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4년(연산군 10년) 그녀는 강릉 북평 외가에서 신명화와 이씨부인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인선, 호는 사임당이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의 무남독녀가 사임당의 어머니이다. 어머니 이씨는 강릉 최대 명문가 중의 하나인 강릉 최씨 후손이다. 강릉 북평 오죽헌 외가에서 이사온의 무남독녀로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란 이씨 부인은 부군인 신명화와 결혼하여 딸만 다섯을 낳았는데 그 둘째가 바로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은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랐고 자연히 선천적으로 또한 후천적으로 외할아버지의 학문과 어머니(90세 별세)의 예술적인 기질을 물려받았다.사임당은 19세(1522년) 때 이원수와 결혼하여 4남3녀를 두었다. 결혼 후 그녀는 시집이 있는 한양으로 가서 살지 않고 친정인 강릉 오죽헌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냈다. 당연히 사임당의 자녀들도 외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맏아들 이선은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41세에 진사가 되었다. 둘째 매창은 딸이다. 학식과 지혜와 인품이 출중했고 시와 글씨와 그림에 특출했다. 어머니 사임당의 자질을 그대로 이어받아 그 어머니의 그 딸이었다. 율곡 이이는 학자이며 정치가로서 문묘에 배향될 정도로 조선의 성현이었다. 세살에 시를 짓었고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22세에 노씨와 혼인하고 23세때 이황을 만났다. 47세에 이조판서가 되고 48세때 상소(시무육조)를 올려 외침에 대비한 10만병 양성을 주장하였다. 막내 옥산 이우는 네 아들 중 유일하게 어머니의 예술적인 자질을 물려받아 글씨와 그림에 능통했고 거문고 타는 솜씨가 뛰어났다. 초서의 대가이기도 하였다.
사임당의 숨결은 예술로 승화되어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훌륭한 아내였으며 인자하면서 엄했던 어머니였으며, 그리고 모든 여인에게 귀감이 될 여인상이었다. 첨부적인 예술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오늘까지 전해 내려온다. 풀과 벌레, 꽈리와 잠자리 등의 초중도, 그리고 사임당의 글씨가 겨레의 보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48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할 수 있다.
이이 율곡이 48세 때 시무육조를 상소하여 10만병 양성을 주장하였는 데, 1952년 임진왜란 때 둘째 매창과 그의 아들 인과 준이 희생되고 율곡의 부인인 노씨도 적앞에서 순절했다. 그가 임진왜란 8년전에 떠났으니 그의 부인과 누이 매창, 그리고 누이의 두 아들이 왜적에 칼에 희생되었음을 보면 이이는 세상을 미리 보는 성인이 틀림없어 보인다.
네딸의 둘째인 사임당은 고향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결혼 후에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죽헌에서 줄곧 살았다. 그녀를 낳아준 어머니도 무남독녀로서 그곳에서 살면서 딸 사임당과 평생을 보냈다. 사임당의 외할아버지는 강릉의 명문가였고 경제적으로도 풍부했다. 사임당과 그의 어머니는 귀한 딸로서 사랑을 흠벅 받으며 남성 위주 사회에서 남자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아마도 사임당의 어머니와 외가 할아버지는 자유로운 감성과 인성의 소유자였며 그리고 학문과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는 것으로 보인다.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 속의 강릉과 오죽헌도 한목을 했을 것이다.
재능은 유전된다고 하던가. 물론 천부적인 재능도 중요하고 본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아마도 이런 주변의 가족 환경과 자연 환경이 사임당의 재능을 일깨우고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지 않았나 한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에 지배 받는다. 이이 율곡도 평생 어머니 사임당과 함께 지냈다. 그래서 당대 성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13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신동이라 하더라도 어머니 사임당과 외가의 주변 환경이 함께 하지 못했더라면 어려웠는지 모른다. 태어나고 자라는 시기는 주변 환경이 매우 중요함을 알게 된다.
사임당은 48세, 맏아들 이선은 46세, 율곡 이이 49세, 이우 68세, 부군인 이원수는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는 질병을 치료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자연적으로 몸에 이상이 생겨도 고칠 수도 없었다. 그들은 공부하고 사람을 부리는 양반층에 속했으니 영양 측면에서 매우 부족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도 그들이 빨리 떠나는 이유는 육체적 강건을 위한 훈련은 전혀 없고 문인으로서 글만 읽고 사대부로서 인격과 학문 소양에만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정신적 노동을 하는 만큼 육체적 피로가 따른다. 학문 습득에는 특히 더 그렇다. 인격 소양은 큰 인내심이 필요하다. 질병과 몸의 이상은 육체적 자강에 따라 좌우된다. 인생이 짧은 것은 결국은 운동하고 일하고 무술하는 것을 경시하고 오직 문만을 중요시하는 조선시대의 문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인이면 무엇하나 성행이 오래동안 지속됨이 더 중요하다. '강인한 육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있다'는 서구의 사상이 유교 사상에 젖어 있었던 그때에 전해졌다 하더라도 아마도 무시되었거나 아니면 역적으로 몰리는 수난을 받았을 것이다. 문을 중요시하여 생기는 폐단이 오늘까지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다행이 발달된 현대 의료가 그것을 지탱시키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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