가지 않는 성정을 기르는 기세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삼아 국민도덕의 근본으로 정하고 사회정신 전부를 이러한 규범에맞추었다. 유교는 이런 고착성을 더 심화시켰다. 유교는 이상을 이상향 요순시대라는 과거에 둔 가르침이다. 과거의 모든 것을 선과 미의 표상으로 생각하니 변화와 경신을 죄악시하게 되었다. 설령 정부로부터 새로운 정책이 시행되었다 하더라도 부폐한 정치 때문에 백성의 고충은 더 나빠지게 되고, 백성은 옛 정책이 차라리 더 낫다는 생각으로 변혁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1. 사상의 종속성

 

사상이 중국에 종속되어 어떤 것도 조선의 독창적인 사상으로 볼 수 없다. 사대주의라고 해도 무방하다. 정치적 중국 종속보다 사상적 종속 정도가 더 심각하다. 신라, 고려, 조선은 독립 국가였고 내정간섭 없이 명목상으로만 조공을 바쳤을 뿐이다. 고려시대 원나라가 고려를 무력으로 정복하였을 때 내정간섭이 심했다. 중국의 속국으로 내정간섭을 받은 때는 고려 시대 원지배의 100년간 뿐이었다.

 

그러나 사상의 종속관계는 그리 짧지 않았다. 중국과 문물을 수입한 이래 조선 고종까지 1500년 이상 시종일관 오로지 중국에 종속되어 있었다. 종교, 철학, 문학, 예술 등 모든 범주를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여 마침내 조선의 독창적인 것은 없어지게 되었다. 설령 독창적인 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 일반적인 것으로 되는 일은 없었다.

 

조선의 문자로는 신라시대부터 이두와 언문이 있었는 데도 불구하고 조선어에서 한문을 걷어내면 대화조차 이루어질 수 없다. 이는 분명히 오랫동안 중국을 모방하여 재래의 조선어를 버리고 사용하지 않은 결과이다. 조선에서 한문을 훈독하지 않고 음독만으로 읽는 것을 독서방법으로 삼은 것도 역시 이와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 세종때 훈민정음을 반포하였으나 사대부는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종 1894년에 이르러 비로소 관보에 언문을 섞어 쓰게 되었다. 이러한 자랑스러운 문자도 조선의 문학사, 사상사에서는 중요한 가치가 없으니, 오로지 한문만 읽을 수 있으면 조선의 문학과 철학은 대체로 유감없이 연구할 수 있다.

 

문학에서도 겨우 조선 중엽에 이르러 비로소 언문 소설이 나타났다. 그러한 소설도 중국소설을 표절 혹은 모방한 것에 불과 했다. 제도 또한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종교에서는 불교와 유교가 들어 왔지만 붕교는 조선 불교가 되지 못했고, 유교는 송나라 유학자의 성리학을 근본으로 연구하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트교도 특별한 발달을 보지 못했다. 조선의 서화는 중국풍에 충실한 모방에 불과하다. 중국의 풍격과 서법에서 벗어나 특별한 경지에 이르고자 한 시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인의 사상의 종속성이 두드러지게 된 주된 이유는 지리적 원인 (반도로서 북으로만 중국과 연결), 정치적 원인(중국의 속국), 자연적 풍광의 원인(아시아 대륙의 연속으로 자연적 풍광이 중국과 비슷), 모방성(남의 것을 제 것으로 완전히 바꾸지 않는 고착성)이라 할 수 있다.

 

  1. 형식주의

 

형식주의는 유교의 특색이다.  4백년 지속된 유교사상으로 교육을 받아 유교사상으로 사회를 통제해온 조선인이 형식주의에 침윤된 것은 당연하다. 조선인 생활의 이상은 관리가 되는 것이고, 그 관리란 품계와 녹봉만을 의미한다. 즉 사무와 전혀 관계가 없다. 관리들은 관청의 사무를 아전이나 서리에게 떠맡기고 돌아보지 않는다. 그 대신 밤낮으로 고심하는 일이란 정쟁에 쓸데없는 말이나 늘어놓아 윗사람을 움직여 더 높은 관리로 승진하는 것이다. 관직의 도장만 주머니에 지니고는 하는 일이란 관직을 얻기위한 온갖 수단을 다 쓰며 생사를 걸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번 관직을 얻으면 대신과 재상으로부터 아래 군수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결코 맡은 사무만 보지 않았다.

