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하시 도루’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을 읽고 - 1
젊은 날에 내가 만약 ‘다카하시 도루’의 글이 실린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을 읽었다면, 어떠 했을까? 아마도 일본인 학자가 식민지 통치를 합리화하는 왜곡된 글이라고 흥분하면서 반박했으리라. 아니, 그런 책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서 내 눈에 띄이지도 않았으리라.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는 조선의 식민지 시절에 일본 지식인의 관점에서 조선과 조선인을 바라 본 관점이다. 물론 식민지 정책 위한 일본인의 논문이다. 최근 승자의 역사와 패자의 역사 중 어느 것이 더 사건을 왜곡할 확율이 많는가?라는 물음에 ‘패자의 역사가 더 왜곡할 확률이 많다’고 하는 어떤 현자의 글을 읽었다. 그 책을 대하는 내 생각의 틀이 변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 책을 읽고 굳이 글을 쓸까? 그 이유는 이렇다. 나는 친일도 아니고, 일본에 살아 본 적도 없고, 일본인을 잘 아는 사람도 아니다. 일본을 아는 수준은 단지 역사책을 통하여 일반인들이 아는 정도이다. 캐나다에서 나이 들어 이민 생활을 13년 동안 살았다. 한국 밖에서 한국을 보니 한국의 감흥은 새삼 옛적과 많이 다름을 느꼈다. 밖에서 느낀 한반도의 형세는 지도로만 본 감정과 한반도 내에서 살면서 느낀 감정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한국 역사를 다시금 읽어 보기도 했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한국을 보호하면서 방어적인 요새와 같았다. 처음부터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다른 지역과 단절되고, 북으로 인접한 중국만을 잘 다루면 그런대로 큰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었다. 유럽 대륙의 한 국가나 아시아 대륙의 다른 한 국가와 전혀 다른 지리적 조건이었다. 그러나 과학 기술 발달로 말미암아 그러한 반도라는 지리적 장점은 대부분 없어졌다. 한국의 지리적인 조건과 한반도의 주변 형세를 다른 관점으로 보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그 답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손안에 지능 컴퓨터가 있는 오늘날의 글로벌 최첨단 과학 기술 시대에 ‘아시아 대륙에서 태평양으로 돌출된 한반도는 우리 민족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새로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안에서만 배우는 지식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를 수 있다. 마치 분쟁이 생겨 한쪽 편만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다. 밖에서 분쟁 당사자를 모두 보면 분쟁의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이와 같이 외국이라는 밖에서 우리의 역사를 보면, 역사에 대한 생각은 많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진정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가 ‘너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여러가지 답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답은 무릇 개인의 감정이 개입될 소지가 많고 곡해에 빠지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를 안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나를 알고 남을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로 나는 이 책을 곰곰히 읽었다. 물론 자존심 상할 말도 많았고 이치에 맞지 않은 이론도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에서 주장한 다카하시 도루의 연구는 읽어 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기분 나쁘다 할 지라도 상대방이 지적하는 것을 겸허하게 듣고, 그리고 맞는 것은 받아들어서, 상대가 지적하는 나의 약점을 바꾸어 나가고 좋은 점은 적극적으로 보존 강화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한다. 감정에 치우쳐 그런 그것을 무시한다면 잠깐의 감정적 쾌락을 맞볼 수 있지만 큰 손실로 귀결되고 결국에는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패배라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한다고 나를 친일이라는 프레임을 걸 문제는 아니다.
‘친일이다’, ‘친일은 나쁘다’라는 것은 진정 감정의 결과이고 비합리적인 생각일 뿐이다. 이기기 위해서는 감정을 숨기고 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기는 것은 상대 비난이나 멸시가 아닌 상대와 같이 경쟁해 가면서 상대를 넘어선다는 생각 위에서만이 가능하다. 혼자 세계를 정복할 수는 없다. 상대를 안고 내가 진격해야만 가능하다. 세계를 정복한 칭기스칸도 그랬다. 진정 상호 보완과 상호 경쟁은 필요선이다. 과거를 통하여 나를 알고 개선하고 그리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 이때 나를 아는 것이 우선이다. 나를 위한 친일은 정말로 좋은 것이다. 이기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의 요약과 나의 생각을 적는 이유이다.
