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질기고 단단한 끈
시내 중심에 나가면 항상 보이는 이가 있다. 그를 본지가 벌써 5년이 다 되 간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잔돈이 쥐어지면 그 앞에 놓인 컵안에 놓고 간다. 그러면 그는 고개를 들고 나를 처다 본다. 그는 내가 누군지를 알아 차리고는 웃는다. 그는 아침에는 다운타운 팀홀튼 출구에서 동냥을 하기도 하고 오후가 되면 Queen Street 상가 앞에서 종이 컵을 앞에 두고 고개를 푹 숙이고 보드지위에 앉아 있기도 한다. 팀 홀튼의 Drive Through에서 음식값을 치른 사람들이 남은 잔돈을 입구에 서 있는 그에게 주기도 하고 혹은 Queen Street 주변 식당에서 나오는 손님들이나 상가에 들린 사람들이 주머니의 잔돈을 인도 바닥에 앉아 있는 그에게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택시을 운전하면서 몇년이란 세월을 지켜 보았지만 그가 있는 장소는 변치 않았다.
그는 모아진 돈으로 커피와 빵을 사서 도로 한편에 쭈거리고 앉아 먹으면서 허기를 채우기도 한다. 가끔 식당에서 그럴 듯한 음식을 Takeout하여서 도로 바닥에 앉아 허기를 채우는 모습도 내 눈에 자주 들어 온다. 멀리서 그를 처다 보면 눈에는 빛이 없고 얼굴에는 기운이 없다. 먹을 거리 돈을 얻기 위해서 그런 표정을 연출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몇몇 비슷한 구걸자들과는 다른 그의 표정을 보면 예사롭지가 않아 보였다.
봄, 여름, 혹은 가을철에 바닥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면 좀 위안이 되었지만 눈이 펄펄 내리거나, 찬비가 내릴 때, 혹은 추운 겨울에 도로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 보면 내 가슴은 겨울 얼음 만큼이나 차가워졌다. 그래서 자주 못 본 척 하고 지나쳐 버리곤 하지만 내 곁눈 마저 돌려 버리지 못 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다운타운에 위치한 Laundromat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페인트 자국으로 얼룩진 옷을 입고 많은 빨래감을 세탁하고 있었다. 내가 페인트 일을 하신냐고 말을 건네니 그는 손수 종이에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주며 필요하다면 연락하라고 시원스럽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그가 내 기억에서 멀어지다가 1년후 쯤인가 다운타운의 길거리에서 배낭을 메고 다니기도 하고, 교회 앞을 서성이기도 하고, 혹은 교인들과 어울려 다니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의 행색이 조금씩 걸인처럼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수퍼스토아에서 그가 손목에 수갑을 달고 경찰에 붙들려 나오는 것을 차창넘어 보았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 나는 Queen Street에서 본격적으로 구걸하며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를 지나칠 때마다 주머니 속의 동전을 컵에 놓았다. 오직 배가 고팠으면 수퍼스토어에서 빵을 훔치다 경찰에게 잡혔을까 하고 생각하니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빙긋이 웃었다. 자주 보다 보니 기억이 났는 지 인사도 하였다. 그래서 ‘나 알어’ 하였더니 그는 ‘알고 말고’ 하면서 이말 저말을 나에게 건넸다. 그 이후로 택시를 몰고 커피를 사 먹을 경우 혹은 그가 앉아 있는 자리를 지나칠 때 자주 동전을 그의 컵에 놓게 되었다. 조금씩 얼굴이 익숙해지자 나는 그에게 단도입적으로 물었다. “페인트 일하다가 왜 여기서 동냥 하느냐?”고 하자 그의 대답인 즉 “이미 부모는 돌아가시고 하나 남은 형이 몇년 전에 병으로 죽었다. 나 혼자 되고 보니 모든 것이 싫어졌다”고 하였다.
상호 교류가 쉬운 아파트 생활, 지식위주의 학교 생활, 그리고 동물적 감성보다 지성과 이성 위주의 가족 생활, 이와 같은 우리의 생활과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는 자연 속에 파뭍힌 개인주의 생활, 부모형제들과 강아지처럼 뒹굴며 보내는 유년기 생활, 그래서 그들에게는 가족이라는 끈이 우리보다 더 단단하고 질길 수가 있으리라.
그 이후로 그를 볼 때마다 조금씩 그의 심정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힘차게 살지 구걸을 해,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잖아, 하루 종일 바보같이 얼음같은 바닥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어’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나도 이민하자마자 나를 의지하면서 사시던 부모를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야 했고 그 충격으로 세상만사가 다 무의미하고 귀찮아져서 매일 술이나 퍼 마셔댔다. 겨우 정신을 차려 보니 내 곁에 가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타국에서 몸고생 마음고생을 다 해 보고 나이테마저 좀 쌓이다 보니 사람이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동기와 그 질긴 생고무줄 같은 인생 끈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부모형제라는 끈을 잡고 질기고 단단하게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 끈 매듭에 내 가족의 끈이 연결되면서 부모형제의 끈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물 건너 저 멀리로 이민생활을 하게 되자 그 끈은 보다 더 질기고 단단하게 되었다. 아마도 부모형제라는 것이 자라는 시절 동안 내 인생을 바쳐주는 가장 중요한 끈이 되었던 것 같았다. 이후 성인이 되어 내 가족이 생기면서 그 가족이 나와 가족을 잡아주는 새로운 끈이 되었고 그리고 그 끈은 이민생활로 더욱 더 질기고 단단하게 되었던 것 같았다.
부모형제라는 끈이 없었더라면 어려울 때마다 끈질기게 반복하여 일어서는 내 힘찬 젊은 시절은 없었을 것이고 또한 지금의 내 가족의 끈이 없었다면 정신없이 앞만 보고 일에만 몰두하거나 혹은 낮선 이국에서 눈 부릅뜨고 힘차게 달려가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가족 없이 혼자 별 일 없이 살아 갈 수가 있다 하더라도 혼자 가야만 하는 이 인생, 어디에서 살던 고국이든 타국이든 너무나도 무의미하고 재미없고 그리고 쓸쓸했으리라.
오늘 아침은 특별히 동전을 두개 준비하여 팀홀튼의 Drive Through에 커피를 주문한다. 동전 한개는 가족이라는 소중한 끈인 내 아내에게 줄 아침 커피 값이고 다른 하나는 내 끈의 소중함을 일 캐워 준 그를 위한 것이다. 주문한 커피를 받고 나서 평소 그가 서 있던 도로 입구에 차를 정차시키고 목을 길게 차창으로 빼내 남은 동전 한개를 그의 종이컵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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