 

일본의 한국 고문정치가 쉬웠던 이유는 일본의 고문이 와서 사무의 실권을 쥐어도 자신은 나중에 도장만 찍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관찰사, 군수는 어디에 가더라도 직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조선인이 사무능력을 갖추는 일은 드물고 특히 양반계급의 관리들은 그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전무하였다. 조선행정의 형식주의이다. 더우기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한양주민의 절반이 엉터리 직함을 지녔다. 그러나 조선 관직의 각 부서마다 텅텅 비어 있고 출근하는 자들이란 담을 넘어 들어와 함부로 뛰어노는 부근의 맹랑한 아이들이었다.

 

사회적 도덕이 쇠하면 형식주의가 만연하여 형식에 따라 도덕의 외형을 유지한다. 그래서 형식주의는 세태가 쇠하게 되어도 비교적 그 위세를 떨친다. 도덕의 형식주의와 마찬가지로 또한 이성의 형식주의를 중히 여긴다. 새로운 원리의 연구나 발명에는 뜻을 두지않고 힘을 쓰지 않는다. 기존 원리를 전제로하여 형식논리의 법칙만 따라 변증하여 결론을 얻어 이를 진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조선인의 논의는 정치론이든 도덕론이든 전제는 옛 성현들이 가르친 원리에 국한하고 이를 적용하여 정교하게 삼단논법을 구성한데에 불과하다. 조선의 사상가는 형식논리를 초월한 절대 그 자체를 체득하는 근성이 부족하다. 원래 철학이나 종교에서 형식논리로 이해해야 하는 경우란 매우 저급한 수준에 속한다.이것이 무엇인가를 궁리할 때에는 이미 형식논리의 원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즉 직관을 따르는 것이다.

 

조선의 선사들은 선종과 교종을 모두 배우고 나서 선가의 1 7백칙의 선가의 화두로 원리를 찾아 해결하려고 하였다. 화엄의 법계관에 비추어 분석하고 변증하고자 하는 결과이다. 즉 나름대로 전념하여 스스로의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본원에 몸과 마음을 맡김으로서 매우 간단하게 안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형식주의의 한 예이다.

 

  1. 당파심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모여 사회를 구성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유유상종으로 당파를 만들게 마련이다. 특히 정치사회는 개인의 의견보다도 당파의 의견을 원동력으로 삼는다. 그래도 조선인과 같이 구태의연한 당파심을 끌어안고 자신의 사상과 주장을 펴지는 않는다. 가문, 계급, 신앙, 이익을 근간으로 손쉽게 튼튼한 당파를 만드는 사람들은 조선인 이외에는 세상에서 본 적이 없다.

 

조선에서 당파가 생겨난 원인으로 안정된 시대로 변칙적인 진로가 없었고 오랫동안 같은 경로를 거쳐 경쟁하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반도국의 조선은 관료사회의 규모가 작았다. 조선의 양반은 전반적으로 관리길에서는 약자였다. 약자가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서로 모여 무리를 이루는 방법 밖에 없었다. 중인계급(서리, 아전)도 안정된 단체를 만들어 양반에 맞서 계급의 이익을 확보했다. 평민 또한 그랬다. 상대적으로 매우 단결하기 어려웠지만 일단 어떤 기회가 있어 단결할 수 있게 되면 서로 도워 단체의 힘에 의지하여 약자의 이익을 지키고자 하였다. 조선말기에 외래 종교(그리스트교)와 신흥종교(동학, 천주, 등등)가 맹렬하게 일어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신앙심이라기 보다 이해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이다. 즉 피지배자가 단결하고 힘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1. 문약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는 것은 유교의 가장 큰 결점이다.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했던 중국은 개벽이래 다른 민족과 싸워 이긴 역사를 가지지 못한 나라이다. 전쟁에서는 항상 졌으나 다른 민족을 한족에 동화시키는 능력을 지녔다. 전쟁에서 이겨본 적이 없었다는 것은 중국과 마찬가지이다. 외국의 침입을 많이 받았으나 스스로 다른 나라를 침입한 적이 없다. 지더라도 무력을 쓰지 않았다.

