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 75명의 수업시간에 만든 작품 가운데 55점 선정( 아래: 선정된 55점 중 5점은 나의 작품)
나의 미술 디자인대학 졸업식에서
유월은 졸업시즌이다. 여기 캐나다는 우리와 다르게 여름이 접어 드는 이때가 졸업시즌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혼돈이 되었다. 추운 겨울철이 졸업과 진학의 추억으로 기억되는 나로서는 유월 중순 막내 고등학교 졸업일을 머리속에 쑤서넣고 또 넣어도 깜빡했었다. 그것은 놓치기 않기 위해서 자주 캘린더를 보면서 혼자 “그렇지” 하면서 머리를 꺼덕이곤 했다.
그러나 졸업식이 나의 일이 되고 보면 별로 의아한 심정없이 초여름 졸업식을 쉽게 받아 들였다. 왜냐하면 나도 주립 대학 미술 디자인 본과 2년을 위한 미술 디자인 예과 1년 과정을무사히 마치고 졸업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월의 둘째 주가 내 졸업식, 그 다음 주 가 막내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다. 무엇이든 나의 일로 다가오면 쉽게 기억하고 또한 그것을 쉽게 받아 들이는 것이 사람인가 보다.
한달 전부터 내 졸업식을 내 나름대로 준비 했다. 준비라고 특별한 것이 아니고 그래도 명세기 대학교 졸업식인데 청바지에 운동화를 싣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큰 아들을 여기서 키워 보니 학교 단계 단계마다 그 졸업식이라는 것이 우리의 방식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여 학생이 파티복으로 차려입고 뚜껑없는 차로 카프레이드도 하고, 강당에 모여 기념행사도 하고, 졸업날에는 그들만의 축제를 즐기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이 들었고 늦은 배움이였지만 최소한 졸업식장에는 젊은 학생과 같은 양복차림으로는 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매일 청바지 면티에 잠바를 걸치는 이민 생활을 오래하다보니 양복 비슷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민하기 전 한국에서 하던 식으로 백화점에 가서 필요한 양복을 살 수는 없었다. 그때는 업무상 양복을 입어야 했고 사면 오래동안 유용하게 입었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양복 한벌 정도 장만하는 것이 그리 큰 고민거리는 아니 되었으나 평소 양복이 필요가 없었던 나의 이민생활에서는 한 두번의 행사를 위해서 옷을 장만한다는 것은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최소한 양복은 걸쳐야 하겠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에 여러가지를 고민을 한 결과 아들과 나는 체격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막내가 파티와 졸업을 위하여 미리 준비한 양복을 입어 보았다. 마치 남의 옷을 주워 입은 것 같이 헐렁하였고 바지는 더더욱 입을 수 가 없을 만큼 컸다. 결국 나는 이때 핑계삼아 양복 한벌을 구입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나머지 필요한 것은 막내의 것을 한번만 빌리는 것으로 하면 될 것 같았다.
몰에가서 양복을 파는 가게에 들려 양복 한벌의 가격을 확인해 보니 최소한 500불 이상이었고 설령 그것을 구입한다 하더라도 바지는 동양 체격에 맞지를 않아 돈을 추가로 들여 고쳐야만 했다. 몇 개월전 막내가 파티복을 저렴하게 구입하는 것을 떠 올리고는 몰에 가서 젊은 애들이 주로 가는 옷가게에 들려 보았다. 바지와 웃도리를 별도로 고르면 가격도 매우 쌌다. 뿐만 아니라 내 체격이 호리하고 날신하다보니 젊은이들이 입는 최신 스타일의 슬림한 양복이 나에게 잘 어울렸다. 평소 그런 스타일을 좋아 하였고 가격도 아주 저렴하여서 구미가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지는 모든 색상에 잘 어울리는 검정색, 웃도리는 약간 짙은 베지색을 미리 마음에 두고 기다리다 할인행사 때 120불에 양복 한 벌을 샀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들이 입었던 흰 와이셔츠와 검정 넥타이 그리고 혁대와 검정 구두를 대신하기로 마음 먹었다. 며칠 전 머리도 짧게 깍았다. 이제 옷만 제대로 걸치면 그 옛날 양복을 입고 휘날리는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드디어 졸업식 아침의 날이 밝았다. 나는 미리 마련해 둔 흰색 와이셔츠, 검정 낵타이, 검정 구두, 그리고 구입한 양복을 걸쳤다. 히프에 짤싹 들러붙고 걸쳐지면서 스림하게 다리 밑으로 흐르는 검정색 바지, 허리선을 타고 짤룩 들어가면서 밑단이 짧게 끊어지는 흰색 와이셔츠, 넉넉하게 벌어진 목칼라 사이로 좁게 늘어진 검정 넥타이, 그리고 전체 길이가 짧으면서 몸에 짤싹 휘어 감는 맛이 나는 짙은 베지색 웃도리, 이것들을 걸치고 보니 짧은 머리에 웃는 내 모습은 대만족이었다.
오전10시 - 12시 리허설, 점심, 그리고 오후 1시- 3시 졸업식의 스케줄에 맞추어 아내와 막내에게 1시 까지 도착하라고 입장권을 전해 주고는 나는 10시 30분 전에 택시를 불러 식장인 Saint Ann School로 출발하였다.
졸업식장은 프랑스 중고등학교 오리토리움이었다. 우리 대학교는다운타운의 200년이 된 옛날 건물을 수리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설이 좁고 20명정도만 수용하는 작디 작은 교실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부대시설 등은 없었다. 오죽했으면 대학교가 고등학교시설을 빌려쓸까하고 생각을 해보면 웃음이 났다.
