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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 겨울배추는 달고 향기롭다

140511 어머니의 외로움

Hi Yeon 2014. 5. 11. 11:28

140511 어머니의 외로움

 

오랜 이민생활 후 고국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우선 나는 고향집을 방문하였다. 지금은 어머님이 저 세상으로 가셨지만 내가 어릴 적에 살았던 고향집이었다. 아직도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다. 큰형님은 어머님이 평생 살아 오셨던 그 집을 남에게 세를 주기가 마음이 걸렸는지 그대로 두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집은 누렇게 빛만 바래고 있었다. 그렇게 아직도 우리 집은 읍내 입구 길가에 마치 어머님이 살아 계시는 것처럼 떡 버티고 있었다.

 

어머니의 정취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거실 앞 창 너머에 눈길을 주면 동네 큰길이 보였다. 그리고 창가에 다가가면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쉽게 볼 수가 있었다. 안방에서는 뒷마당이 보였다. 집의 앞은 거실이 있었고 뒤는 안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방 창으로 뒷마당을 보면 나무며, 꽃이며, 새들을 쉽게 볼 수가 있었다. 사람 온기가 없는 집이 그렇기야 하겠나마는 이미 내 눈은 그 옛날을 쫒고 있었던 것이다.

 

거실로 가 보았다. 거실 창에 쪼그리고 앉아 계시는 어머니의 허상이 보였다. 어머니은 지나가는 동네 사람을 보고 계시고 있었다. 그리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안방 창 너머 정원이 보였다. 사람이 관리하지 않아 황량하였으나 조용한 자연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어릴 때는 뒷마당의 전경이 훨씬 좋아 보였는데, 이때 나는 거실이 더 좋아 보였다. 거실창 너머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은 항상 그런 안방을 등지고 거실 창에 머리를 대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셨다. 매일 그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보면서 추억에 잠겼는지 어머니는 자주 중얼중얼 하셨다. 내가 서울에서 살 때 가끔 시골로 내려와 어머니을 방문하면 어머니은 얼른 내 손을 잡고 나를 창가로 끌고 가셨다. 그리고 창 너머 지나가는 사람들을 마치 무성영화의 성우와 같이 설명을 곁들이었다. 한번은 내 친구가 지나가고 있었다.

 

"애비야, 애비 친구가 간다. 재는 여편내에게 밥도 못 얻어먹나, 얼굴이 많이 상해 버렸재... 근대, 애비는 밥 잘 먹고 있는가?"

 

하고는 근심어린 눈으로 나를 처다 보았다. 그리고 어떤 젊은이들이 지나가자,

 

"막내야, 저 윗집 아들네가 간다. 벌써 장가갔네. 색시도 이쁘재... 그 댁 어른이 참으로 양반이지. 그럼, 그럼"

 

하시며 혼자 중얼 하시곤 하셨다.

 

어머니는 장손의 며느리였다. 그래서 우리 집은 명절과 한 달에 1번꼴로 돌아오는 제사로 항상 왁자지껄하였다. 또한 평소에도 삼촌들, 사촌형제들로 우리 집은 항상 바빴다. 그리고 아버지는 직접 대가족의 크고 작은 일들을 손수 꾸러 나가셨다. 장손이시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그때부터는 대가족의 구심점은 없어졌다.

산업화로 모두들 도시로 나갔다. 가족단위의 핵가족화가 이루어졌고, 더구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장손인 아버지마저 안 계시다 보니 더 이상 우리 집은 붐빌 일이 없었다.

 

우리 집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그때부터 어머님은 혼자 계셨다. 가끔 도시로 나갔던 삼촌 사촌형제들이 어머님에게 인사차 우리 집에 들렀다. 아마 그것을 기다리시나 아니면 그 법석이었던 그 옛날을 더듬기라도 하시나, 틈만 나시면 창가에 기대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중얼중얼 하셨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어머니는 허리가 아파서 더 이상 앉아 있기도 어려워 하셨다. 머리는 항상 아프시다하시며 띠를 머리에 총총 두르고 계셨다. 아픔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제는 창가에 기대어 오가는 사람들을 볼 힘도 없어졌다. 그래서 항상 누워 계셨다. 그때 TV가 그 역할을 대신 하였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TV를 켜 놓으셨다. 가끔 어머니을 찾아보면 TV소리가 먼저 나를 맞이했다. 나는 TV 소리 사이로 외쳤다.

 

"어머님, TV가 켜져 있네요. 소리가 너무 커서 막내가 오는 소리를 못 들었을 모양이죠."

 

왕왕거리는 TV 소리에도 어머니는 막내 목소리를 얼른 알아듣고는 문지방을 넘어 엉금엉금 기어 나오시며 말을 건네셨다.

 

"애비야, 그것도 없으면 어떻게 지내나? 야야, 온종일 나 혼자 아닌가? TV에서 사람소리라도 있어야 견디지"

 

그 이후로 항상 TV소리가 어머니 곁에 있었다. 수년전부터 창밖을 보고 실제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으로 추억을 더듬었다면, 이제는 그마저도 쉽지를 않아 누워서 영상의 소리를 들으며 사람의 냄새를 취해 보려 함이었다. 그럼에도 가끔씩 창 너머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면 바로 알아 차리셨다. "조카가 왔나?", "질부이구나?" "작은 애가 왔구나?"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픈 것을 잊어버리시고는 어디서 큰 힘이 생겼는지 문지방을 넘어 손살 같이 손님들을 반겼다.