다카하시 도루 논문이 1921년 <조선인>의 단행본으로 발행되었고, 1927년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에 실렸고, 2010년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로 발간되었다. 다카하시 도루가 쓴 한국 관련 논문은 20편이다. 그의 조선설화집(1910), 조선속담집(1914)의 두 권은 조선의 설화와 속담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한 자료집이다.
다카하시 도루는 1902년 동경제국대학교를 한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에서 교육분야에 종사하였으며 후기에는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 연구와 교육 분야에 심혈을 기울었다. 그는 일본인들의 훌륭한 민족성을 부각하기 위해 조선의 부정적인 민족성을 설명하는데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연구는 식민지 시기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상사 연구에 큰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쳤다. 그의 이론은 경성제국대학에서 서울대학을 거쳐 지식인의 내면으로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그런데 한국학이나 한국철학에서 다카하시 도루를 넘어서는 다른 방법론은 여전히 모색 중이다. 오늘날까지 한국학에 깊은 영향과 흔적을 남기고 있는 셈이 된다.
현재 다카하시 도루는 일부 한국학 전공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채 역사의 뒤안길로 흐릿하게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책은 간행된지 오래되어 구해 보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굳이 다카하시 도루의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부정이나 자기긍정에 빠지지 않고 한국인 스스로 바라보고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 과제를 통하여 자기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를 이해하고 관계를 설정하기 위함이다.
다카하시 도루는 그의 논문을 통하여 조선인의 일반적인 특성을 아래의 10가지로 피력하였다.
1. 사상의 고착성
2. 사상의 종속성
3. 형식주의
4. 심미관념의 결핍
5. 문약성
6. 당파심
7. 공사를 구분하지 못함
8. 관용과 위엄
9. 순종
10. 낙천성
그는 이러한 특성을 규명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면에 걸친 연구와 고찰을 병행하였다.
지리적 고찰
반도의 북은 중국, 남으로 현해탕을 건너 일본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의 세력이 강해지면 조선은 위축되고 중국의 세가 약해지면 평온했다. 남으로는 일본의 견제를 받았다. 중국의 속국으로 역사의 긴세월을 보냈다. 조선이 하나의 독립국가로 평온할 시대란, 반도의 북쪽의 경비가 잘 이루어지고 중국의 힘이 만주에 미처 요동 오랑케의 힘이 위축되고 남으로 일본이 국내 문제로 병선을 띄우지 않는 경우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조선은 남으로 일본의 견제를 받고, 북쪽의 만주에 항복하고, 서쪽 중국의 침입을 받거나 천자라 받들고, 혹은 함경도에 진을 쳐 오랑케를 토벌하였다. 이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한 필연적 결과 였다. 만약 일본 쪽으로 육지가 조금이라도 연결되었더라면 조선은 형세의 큰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인종적 고찰
만주에 살고 있는 우랄알타이 계열의 부여족과 조선반도 중남부에 살았던 한족
<산해경>의 동이에 대한 기록이 있고, ‘군자의 나라, 의관을 갖추고 검을 찿으며 짐승의 고기를 먹었다.’ ‘사람들은 겸손과 양보를 즐기며 싸우지 않는다.’ 라는 대목이 있다.
사회적 고찰
조선사회는 통치자(문무의 사족, 사회 세력자), 피치자(농공상민, 사회 생산자), 천민(노비, 악공, 광대, 상여꾼, 갖바치, 백정, 기생, 무당, 승려, 잡업 종사자)로 구분되는 계급의 사회이고 세력을 지닌 계급은 문무의 사족이다. 조선사회의 단위는 개인이 아닌 가문이다. 세력 경쟁은 가문과 가문의 경쟁이다. 세력을 잡은 자들이 조선인의 생활 이상를 정했다. 즉 그런 규범은 그들의 통치와 세력유지를 위한 도구였다.