10시 정도에 도착하니 이미 졸업식장인 오리토리움에 75명의 졸업생이 앉아서 졸업 리허설이 진행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75명이 오리토리움의 1/4정도 차는 것을 보면 400명 수용하는 오리토리움 같았다. 미술 디자인대학이다 보니 대부분 졸업생은 여학생들이었고 나이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다. 그들은 형형색색의 노출된 파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몇몇 남학생들도 보였으나 화려한 여학생들의 무리에 파뭍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나도 그 속에 파뭍여 버렸다. 주름진 얼굴만 없다면 나도 옷차림으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젊은 남학생과 다름없어 보였을 것이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자 리허설 담당 선생이 나와서 학생들을 하나하나 호출해 가면서 객석 중앙 아래 부분부터 채워 앉혔다. 그리고 단상에 어떻게 진입하고 어떻게 걸어가서, 어디서 졸업증서를 받는 지, 그 다음 어떻게 제자리로 돌아 오는 지에 대하여 시범을 보이고, 다시 한번식 예행연습을 시켰다.
어느 듯 리허설이 대충 끝나고 12시가 되었다. 행사 관계자들과 졸업생들은 학교측에서 준비한 식당으로 갔다. 그 곳에 피자와 음로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졸업 까운이 체격 크기에 따라 지급되었다. 우리는 준비된 까운을 걸치고 모자를 쓰고 리허설할 때와 같이 순서대로 줄을 다시 섰다. 드디어 예정된 1시가 조금 지나자 우리는 줄지어 많은 축하객의 박수를 받으며 오라토리움으로 입장하였다. 우리 졸업생들은 객석 중간의 아래 부분을 차지하였고 그 주위를 축하객들이 앉았다.
사회자의 짧은 안내로 여가수가 단상으로 나타났고 모두가 기립함과 동시에 오 캐나다가 울려 퍼졌다. 그 다음 몇몇 축하연주가 이어졌다. 그리고 사회자의 간단한 졸업설명과 대학교장의 축사가 끝나자 객석의 졸업생들이 한줄로 강단으로 다가 갔다. 그리고 한사람씩 강단에 올라 서자 학과장으로 부터 이름과 축하말 그리고 포옹, 다시 반대편 단상으로 가서 교장으로 부터 졸업증서 를 받고 자기 자리로 되돌아 왔다.
75명의 졸업생들이 순서대로 천천히 움직였다. 8개 과이면 한개 과가 10명 남짓, 그리고 보면 교수와 학생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친밀할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학생 대표가 답사를 함으로서 졸업식의 막은 내리고 단상에 있는 교직원들을 선두로 학생들은 다시 축하객의 박수를 받으면서 오리토리움 입구 홀로 퇴장하였다. 이때부터 서로의 기념 사진과 만남 그리고 축하의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어린 학우들과 사진도 찍고 교수들과 그리고 아내와 아들과도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내 학사모를 아내의 머리위에 쒸우므로서 나를 응원하여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나의 대학교 졸업식, 그 때 단순 참석자였던 그 시절, 먼 강단에서 울리던 마이크 소리만 기억나던 초라했던 그 때의 대학교 졸업식이 어럼풋이 떠 올랐다. 현재의 감정과 느낌은 그 때와 확연히 달랐다. 열 두세명의 학생들과 책상을 맞대고 하던 매번 수업들, 매주마다 과제물과 그에 따른 발표와 에세이, 디자인관련 실기 작업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오리토리움 실내에서 졸업까운과 학사모를 쓰고 학교장과 악수를 하면서 축하객의 박수속에 졸업증서를 받는 기분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였다.
사실, 입학 초기에는 처음 접하는 분위기와 엉성한 나의 영어때문에 많이 위축되고 긴장되었었다. 매 수업마다 요구되는 미술 디자인 과제를 충실히 이행하느라 힘이 들었고 이에 따르는 에세이를 쓰느라 고생도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매일 매일 기초 드로잉 연습을 하느라 밥먹는 시간도 잊을 버리 정도였다. 이제는 미술이 무엇인지를 조금 알게 되었고 또한 드로잉과 미술, 그리고 디자인이 나에게 특별한 흥미와 재미를 주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앞으로 내 일과 삶은 창의적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이고 영어실력도 많이 향상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드로잉에 무척 재미를 느껴 매일 그림을 연습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격려해 주신 교수분들 덕분이며 그래서 나는 그 분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끼고 있다.
돌이켜 보면, 입학 초기에는 50대 중반의 이민자로서 대학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웠고 특히 영어가 서툴다 보니 모든것이 맨바닥에 해딩하는 기분이었다. 더 더욱 애들을 키우면서 주일에는 일을 하여야 했으며 아내가 고국에 당분간 머물려야 했던 관계로 직접 가정일을 하면서 해 온 공부이었기에 내 나름대로 의미가 많았다. 오늘 졸업하면서 나는 전학생 중에 네번째로 많은 상금을 받았다. 기대하지도 신청하지도 않았던 작은 상금을 막상 받으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아마 그러한 기분을 즐기기 위해서 한 벌의 신사복을 마련하였나 싶었다.
항상 나를 응원해 주었던 내 첫사랑이면서 내 영원한 사랑인 아내와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이 모든 영광을 돌린다. 그리고 이민 후 많은 어려움과 갈등 속에서 늦었지만 미술 디자인 공부를 만날 수 있었던 우연과 할 수 있었던 행운에 대하여 감사한다. 이 미술 디자인 공부를 근거로 올 가을 부터 시작되는 전공 디자인 공부에 대하여 꿈을 꾸어 본다. 그리고 늦었지만 고국에 돌아가 나만의 방에서 과거와 다른 A Creative Thinker, Writer, and Designer가 될 수 있으리라는 사치스러운 상상도 해 본다. anD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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