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9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 소설 파친코를 읽고
지금 글을 쓰면서 창너머 바라보면 가을배추가 익어가는 밭이 보이고 그곳에서 동네 아낙네들이 김을 메고 있다. 그 뒤로 작은 개울이 있고 그 너머 5층 아파트 건물이 보인다. 앞 방향으로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농촌풍경이지만 좌우로는 허럼한 도시주택들이 보인다.
낮에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책상에 앉아 창너머 펼쳐지는 전원의 풍경을 눈에담고, 밤에는 농로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과 저 넘어 아파트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본다. 여기는 도시이기도 하고 농촌이기도 하다.
가끔 자동차 소리도 난다. 인적이 없는 자연 속에서만 사는 것보다 사람도 보이고, 자동차도 지나가고, 저 넘어 아파트도 보이는 것이 참으로 좋다. 내가 집에 혼자 있어도 마치 사람 속에 있는 것 같은 감정이 들기 때문이다.
너무 조용하여 창너머 본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비친다. 사람과 자동차와 아파트의 모습이 보인다. 그럼, 내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네 하고 느낀다. 그리고 내가 그속에서 숨을 쉬고 살아 있음을 동시에 느낀다. 어느 날 어느 때 갑자기 외로움이 몰려올 수 있다. 이때만큼은 내 마음에서 외로움이 차지할 틈이 없다.
오늘 경주 내 전원 집에서 보는 가을 하늘은 유난히도 파랗다. 내가 살았던 캐나다 가을은 더 깨끗하고 파랬다. 가을 하늘을 여기서 보나 그곳 내가 살았던 캐나다에서 보나 똑 같은 빛인데, 왜 그때 캐나다에서 보는 마음은 달랐을까? 내 주위 사람이 달라서… … 눈으로 들어오는 광경이 그 옛날 내가 태어났을 때 보았던 모습과 달라서… …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그리고 지금 어디에서 어느 사회의 누구와 함께 사는지”는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미국 교포 작가 <이민진>의 장편소설 <파친코(1, 2권)>를 읽었다.
1910년 경이었다. 가난한 언청이 훈이에게 시집간 양진은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딸 순자를 낳는다. 순자는 다행이 정상적인 아이로 태어 났지만 처녀가 되어 야쿠자 고한수를 만나 임신을 한다. 그러나 순자는 고한수가 기혼자라는 것을 알고는 절망하고 하숙집 손님이었던 이삭과 결혼하고 오사카로 떠난다. 그곳은 이삭의 형인 요셉이 살고 있는 곳이다.
순자는 그곳에서 노아를 낳은 후 둘째로 모자수를 낳는다. 직장을 나가는 요셉이 가족을부양하고 이상주의자인 목사 이삭은 감옥에서 나와 죽는다. 순자는 형님인 경희와 함께 노점상을 하고 설탕과자를 팔면서 어렵게 살아간다.
감수성이 큰 노아는 공부를 잘하여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고, 공부에 관심이 없는 모자수는 파친코 직원으로 시작하여 성공한다. 모자수 아들 솔로몬은 미국유학을 마치고 아버지 파친코 사업을 이어받는다.
노아는 학비 후원자인 고한수가 자기 아버지였고 야쿠자라는 것을 알고는 혼란에 빠져 학업을 그만두고 집을 떠나 숨어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산다. 순자가 노아를 찾아 오자 노아는 다음 날 자살하고 만다. 남은 순자의 가족, 양희, 경희, 모자수, 솔로몬은 그들의 삶을 살아가며, 순자는 고한수와 인연을 완전히 끊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이다. 나이 일흔 셋이 되는 해 순자는 아들 노아의 묘석에 아들의 사진을 묻는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이민자의 아픔과 설움이다. 역사가 우리를 망쳤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간다. 순자가 삶에서 흘리는 눈물은 모든 재일교포들의 애환이다. 한국인으로서 삶도 어렵고 일본인으로서 삶도 어려운 정말 정체성의 혼란 속의 일본에서 이국생활이다.
순자의 악착같은 생활력과 곧은 정신, 그리고 자식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이 소설 전반에 흐른다. 노아는 교육을 통하여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였던 이상주의자이다. 자기 정체성을 알자마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모자수는 현실에 충실하였다. 모자수 아들 솔로몬은 미국유학파이지만 재일 외국인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피하지 않고 일본에서 당당히 그 현실을 안고 산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 왔을 때 그 심정은 이러했다. 빈부차이, 도농의 차이, 이념의 차이… 나는 학업이 나의 굴레를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도시와 서울은 가난한 촌놈이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꿈같다’고 생각되자 나는 혼란에 빠졌다. 결국 나는 허무주의에 빠졌다. 그리고 삶을 내려 놓으려고 하기도 했다. 젊었기에 그랬나? 공부만 한 원칙주의적 이상주의자였기에 그랬나? 나는 나만 아는 극도의 이기주의자였나?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현실을 안고 살든가 아니면 현실을 부수고 대모를 하는 처절한 혁명주의자가 되었어야 했다.
소설에서 정점은 노아의 자살이다. 여기서 작가의도가 극대화되면서 독자는 멍하게 된다.내가 만일 그때 젊은이라면 노아를 이해했으리라. 그러나 나는 이미 삶의 고개를 많이 넘은 사람이다. 소설에서가 아닌 이성적인 판단을 해 보면, 여기서 노아가 좀 더 자기 희생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노아는 그때 그 시대 현실을 안고 그냥 삶을 살아 갔으면 하는 것이다. 너무 안이한 생각일까? 이상을 꿈꾸며 혁명의 삶을 추구했다면 좋았다. 그것은 너무 위험한 발상일까?
어떤 선택을 하든 최소한 스스로를 포기하는 삶보다는 나을 것 같다. 가족이 말할 것이다. “너라도 공부시켰더니 하는 짓이라고는…” 노아에게는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 그 가족들은 못 배웠지만 이국에서 자기 정체성을 따지지 않고 현실을 안고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삶은 그런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역발상적인 의도를 눈치챌 수 있는 것 같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혹은 자살할만큼 혼란스러웠다? 이는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노아를 이렇게 만든 것은 순자의 어머니로서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아들 사랑에서 비롯되었지 않나 한다. 현실을 넘어선 부모의 맹목적인 사랑은 가끔 자식을 파탄으로 이끄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전부야” 하는 맹목적인 자식사랑은 우리 엄마들의 숙명적인 사고이다. 이런 숙명적인 사고는 자식의 영혼을 곪게 하여 미래에 자식에게 나쁜 영향을 크게 끼친다는 것을 이 소설에서도 알 수 있다.
노아가 자살했다. 이는 순자의 업이다. 그것은 젊었을 때의 실수가 아니라 어린 노아에 대한 병적 애착이었다. 이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 우리의 진행형이다.
이민생활에서 지금은 몰라도 아마도 그때는, 차별을 받는 가난하고 힘든 혼돈의 시대에는 답이 없는 삶의 문제였을 것이다. 혼돈이었으나 그래도 정도의 삶은 계속된다. 소설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 어디에서 누구와 살든 지금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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