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901 이민생활 두 아들 이야기
만 23살 되어가는 큰아들이 있다. 그를 캐나다로 데리고 온지가 벌써 8년이 넘었다. 그러니까 만 15살을 넘어 캐나다 땅을 밟은 것이 된다. 학년으로 따지면 그때가 중학교 3년의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2년 동안 이민 진행사항을 애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결정되지 않은 사항으로 괜히 애들이 동요할 것 같았다. 그리고 미리 애들이 알면 다른 모든 가족들이 저절로 알게 되어 반대와 걱정이 교차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영주권이 나오자 그때 처자식에게 공식적으로 알렸다. 물론 아내는 그 전에 진행사항을 미리 알고 있었고 완강히 반대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공부에 그리 관심이 없었던 큰애는 아버지가 또 일을 벌이네 하는 정도였고 11살인 초등학교 6학년의 둘째는 나이가 어려서인지 ABC도 모르는 채 그저 좋아라 하면서 쾌재를 불렸다.
성격이 과묵하고 말이 없었던 큰애는 캐나다에서 적응하기가 쉽지를 않았다. 그는 항상 반항적이었다. 공부보다 밖에서 돌아다니 것을 더 좋아하였다. 성격도 과묵하고 말이 없었다. 너무 집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좀 막아보자는 생각으로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수영을 시켰다. 유년 도시대표 수영선수로 출전시킬 정도로 몰입을 시켰다.
중학교를 진학하자 한번 운동에 몰입하면 공부와 안녕을 고할 것 같은 걱정이 앞서서 운동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학교는 잘 다니는 데 방과 후 모두들 학원이네 과외네 하고 다니는 데 이놈은 다시 밖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갑자기 태평양을 건너는 비행기에 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아버지 때문에 친구도 고향도 동심도 다 잃어버렸다.
캐나다에 정착하면서 1년 동안 잘 지냈다. 새로운 세상이 과묵하고 반항적인 큰애에게도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정보도 모르고 나 역시 영어를 전혀 못하는 바람에 여기 교육청이 시키는 대로 도시외곽의 고등학교에 등록되었다. 한국가정에서 선호되는 학교는 많은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으나 이곳에서는 도시외곽주민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이어서 한국학생이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아침에 큰애를 등교시키기 위하여 자동차로 데려다 주면 학교정문 앞에는 수십 명의 학생이 수업시작 전에 한 개비라도 더 피워보겠다고 담배를 빨아들이는 데 그곳은 마치 굴뚝과 같았다. 또한 정문 앞 구석구석에는 남녀가 서로 얽혀 있어서 마치 애로드라마를 찍는 촬영장과 같았다.
마침 큰애는 모든 운동을 좋아하든 터라 학교대표 축구선수로 참가도 하였다. 차라리 이런 학교가 나았다. 많은 학생 중 동양애가 하나이기에 관심을 받아 더 좋았고 외곽 고등학교에 다니는 그런 애들이 오히려 더 순진하였다. 서로 큰애를 감싸고 데리고 놀고 집에 초청도 하였다. 한번 친구 집에 가면 1주일을 머무는 경우도 있었다. 선생님도 하나뿐인 동양인이어서 그런가 친한 친구처럼 큰애를 잘 대해 주었다.
그곳에서 1년이 지나자마자 나는 인근 도시에 있는 캐스스테이션을 매입하였다. 정착한지 1년도 채 되기 전에 이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애들 입장에서는 좀 되어 가는데, 좀 알아 가는 데 하는 도중에 그동안 만들었던 친구도 눈익힘도 다 버리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청청병력이었다.
새로운 도시에 정착한 곳은 또한 도시의 외곽이었다. 모든 한국인들은 도심의 학교에 다녔다. 나는 어쩔 수없이 외곽학교에 애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한국학생이 전혀 없는 중학교와 한국학생이 한두 명 보이는 고등학교였다.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작은애는 이사하기 전보다 더 신이 났다. 모두들 자기만을 위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밖으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큰애 입장에서는 이사하기전의 고등학교가 그리웠다.
나는 주유소 경영에 힘이 들다 보니 두 애들을 원하는 대로 보살펴 줄 수가 없었다. 사업인수를 하자마자 아내는 귀국해 버렸다. 일에 지쳐 죽을 것만 같은 지경에서 급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자 상가에 애들을 투입되는 경우도 생겼다. 영어를 전혀 모르는 그때 나이 어린 그들이 생각하였던 것은 바닥 그 차체였을 것이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사업체를 팔려고 매물로 올렸다. 아내가 캐나다로 다시 들어오자마자 사업은 팔렸다. 그때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무슨 소리냐고 아내는 벌떡 뛰면서 내가 들어 갈테니,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책임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내는 다시 고국으로 귀국해버렸다.
내가 애들을 돌보면서 큰애는 자꾸만 비뚤어져 갔다. 캐나다에 오자마자 작은애는 공부와 스케이트선수로 적응해 갔고 큰애는 축구선수로 적응해 나갔다. 두 애의 학교생활과 운동으로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저녁 11시까지 애들을 실어 나르고 밥을 준비해야만 했다. 애들의 아침운동과 오후운동 때문에 일주일 내내 아침저녁으로 나는 그들을 길에서 공원에서 기다렸다.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타도시 혹은 타지방으로 나가서 경기해야 했다. 그때마다 장비와 옷 그리고 음식을 준비하여 데리고 다니면서 혹은 따라다니면서 응원과 격려를 해 주어야 했다. 좋은 집과 좋은 환경에 좋은 운동을 하면 얼마나 좋으리? 하지만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
'수필집 - 겨울배추는 달고 향기롭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0128 내리는 눈송이를 보면 이제는 가슴이 터진다 (0) | 2015.02.03 |
---|---|
140903 우리를 스스로 죽게 하는 것들 (0) | 2014.09.03 |
140717 어머니의 생선조림 (0) | 2014.07.17 |
140511 어머니의 외로움 (0) | 2014.05.11 |
131228 어머니께서 삶의 끈을 놓으시다 (0) | 2013.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