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기성세대는 불안해 하고 있다
나이 58인 친구 동생인 그는 6개월 전 직장에서 나왔다. 그후 수입없이 집에서 놀며 지냈다. 당연 아내와 다툼이 빈번해졌다.
“집에 머물러서 그랬고, 수입없어 노니 그랬다. 아내의 말투는 항상 삐닥하고 불평이었다. 애들은 다 독립하였다. 내가 고향으로 내려가서 살자고 하여도 아내는 막무가네였다. 직장없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것보다 아내를 마주 보는 것이 더 미칠 지경이다”
그의 말이었다.
어느 날 생활비를 벌고자 그는 쿠팡 회사의 물류센타에서 잠깐 직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며칠 전 그는 목과 어깨가 아프다고 정형외과를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의사의 권유로 뼈주사를 목에 맞았다. 불행하게도 주사 후 바로 그는 경련과 함께 숨이 멈추었고, 그리고 119가 도착했다. 그는 큰 병원의 응급센타로 보내졌다. 응급센타에 도착하여 다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그는 계속 의식이 없었다. 결국 그의 몸은 중환자실로 보내졌다.
사건 경위를 요약하면 이렇다고 하였다.
의사는 목과 팔이 저리다는 환자에게 목에 직접적으로 주사를 놓았고 그 주사가 목 중추신경에 영향을 주어 환자는 경련과 함께 쓰려졌다. 의사는 119를 요청하여 응급처치를 한 후 함께 큰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하였다. 무호흡에 가까운 상태로 긴 시간이 흘렸고, 더구나 응급처치 위치가 기도가 아닌 식도였다. 3일이 지난 지금 환자는 의식이 없고, 설령 깨어난다 하더라도 식물인간이 될 확률이 많다고 한다. 변호사의 말로는 의료사고이고 의료비를 제외한 보상금으로는 수억이 넘는 큰 돈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는 물류센타에서 임시직으로 잠깐 일했고 팔과 목이 저려 정형외과을 찾았고, 그리고 의사 권유로 주사를 맞았다. 그후 지금 그는 의식불명이다.
메스콤은 정치적 혹은 메스콤의 이익을 위한 보도를 주로 한다. 매스콤은 진정 국민을 위하여 일상 개개인의 일을 조사하고 평가하여 발표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변에는 별 볼일 없는 사건 사고가 무수히 많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국가에서 빈번히 사건사고는 일어난다. 자동차 사고, 공사장 안전사고, 테러, 일상의 개개인의 사고, 병고, 등등에서 ‘나’라고 ‘우리’라고 예외가 없다. 인생에서 내일을 알 수 없음을 느낀다.
살아남은 가족에게는 어떨까?
자식들이 독립하고 두 부부가 남아 살아가면서 경제적 형편이 좋던 아니든, 남자가 놀던 아니 놀던, 서로 사랑이라는 매듭으로 의지해 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부부관계였다면, 이런 사고는 부인에게는 정말로 아주 오랫동안 충격이 될 것이다.. 설령 보상금이 평소 접해보지 못했던 큰 금액이라 하더라도 살아남은 가족에게는 영원히 불행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남자라는 것이 아내에게 평소 돈도 못 벌어오고 귀찮은 존재였더라면, 돈을 벌어왔다 하더라도 서로 없어도 좋고 있어도 좋은 사이였더라면, 평소 남자의 역활만 중요했다면, 이런 사고는 여자에게는 당장은 큰 충격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세월이 지나면, 어떤 여자에게는, 귀찮은 존재는 없어지고 남자가 남겨놓은 재산과 충분한 보상금, 그리고 연금이 여자에게 충분히 보장되는 변화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아내가 그를 잘 다독거려 주었다면 물류센타에 육체적 노동까지는 하지 않았을까?
아내와 대화가 많았다면 의사 권유에 무작정 자신을 맡겼을까?
고향으로 내려와서 살았다면 그런 사고는 빗껴 나갔을까?
절에서 마음을 내려 놓았다면 피할 수 있었을까?
평소 대충 살았더라면 괜찮았을까?
“이랬더라면?” 라고 상상하는 것은 어려석다. 또한 의도된 일이 아닌 예기치 못한 사고의 결과인데 혹은 흔치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흑백 논리로 살아남은 자를 극명한 이기심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화자는 한국 사회가 자꾸만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 뿐이다.
유교적인 가부장제도가 깨어지면서 과거 남자의 역활과 권위 중에서 역활만 중시되는 사회로 변하고 있는데, 우리의 기성세대는 지금도 혼돈의 가부장 제도에서 헤메고 있다. 부부관계에서 혼돈이 심하다. 또한 부모와 자식관계에서도 역시 그렇다. 많은 경우에 부모의 건강과 존재보다 부모의 재산이 중요시 된다. 남편의 역활과 아버지의 역활만이 따져지는 사회인 것이다. 물론 남편 혹은 아버지 본인 스스로 부정할 것이다. 그러면서 매우 불안해 한다. 상대편은 즐기는 경향이다.
나보다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지금보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 기성세대는 스스로 달리고 있다. 달리지 않으면 왠지 스스로 불안하다. 눈치가 보인다. 그리고 달릴 수 없을 때는 혼자가 되고 헤멜 것만 같다. 그동안 이루어 놓았던 것은 자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이, 텅빈 가슴을 안고 짧은 숨을 내 쉬면서 말없이 아픈 다리로 터덜터덜 혼자 걸어 갈 것만 같다. 이런 경우 부부와의 관계일 수 있고 가족과의 관계일 수도 있다. 지금 현재 나를 위하고, 현재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음을 찾는 것은 우리 기성세대에게 그렇게 어려울까?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나기가 어려운 상상일 수 있다. 나는 주변의 삶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내 눈에는 그렇게 비치는 것이 내 편협성 때문일까? 너무 그런 방향으로만 보고 있을까? 너무 민감한 반응일까? 나의 착각이라면 다행이다. 다만, 나는 한국사회가 자꾸만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현실에서 느낀다. 아니 사실 그러한 방향으로 빠르게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교적 가부장제도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어떨지? 아무래도 한국보다는 덜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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