역사적 고찰
조선의 역사는 독립국가의 역사로서 가치가 없다. 조선 스스로 자국의 역사를 경시하여불필요한 학문이라고 한다. 조선의 정사는 첫째 부류로 <삼국사기>, <고려사> 둘째 부류로 <삼국유사>, <동국통감>, <동사회강>, <국조보감>을 들 수 있다. 일반인들의 보통서가에는 이들을 볼 수가 없다. 반면 <자치통감강목>은 산간벽촌이라도 서당이 있는 곳이라면 읽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흔했다. <자치통감강목>은 중국 송대의 사서로 중국 역사서이다. 조선의 학동은 조조, 유비의 한나라 같은 중국 역사는 알아도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등등 조선의 역사는 배울 기회가 없었다.
정치적 고찰
조선의 정치제도는 신라통일 이후 약 1천3백 년을 거쳐 형성된 전제군주 제도였다. 전제군주라 해도 중국 속국으로 왕이라 칭할 정도였다. 법전과 제도를 대부분 중국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법령과 제도는 형식적이고, 실제 치자의 양심과 이해의 판단에 따라 적당히 시행됐다. 중국과 다른 점은 봉건 지방제도가 아닌 중앙집권 제도였다는 것과 정치적 이상을 유교에 두었다는 사실이다. 1천3백 년간 겨우 3개의 성씨를 바꾼데 불과하다. 그래서 가장 큰 문제는 내치가 아닌 외교였다. 밖으로 중국, 만주, 일본에 대해 사대(따르다), 수무(편안하게 하고 어루만져 달래다), 교린(이웃과 잘 지내다)이라는 3대 방침에 따른 역사였다. 정치가의 능력도 내치(부국강병)보다 사대교린의 수단을 연마하는 방면에 많이 발달했다.
문학예술의 고찰
삼국시대에서는 독자적인 예술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형식과 사상 모두 중국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의 모방을 극복한 예술의 천재는 나오지 못했다. 예술의 형식에 갇혀 사상을 펼칠 수 없었다. 조선의 문학과 예술은 빈약했다. 일정한 양식을 갖춘 실용적 건축물과 용기 이외의 품격과 운치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다.
철학적 고찰
철학은 순수이성의 학문이고 자유로운 토론의 학문이다. 하나의 원리를 세우면 한 단계의 향상된 원리가 나타난다. 오직 조선에서만은 일찍부터 이러한 일은 없었다. 불교를 국교로 세운 당시 조선인에게는 주자학은 지극히 수용하기 쉬운 철학이었다. 오로지 조선은 한번 주자학을 받든 이래, 다른 학파나 학문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보거나 심지어 이단시하고 배척하기까지 했다. 조선인은 대략 7백년간 주자학의 이기이원론의 학설에만 만족하고 맹종하여 다른 합리적인 철학은 없다고 스스로 믿었다. 조선의 철학은 진보도 발전도 없이 처음부터 화석화 되었다.
종교적 고찰
신라와 고려 두시대 7백년 동안의 불교숭상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어떠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조선적인 불교로서 생겨나지 못한 채로 조선시대에서는 억압을 당했다. 불교는 조선시대에서는 억불정책으로 움츠러들어 경우 명맥을 이었다. 겨우 산속으로 들어가서 고사를 면할 수 밖에 없었다. 순교자 정신을 발휘한 반항한 사람도 없었다. 조선인은 정치만능의 민족이다. 정치권력의 발동에 대해 어떠한 사회적 세력도 저항할 수 없었다.
유교 풍속의 고찰
조선조 정치는 5백년동안 어떻게 전 사회를 유교의 이상에 합치시키는가 하는 데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랜 풍속, 습관을 유지하는 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이로 인하여 각종 문명제도를 이용하고 문명의 이기에 순응하기란 더욱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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