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 가로수 아래에서, 볼펜 스케치
계룡시 중심에 계룡시청이 옛 궁궐처럼 자리 잡고 그 앞으로는 시가지가 뻗어 나간다. 그 첫자리에 내 작은 사무실이 있다. 이곳 내 사무실에 있으면 계룡시청이 언덕 위로 보이고 앞과 옆으로 줄지어 선 가로수가 보인다. 전원도시 계룡시답게 이들 가로수가 이체롭다. 이팝나무이다. 오늘도 하얀 이팝나무 꽃을 하루 종일 감상하며 보낸다.
하얀 꽃으로 덮인 이팝나무 가로수 아래를 거닐면 봄날의 들뜬 기분이 이상하게도 가라앉는다. 왜냐하면 활짝 핀 이팝나무 흰 꽃을 보고 또 보아도 그 맛은 언제나 밋밋하고 싱겁기 때문이다. 매혹적인 분홍빛도 아니고 아름다운 노랑빛도 아니다. 하얀색이라면 벚꽃같이 푸른 잎이 없는 알몸이면 좋았으리. 옷을 입으려면 차라리 검은 잎이면 더 좋았다. 아니 그 흔한 짙붉은 빛도 괜찮으리. 그러나 초록 잎 사이로 쌀밥을 뿌려 놓은 듯 꽃이 피었으니 보는 이에게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 희디 흰 꽃이 흰 밥알처럼 달랑달랑 가지에 붙어 있건만 누구 하나 눈여겨 쳐다보지 않는다. 양념하지 않은 무침이나 찌게 같다. 마치 백김치 같다. 여인으로 치면 초록 무명 저고리에 화장하지 않은 하얀 얼굴이다.
하루 종일 너는 내 앞에 서 있다. 매일매일 출근하면서, 퇴근하면서, 그리고 일하면서도 나는 너를 보고 또 본다. 그래도 별 감흥이 없다. 어느 누구도 너의 이름을 모른다. 산들산들하는 봄바람에 너는 도로에 그냥 그렇게 줄지어 서서 이렇게도 한들한들하고 있다. 어느 날, 나는 '너는 누구인가?' 하고 두드려 보았다. '하얀 꽃을 품은 이팝나무', 너는 이렇게도 아름다운 봄날에 그렇게도 흰꽃을 피우면서 길가에 묵묵히 서 있다. 쳐다보는 이 없어도 그렇게 희디 흰색을 빛내며 한 달을 보내고서야 꽃봉오리를 털어낸다. 어느 날이었다. 보는 내가 왠지 서글퍼졌다.
5월이 시작되면 이팝나무 꽃이 피기 시작한다. 꽃송이는 마치 하얀 쌀밥을 가지에 뿌려 놓은 듯하다. 꽃이 필 무렵 아직 보리는 피지 않고 지난해의 양식은 거의 떨어져 버린 '보릿고개'이다. 주린 배를 잡고 농사일을 하면서 풍요로운 가을을 손꼽아 기다릴 때이다. 이팝나무는 키가 20-30m 정도 자라는 큰 나무이며, 5월 중순 초록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꽃을 가지마다 소복소복 뒤집어쓴다. 멀리서 보면 흰쌀밥이 연상될 정도로 너무 닮아 있다. 농부는 이 흰꽃을 보고는 배을 채울 수 있는 가을을 기다린다.
전국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가 일곱 그루나 된다. 습기가 많은 것을 좋아하는 이팝나무는 꽃이 많이 피고 오래 가면 '물이 풍부하다'는 뜻이다. 이와 같을 경우는 풍년이 들고 반대의 경우에는 흉년이 든다. 농부들은 이 나무를 다가올 기후를 예측하는 지표로 삼았다. 또한 모내기 철에 꽃이 피기 때문에 이팝나무 꽃이 피는 것을 보고 모내기를 챙겼다.
이팝나무는 우리나라와 그리고 일본 중국 일부에서 자라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나무를 처음 본 서양인들은 쌀밥을 알지 못하니 눈이 내린 나무로 보아 '눈꽃나무(Snow Flower)'라 했다. 이팝은 '이밥(쌀밥의 옛말)'에서 유래됐다는 설과 '입하(여름의 시작)'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Andrew
'이야기와 스케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수가 세 노파 (0) | 2017.07.20 |
---|---|
문화재 탐방 - 계룡 사계 고택 (0) | 2017.07.06 |
문화재 탐방과 스케치-숭덕사(덕성서원), 세종시 (0) | 2017.05.21 |
문화재 탐방과 스케치-이심원 충신 정려현판, 계룡시 (0) | 2017.05.18 |
형제의 웃음은 순수하고 영원하다 (0) | 2017.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