 

문반은 무반을 천하게 여겼다. 양반 가정의 아동교육법에서 보면 장남감도 주지 않았고 아이다운 놀이도 허락지 않았다. 온종일 독서와 습자를 하는 아이만을 착한 아이라고 가르쳤다. 학교 교육에서도 무예나 운동을 가르치지 않았다. 파리한 얼굴에 수척한 몸을 재인과 수재의 전형으로 삼았다. 문약의 특성은 이미 가정과 학교에서 현저하게 양성되었던 것이다.

 

세계 각국의 역사를 보건대 통일된 하나의 국가를 이루기 전에 반드시 봉건제도를 이루었다. 조선에서는 없었다. 이는 세계 역사상 특이한 사례이다. 그 원인으로는 국왕 스스로 제후의 하나로 처리하여 온 점, 그리고 모든 지방관을 문관으로 하는 숭문사상이다. 조선 제일의 학자였던 이율곡이 북방 변경 수비로 병조판서에 임명된 것이 한 예이다. 영조 유학자 한원진의 말이다. ‘우리나라 세가지 우환이 있다. 문관이 무관을 멸시하고, 사대부가 상인을 업신여기며, 세속 사람들이 승려를 미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재앙의 근원이다.’

 

  1. 심미관념의 결핍

 

조선시대의 예술품은 양에서나 질에서나 볼 만한 것이 없다. 조선 전체를 통틀어도 일본의 가장 큰 한 개 현이 소장한 것만 못하다. 그나마 가장 진귀하고 값비싼 물건들은 중국의 것이다. 이렇게 조선처럼 예술품을 보존하는 능력이 부족한 나라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조선시대 이전 조선인과 조선시대의 조선인의 심미관념은 서로 전혀 달랐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조선인은 불교를 독실하게 믿고, 열렬한 종교적 신념을 지니고 있었고, 조선 시대 조선인은 불교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유교의 폐해이다. 유교는 이용후생의 실학이다. 회화와 같은 것은 세상을 버린 한가한 사람이 혼자서 즐기고자 하는 일이고, 건축과 조각의 아름다움이란 종종 사치가 따르므로 배척되었다. 검소함은 유교의 이상적 생활상이다. 예술은 인간생활에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세 번째 원인으로는 관료들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 때문이다. 좋은 것이 있으면 상납을 명하고 그런 것이 서울 대관들에게 마음이 들면 착취에 착취를 더하였고 유명한 특산품이 있는 지방이나 우수한 기술을 지닌 장인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피폐해져서 쇠락되었다. 예술품은 국가, 귀족, 부호의 비호를 받아야 비로소 크게 발달한다. 그러한 작가를 간섭하고, 착취하고, 학대하는 나라에서 예술은 결국 쇠멸할 수 밖에 없다.

 

네 번째 원인은 대다수의 백성들이 너무나 가난했던 데 있다. 왕실과 상류사회는 유교의 실리주의로 인해 심미관념을 결여했고, 관료들은 예술가를 착취했고, 대다수 상민들은 평생 생활에 쫓겨 잠시도 여유가 없었다. 설령 나라에 많은 부유한 평민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후원자가 되어 예술품을 제작될 수 있도록 하지 않았다.

 

부자는 넘쳐나는 재산을 이용하여 권세에 붙어 스스로를 지키고, 가난한 자는 스스로 보존하기 어려웠다. 가장 두려운 자는 관리이고, 그 다음은 토호이며, 그 다음으로는 재산을 약탈하는 도적이다. 시골백성은 손발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일을 해도 겨우 몇 십 섬의 곡식을 거둔다.

 

갑자기 부와 명성을 얻으면 재물을 노리고 약탈하는 우환이 벌써 사방에서 생긴다. 불효자라는 누명을 쉬우거나, 처자의 사사로운 일로 무고하거나, 친족이 아닌 자의 군포를 징발하고, 쓰지 않은 빛을 독촉하거나, 듣기 좋은 말로 빌려가거나, 혹은 가혹한 형벌로 억지로 뺏는다. 시골백성이 한 관이상 돈을 얻으면 함부로 집안에 떳떳이 두지 못하고 다만 남이 알까 두려워 한다. 부지런한 이가 함부로 마음껏 생업을 영위하지 못하고, 이익을 보아도 좇을 수 없으니, 주저하고 주변을 보면서 전전긍긍하니 마치 죄지은 사람인 듯하다. 실로 조선의 시골광경은 일본 촌락에 비해 삭막하고 황량하였다. 조선의 산이 황폐하여 산과 들에 나무나 풀 한포기가 없는 것은 오늘밤 땔감을 걱정하여야 할 정도로 피폐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불쌍하게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유교의 예술 천대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가난한 형편으로 예술품이 생겨날 여지가 전혀 없었다.