 

그때 밤에 전등불이 어머니 방을 훤히 비추었으니 나는 몰랐다. 그때 밤에 TV가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 모습이 화면에서 줄줄 흘렸으니 나는 몰랐다. 변명이었다. 홀로 계시는 방에 TV가 없었다면 어머님의 외로움과 고독함을 나는 알아 차렸을까? 아마도 그래도 몰랐을 것이다. 왜 어머님이 거실창 너머 익은 얼굴들을 쫒으며 그렇게 창가에 기대고 있었는지 누구도 몰랐다. 캐나다 조용한 도시에서 어느 날, 외로움이라는 놈에 잡혀 내가 헐떡이고 있을 때까지 나는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내가 고국을 떠날 때는 애들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이었다. 캐나다 동부지역으로 이민을 하고 몇 년이 지났다. 우리 가족은 어느 작은 도시에 정착하였고 바로 다운타운에 집을 마련했다. 이제 고국을 떠난 지 10년이 되었다. 애들은 성년이 되었고 진학과 취업으로 독립하여 먼 타주에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어정쩡거리며 지금까지 여기서 이집을 지키며 살고 있다.

 

내 집은 다운타운의 크지 않는 도로를 끼고 있다. 그리고 집 근처에 주립 대학교가 있다. 그래서 내 집 거실 창에서 보면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가 있다. 거실 뒤에 식당 방이 있는 데 잔디와 나무가 있는 정원이 보인다. 집 앞은 사람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도로가 있고, 뒤 쪽은 조용한 시골 맛을 볼 수 있는 정원이 있다.

 

오늘도 나는 일어나자마자 먼저 거실창의 커튼을 연다. 학생 혹은 직장인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기 위함이다. 나는 그들을 물끄러미 보면서 아침 끼니를 시작한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처다 볼 때도 있다. 맥주 한잔으로 외로움을 달랠 때도 나는 거실을 쳐다본다. 이때 이것은 무성영화와 같다. 거실에 난 창을 통하여 지나가는 사람들과 차량이 소리 없이 조용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전축에 가요를 틀던가 아니면 고국 TV방송을 켠다. 이때 무성영화 같은 거실창의 화면은 소리와 함께 살아 움직이면서 나에게로 다가온다.

 

지나가는 사람 뒤로 거실 창에 비치는 나무며 집모양이며 전경은 고국의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러나 이제 너무 자주 보아 눈에 익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가 그 옛날 살았던 고향이라고 여기자고 하면 그냥 그렇게 된다. 여기에다 고국 TV방송의 소리와 화면이 어울려지면 흡사 한국의 어느 작은 도시에 와 있는 것 같다. 이때 나도 그때 그 추억을 더듬는다. 아니, 여기가 내 고향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이 내 얼굴 같지 않다는 생각에 그 환상이 문득 깨어질 때도 있다. 그때는 정원이 보이는 식당방의 창가로 간다.

 

식당 방 창 너머 푸른 잔디에는 새들이 지져 긴다. 나무는 푸르고 햇빛은 따사롭다. 평화롭고 좋다. 그러나 바로 무료해지고 외로워진다. 전축에 피아노 선율을 올려 본다. 정원으로 퍼지는 선율이 감미롭다. 그러나 그것도 곧 심심해진다. 한국 TV를 켜 본다. 사람 소리가 들린다. 이 사람 소리, 저 사람 소리가 들으려 하지 않아도 쉽게 귓속에 박힌다. 고국사람 냄새가 다가오는 것 같다. 그것도 역시 얼마 지나니 다시 시끄등 해진다. 나는 일어선다. 다시 거실 창가로 되돌아간다.

 

창밖에 사람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정원보다 사람들이 보이는 창가가 훨씬 더 좋아진다. 사람들의 생김새가 나와 다르지만 그래도 견딜만하다. 아 그래, 사람 그림자, 이것마저도 없으면 이 적막함이 나를 삼키겠지. 내 속에 있는 외로움이라는 놈이 끊임없이 불쑥 뛰어 나오기 때문이다.

 

애들이 있을 때는 좀 견딜만했다. 애들이 타주로 떠나고 난 뒤, 이 이국에서 이제는 찾아 올 사람도 없고 찾아 갈 사람도 없다. 여기 어디에 가 봐야 그렇게 눈에 박고 박았던 이국의 풍경과 사람들이 이제는 자꾸만 낯설어간다. 다시 한국 TV방송을 켜 본다. 뉴스가 끝나면서 연속극이 시작된다. 우리 사람의 냄새가 조금 나는 것 같다. 고향 향기가 나는 것 같다. 그래, 그래... 좀 살 것 같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살았었던 그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창가로 고국의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외로움이라는 놈이 쉽게 나를 못 살게 굴지는 않겠지.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 지독한 외로움이라는 놈이 어머니를 오랫동안 못 살게 굴었지. 그놈을 밀어내기 위하여 어머님은 혼자 창 너머 동네 사람들의 그림자를 불렸고 TV에서 소리를 훔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