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227 이민, 랜딩, 그리고 사업
이민가방 8개를 들고 우리 4가족은 태평양을 건너 밴쿠버에 도착했다. 나는 긴장하였고 12살, 15살 두 아들과 아내는 긴장하다 못해 심통했다. 내가 독단적으로 가족 모르게 이민을 진행하였고 그 2년 후 영주권이 나오자마자 뜸금없이 갑자기 캐나다로 이민을 가자고 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 설계 사무소, 우리 터전 모두 정리하고 떠났다.
사실 영주권 신청 후 아내에게 여러 번 상의했으나 아내는 '잘 살고 있는 데, 꼭 가야 할 별 이유도 없는 데 왠 이민이야!' 하면서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막상 떠나니 아내와 애들은 좋다 하다가도 막연히 두려웠으리라. 미지의 나라, 나도 잘 모르는 나라, 그런데 가족은 어정쩡한 마음이니, 나는 여행 내내 긴장했고 가족은 불안해했다.
애들과 아내의 눈치, 그리고 "이제 가면 언제 올까?", "이민 가서 제대로 살 수 있을까?" 하는 가슴 속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과 긴장으로 나는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비행기를 탈 때는 그나마 모두들 다소 쾌활하였다.
그러나 공항에서 내리면서 처음으로 보는 사람과 광경에 신기해하였지만 출국심사대에 줄을 서고부터는 모두들 금세 의기소침하게 되었다. 처음 보는 이국인데다가 나를 포함하여 모두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껌벅이는 눈만 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밴쿠버에서 입국수속을 근근이 마치고 다시 우리는 토론토를 향해 날아갔다. 이미 수속을 다 밟았으니 이때부터는 순조로웠다. 토론토에서 다시 50인승 경비행기를 타고 우리가 살 도시로 향했다. 2시간 후 소형 비행기를 타고 작은 공항의 활주로 바닥에 직접 발을 딛고 보니 그야말로 마음은 날아갈 것 같았다. 이때부터는 모두들 소침했던 여행기간의 긴장과 두려움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때가 6월의 시작이었다.
소형 비행기에서 작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활주로에 발을 딛는 그 순간은 다행히 그날은 어찌나 날씨가 청명하고 따뜻하였는지, 크지 않는 조그마한 도시가 얼마나 아늑했는지, 그 동안 우리를 짓누른 긴장감과 두려움을 확 벗어 버리기엔 충분했었다. 애들은 그때서야 웃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였다.
대합실로 나오자 약속된 이주서비스를 해 주는 한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이 지역 주변도시는 캐나다 주의 적극적인 이민정책으로 각국으로부터 서서히 이민이 시작되고 있었고, 내가 랜딩한 이 작은 도시에서도 한인이민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영어를 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돈을 들인 도움이 필요했다. 덕분에 편안하게 아파트를 빌리고 자동차를 사고 애들을 학교에 보냈다. 그 다음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돌아 다녔다.
나는 영어를 할 수가 없으니 잡을 구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한국에서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잡 대신 먹고 사는 방법으로는 직원이 필요 없는 작은 스토아를 구입하고자 했다. 그러다 보면 영어는 되겠지 라고 판단했었다. 그것을 위해 나는 이주공사에 컨설트 비용으로 돈도 톡톡히 지불했다. 이렇게 나는 단순하게 접근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 말 저 말, 그리고 컨설트 회사의 권유에 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작은 스토아 구입이라는 초심을 저 멀리 내 팽개치고 몇 개월 후 좋고 큰 복합상가형의 Gas Stop를 리스로 인수했다. 미리 설정한 작은 스토아 구입 계획은 강하게 몰아대는 조언자와 한인들의 입김에 나도 모르게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초심을 고집하기에는 나는 너무 몰랐고 여기 현지 실정과 이민한인사회의 속성도 무지하였다. 영어를 못 하다 보니 전적으로 한인에게 의지하는 나는 그들이 전해주는 말이 나에게는 전부였다. 그것보다는 고국을 떠난 여기의 한인사회의 성격이 고국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한국이나 여기나 한국 사람은 다 같겠지 했던 것이다.