 

  1. 공사의 혼동

 

조선의 정치 부폐는 그 핵심에 반드시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모든 정책이 국가의 이익과 백성의 복지를 위해 입안되고 사적인 이익을 돌보지 않는 관리들이 담당한다면, 적어도 그러한 한에서는 공적인 이익을 낳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관리들은 관직에 있으면서 공적인 마음가짐이 없이 오로지 이를 기회삼아 제 한몸과 제 집안의 사적인 이익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국가는 아무리 국고의 수입을 늘려도 대부분은 중간 관리의 뱃속을 채우고 백성을 착취할 새로운 항목만 더해질 뿐이다.

 

실제로 공사를 구분하는 관념이 발달하지 못한 것은 동양인의 보편적인 폐해라고 하겠다.이는 실로 넓은 의미에서 국가와 사회의 발달정도가 낮은 데에서 비롯한다. 일본은 정치적 지식과 사회적 의식의 향상을 위한 훈련을 거친 후 비로소 이런 동양의 오랜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선의 제도와 시정이 폐퇴한 두 번째 원인은 조선사회 조직의 가족주의에서 비롯한다. 조선의 정치제도는 전제군주제도이나 역성혁명을 용인했다. 반면 순순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가족과 가문이다. 사회조직의 가치로 보면 효를 충보다 우위에 두었다. 불충과 불효 모두 조선인에게 가장 심한 악덕이다. 충을 효제보다 우위에 둔다는 것은 조선사회 조직에서 허용될 수 없었다. 효도를 위해서는 불충을 범하지 않는 한까지는 공무를 제한하더라도 사회가 용인하는 관례가 생겼다. 게다가 대가족 제도에 의해 적극적으로 공사를 혼돈했다. 한 사람이 관직에 나가면 나머지 부양가족들의 부양의무를 지게 되므로 더욱 생활비가 늘어 관직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울 수 밖에 없었다. 온갖 힘을 다해 가족들을 밀어주고 끌어주는 것이다. 공자가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난다고 한 격언는 역대군주들이 마음의 위안을 삼을 만했다. 공사를 구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군주에게 복종만 하면 좋다는 논리였다.

 

세 번째 원인은 중국의 제도가 지닌 결함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 중국도 예로부터 조선과 마찬가지로 관리의 봉급이 너무나 적어서 실제 수입은 관리들의 수완으로 징수하여 조달하도록 일임했다. 중국의 관리직이란 일종의 청부업자와 같았다. 지방관은 자신의 주택을 관청으로 삼았고 자신들의 노비들을 관청의 사정으로 부렸다. 조선의 행정제도는 중국을 모방한 것으로 지방관의 봉급은 매우 적어 수령은 사역을 하는 형편이었고 서리나 주졸들은 표면상으로는 월급이 없었다. 당연 세금 일부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군내의 재력은 모두 수령을 위한 술안주와 같은 것으로 수령 집안의 곳간과 같았다. 군수의 주택도 군청 구내에 있어서 실제로 모두 수령의 주거공간이었다. 정자와 누대는 관청에서 세웠으나 수령의 사적인 연희에 사용했고, 관기는 관청에 소속되었으나 수령이 마음대로 점유하였으며, 심지어 수령의 손님 접대나 비서 역활까지 겸하여 위세를 누려도 아무도 개이치 않았다

 

네 번째로 관리의 임기가 짧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조선의 관리만큼 지위가 불안정한 자리는 없을 것이다. 관직의 변천은 마치 주마등과도 같다. 고관대작이라도 결국에는 하루 아침만 화려한 무궁화와 다를 바가 없다. 조선의 군수는 일 년이상 이동하지 않는 군수가 오히러 이상했다. 오늘밤 여기에서 좌판을 벌려도 내일 밤에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으므로 시정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적어도 하나의 정책이 결과를 낳을 때까지는 5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관리라고 해도 일 년이상 임기를 예상할 수 없고, 한 번 자리에서 물러나면 언제 다시 기용된다는 기약도 없다면, 우선 짧은 임기 동안 온 힘을 다해 소득을 늘리려고 할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부의 원천을 배양할 생각이라는 것은 없이 오직 빼앗을 일만 생각하는 것이다.

