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03 화사하게 핀 들꽃처럼 지저기는 새처럼
7월 말이다. 참 무덥다. 습기에 고온이니 짜증까지 난다. 아침에 일어나 1시간 몸을 깨운 후 산에 올랐다. 아침 햇살은 벌써 중천이다. 아침 9시가 다 되어가니 말이다. 몸을 깨우는 아침 시간이고, 모자와 마스크를 덮어 썼고, 날씨마저 무더우니… 산행 중에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별로 없다.
입가에 수증기가 차고 덥고 답답했다. 산행 중 잠깐 마스크를 풀고 모자창을 올렸다. 왠 일일까? 평소에 무심코 보았던 들꽃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들꽃이 작은 벌판을 꽉 매웠다. 무슨 꽃일까? 모르겠다. 그런데 갑자기 귀도 열렸는가? 산새 소리는 매우 요란하다. 평소 산행 때 무심코 듣고 외면했던 소리이다. 시끄러울 정도이다. 무심코 나에게 물어 본다.
“들꽃은 왜 이리도 화사하게 피었을까?, 산새는 왜 이리도 지저댈까?”
화사하게 핀 들꽃, 지저기는 산새, 어찌보면 여기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7월말 이 무더위에 들꽃과 산새들은 한창의 때가 아니든가. 꽃은 그들의 종족을 번식하기 위하여 온몸을 화사하게 벌리고 있고, 산새는 짝직기를 하기 위해 저렇게 요란하게 지저기리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롭다.
우리에게 내려오는 전통적인 것들 중 가면이라는 것이 있다. 바로 ‘탈’이다. 웃는 모습이 해탈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그 탈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탈을 쓰고 대중 앞에서 광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탈을 쓰고 공연할까? 한반도는 도망도 어려운 멀리 외 떨어진 대륙의 끝이며 반도의 끝이었다. 씨족부족 농경문화 속 엄격한 봉건사회였다. 양반천민이라는 엄격한 신분세계였다. 막 대놓고 말할 수 없었다. 웃는 탈을 쓰고 울고, 욕하고, 따지고, 애원하고, 소리 지르면서 연극해야 그나마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다. 노예나 다름없는 평민과 천민은 단지 대리 만족으로 그것을 즐겼다.
탈이라도 쓰야 본연의 자아로 조금 돌아갈 수 있다. 탈을 쓰면 위선을 조금이라도 벗을 수 있다. 자연스러운 내 본연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처럼 나도 그렇게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아메리카 원주민(American Indians)은 아주 원시적으로 살았다. 그들에게도 탈이 있다. Mask라고 한다. 그들은 지금도 원시영혼을 나무에 조각한다. 그리고 벽에 걸어둔다. 그들의 Mask를 보노라면 그들의 원시적인 영혼이 그곳에 있슴을 느낀다. 본래 감성으로 살지 못하고 가식으로 사는 현대인은 그것에서 자유롭고 원초적인 영혼을 느낀다. 화사하게 핀 들꽃이 아름답듯, 지저기는 산새 소리가 감미롭듯, 원시적인 영혼은 아름답다. 사람들이 Indian Artist’s Mask를 좋아하고 구매하는 이유이다.
나는 캐나다 예술학교에서 Mask를 조각해 보았다. 한뜸한뜸 정과 끌로 나무를 깍았다. 내가 깎아내는 Mask의 형상에는 본연의 내 혼이 깃들었을까? 가식과 틀이 없는 자유로운 본연의 내 영혼 말이다. 내가 깎은 Mask를 보고 그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아마도 잘 포장되고 가식적이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나는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당연, 내가 깎은 Mask는 아름답지 못했다.
1900년대 초에 활동한 화가 나혜석(1896-1949)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라 한다. 그녀가 젊었을 때는 엄격한 조선시대 유교사회였다. 미술공부를 하면서 그녀는 자아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부장제도를 부정하고 여성의 성적인 금기를 스스로 깨부셨다. 그녀와 남편 모두 금수저 출신였다. 그녀는 남편이 여자를 만났다고 이혼을 했고 스스로 불륜을 저질렸다. 그것을 세상에 당당하게 스스로 고백했다. 여자는 삼종지도(아버지를, 다음으로 남편을, 그 다음으로 자식을 따름), 현모양처, 모성애, 등등 유교적 제도는 여성을 노예로 만들기 위함이라 하면서 평생 항거했다.
세상은 발깍 뒤집혔으나 이슈로만 끝났다. 기성세력은 너무나 거대하고 오만했다. 그녀의 시도는 바위에 계란치기였다. 결국 그녀는 영양실조로 길거리에서 죽었고 무연고자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잊어졌다. 나혜석은 진정 본래 영혼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자신을 원했을 것이다. 활짝 핀 들꽃처럼, 지저기는 산새처럼…
유교로 겆치례가 엄격한 씨족부족 농경사회이었다. 강한 권력이고 경직된 문화였다. 마스크가 아니라도 좀 자신을 가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에 마스크로 나를 좀 가린들 어떠라? 얼씨구나 좋다. 그러나 어떤 때는 마스크를 벗는다. 은밀한 곳에서 몰래 말이다. 들꽃처럼 산새처럼대놓고 벗지 않고.
거추장스러운 옷으로 온몸을 가리고, 단장하고, 갓 쓰고 머리 땋고… 이러쿵 이러쿵, 남녀부동석, 순결, 열녀, 부부유별, 여필종부… 저러쿵 저러쿵, 남자는 이렇게, 여자는 저렇게 해야 하고… 콩 복아대는 소리하며 너무 따지니 나도 차라리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마스크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는 일이야 나에게는 별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코로나 방지에 좋고 내 얼굴을 숨겨서 좋았다. 사실은 숨어서라도 들꽃처럼 산새처럼 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코로나로 어디가나 시도 때도 없이 모두 마스크 차림이다. 산행을 할 때도 그렇고 운동을 할 때도 마스크를 한다. 야외에서 운동을 할 때는 눈만 내놓는다. 우리에게는 이상할 것이 없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 야외활동을 할 때도 일상으로 햇빛가리개 마스크를 하였으니까 말이다. 코로나가 아니라도 진정 얼굴을 가리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캐나다에서 한인 여성들이 햇빛을 가리기 위해서 햇빛가리개 마스크를 하고 야외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현지 사람들이 놀랬다고 했다. 나에게 당연할 수 있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높은 곳에서 나를 다스리고 구속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문화이고 제도이다. 그런데 막상 그 문화와 제도에 젖어 살게 되니 내가 진실 속에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만약 남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재단한다. 마치 영원한 진리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나도 자연의 일부분일진대 왜 그럴까?
산에 오른다. 들꽃이 지천에 제 멋대로 만발이다. 산새는 시도 때도 없이 지저긴다. 한더위 산 속의 전경이다. 자연이다. 아름답다. 그럼, 들꽃처럼 산새처럼 살지 못하는 난 어떤가? 아름답지 못하다. 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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