사업체를 인수하여 경영에 들어가니 이제는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사업체를 운영하다보니 랜딩이후부터 지금까지 누군가가 산채로 껍데기를 벗기지도 않은 채 하나하나 조금씩 잡아먹으려고 소용돌이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나? 하는 기분이었다. 토론토 회계사 사장도 나몰라 했다. 나는 그에게 컨설트 비용으로 만 불이나 지급했는데 말이다.
내가 영어를 못하고 여기 실정을 전혀 모르다 보니 직원들은 심심하면 파업하고 속이고 했다. 그들은 현금도 나 몰래 가져갔다. 사업체는 돌아가고, 직원은 속이고, 나는 혼란에 빠지고, 도움을 요청을 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고, 수면 부족에 밤낮으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사업체 인수로 돈마저 바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부족하면 큰일 난다는 생각에 추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를 한국에 보냈다. 그리고 나는 두 애를 보살피고 밥을 해 먹이면서 사업체를 하루 쉼 없이 정신없이 운영해 갔다.
하루 5시간도 못 미치는 잠이 지속되면서 세월이 흐르자 몸과 마음은 지쳐가고 사업체는 파업과 속임수로 엉망이 되어 갔다. 모두들 내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는 것만 같았다. 사업은 망할 것 같았고 그것보다도 내 자신이 죽을 것만 같았다. 결국에는 나는 어느 누구도 믿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이제는 온전히 살아 숨 쉬는 것만 바랬다. 여기서 쓰러지면 애들은 낙동강 오리 신세가 될 텐데. 결국 죽지 않기 위해서,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급히 사업체를 헐값에 팔기로 결정하였다.
매매는 그럭저럭 이루어졌다. 매매가 되면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것은 또 무엇이야, 매수자는 변호사를 통하여 책과 같이 두꺼운 계약 부칙의 한 곳에 매매 후 6개월을 봉사해야 한다는 영문 문구를 나도 모르게 슬쩍 집어 넣어, 매매 후 나를 개같이 부려 먹었다. 좋은 사업체를 어쩔 수없이 헐값에 넘기는 것도 나에게 커다란 상처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6개월을 일을 해주면서 지켜보는 것은 더 큰 상처가 되었다. 아예 상처가 곪아 터질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약속을 지켰다. 못 본 것도 나의 실책이지만 이런 실패로 인하여 스스로 나에게 벌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6개월 동안 적과의 동침으로 인생 밑바닥의 고통을 맛보면서, 동시에 나 자신과 매수자를 동시에 저주하면서 세상을 배워갔다.
한국에 돈을 마련하겠다 하고 귀국한 아내는 사업체를 처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몇 개월 후 돌아왔다. 어느 날 내가 가족에게 '이러지 말고 한국으로 되돌아가자, 그냥 1년 캐나다 여행했다고 생각하지 뭐' 하였더니 그때는 애들과 아내는 극구 반대했다. 그리고 아내는 '둘 다 여기서 맥없이 있으면 어떡하나' 하고 바로 귀국하여 버렸다.
이제 나는 술을 슬슬 입에 대기 시작하였다. 이민생활이 힘이 들어서 술을 마시고, 사업 실패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술 마시고, 그곳에서 개같이 일을 한 것에 분해서 술을 마시고, 홀로 나 혼자 남아 있다는 생각에 마셨다.
두 아들은 캐나다 적응을 위해 가야 할 곳이 많았다. 학교, 모임, 운동에 데리고 다니고 밥해 먹이고... 처음 해보는 가정생활이 어설펐다. 그런데 나는 술에 취해 있었다. 밖에는 캐나다 겨울의 눈 폭풍은 이리도 몰아치고 있는 데도 여전히 나는 과거를 씹으며 술에 젖어 내 눈은 초점을 잃은 채 껌벅껌벅 거리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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