 

  1. 관용과 위엄

 

조선인은 관용과 위엄이 있다. 관용과 위엄이란 자질구레한 일에 골머리를 앓지 않고, 사소한 일은 그런 일을 하는 이에게 맡기고 감정표현을 격렬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인은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아니라 희노애락의 감정을 모두 갖추어 여유를 지니고 온화한 봄바람과 같은 기상이 있다. 행동거지에 여유가 있고 쫓기지 않으며 걸음걸이도 찬찬하고 위엄이 있어 존경할 만하다. 조선인이 이러한 아름다운 자질을 갖추고 있는 이유는

첫째 조선인의 고유한 성질은 기분이 느긋하고 감정의 격양이 적은 데에서 비롯된다. 둘째로는 극단적으로 예의를 중시하는 점이다. 예의의 요체는 온화함과 화복에 있다. 예의가 몸에 밴 사람은 당연히 태도가 위엄이 있고 기상이 너그럽고 여유롭다.셋째로는 조선시대의 훌륭한 인물로부터 감화를 받은 덕분이다. 이상적인 인물로는 황희, 허조, 정광필, 이원익 등등이다. 이름난 재상의 성격을 고려할 때 공통점은 작은 공에 연연하지 않고, 큰 국면에 달관하여 처신함으로써 국론을 안정시키고, 부지불식간에 군주를 보필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정치의 도의를 실현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조선의 대신들은 적어도 관용과 위엄 있는 용모와 풍채를 지니고 있었고, 평소에도 힘써 그러한 모습을 잃지 않도록 수양했다.

 

  1. 순종

 

조선인만큼 모든 일에 순종하는 민족은 드물 것이다. 국가는 중국에, 상류 사대부는 국왕에, 중인과 상민은 사대부에, 백성은 관청에 복종하였다. 젊은이는 웃어른에게, 제자는 선생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서자는 적자에게, 노비는 주인에게, 천민은 상민에게, 소나 말까지도 사역에 순종했다. 그 원인으로는

 

첫째, 민족 본래의 성질이 그러하다.

둘째, 중국의 속국으로서 보호를 받는 지위에서 순종이 당연시되었다.

셋째, 전제정치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유교의 교의로부터 비롯됐다. 유교에는 원래 천부 인권이나 개인의 인격에 대한 관념 즉 사민평등의 관념은 없었다. 그렇게 불평등한 국가사회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무사히 다스리는 데 주안점을 두고자 했다. 이때 유교가 제 역활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500년동안 평민이 정부의 압박에 대해 감히 반항의 기치를 들었던 사례는 동학당의 봉기 이외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것도 종교박해에 대한 순교정신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인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단호하고 위엄 있는 간단한 법령을 갖추고, 한번 발표하면 변경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법령을 자주 변경하면 그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도록 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1. 낙천성

 

권세를 잃은 대부분의 양반들은 한 상자의 책과 한 벌의 옷 이외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일반 백성들은 가난하여 대부분 끼니를 잇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인은 의식주 부족에서도 생존경쟁에서 아무리 어려워도 노심초사하지 않는 낙천성을 가졌다. 그 원인으로는

 

우선 조선인의 느긋한 성격이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은 특성이다.

둘째 어떤 상황에 처하든 분수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반도국으로 중국을 대국으로 삼아 마치 달팽이가 껍질 속에서 조용히 사는 것과 같다.

셋째 조선인의 생활이 긴장된 듯해도 사실은 여유가 있었다. 과거급제만 하면 가만히 앉아서 생활의 자산을 얻을 수 있었고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더라도 가문의 품격과 문장력과 학문만 있으면 언젠가는 출세할 수 있으므로 오늘날 궁핍은 조금도 걱정할 것이 못 되었다. 집안끼리 상부상조가 있었고 상민들은 굳이 돈을 남겨 부를 쌓고자 하지 않았다. 향촌에는 향악이 있고 친족끼리 서로 구제하는 법이 있었다. 상당한 나이에 들면 향촌의 사람들의 도움에 기대어 한 집안을 이룰 수 있었다.

넷째 조선인들은 가난에 길들어 있었다. 가난을 극복하고자 해도 그럴 수 없었다. 가난은 누구나 겪는 일이고 당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