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무엇인가, DEATH.' 도서관 서고에서 서성이다 책 한 권이 눈에 번쩍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져 앉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읽기를 멈추다 간혹 깊은 뜻을 되새기도 하였다. 어느 듯 집에 되돌아가야 할 때가 되어 책갈피를 해 두었다. 다음 날 버스에서 읽고, 지하철에서 읽고, 일하다가도 짬짬이 읽고,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 글를 넘길 때 '나'가 열리며 인생에 대한 평소의 의문과 궁금증이 해소되는 듯하였다.
어릴 적부터 나는 항상 비실비실했다.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자주 보약을 지어 다려 주셨다. 초등시절부터 객지생활을 하였다. 삭월셋방 문앞에서 저녁 햇살의 온기를 받으며 핏기없는 하얀 얼굴로 벽에 기대어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던 기억이 많다. 고교 시절에는 얼음같은 골방에 쳐박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마음을 쥐박으며 공부하는 것 밖에 없었다. 상경하여 대학시절에는 왜 그리 세상이 나만을 힘드게 하는가 하며 한탄하며 술독에 빠졌다. 그리고 간혹 술김에 야밤 도로 바닥에 누워 버렸다.
군 생활에서는 다들 잘도 풀리고 견디는 데 어찌 나는 힘든 데만 골라 다니고 그것도 모자라 죽고 싶을 정도로 힘에 겨워했다. 유신이 끝나는 시점에 남북의 철조망 사이로 정적이 머문 때가 있었다. 그때 '오늘 밤이면 모두가 죽는다'는 죽음의 그림자가 모든 장병들을 덮쳤고, 우리는 총을 뒤로 메고 무심으로 담배를 피웠다. 죽음이 바로 다가올 때의 마음이 이렇다는 것을 느낄 때였다. 철조망에서 자살이나 탈영으로 죽은 병사의 시체를 거두어 꿰메고 씻기면서 '왜 그들은 죽어야 하나?' 하고 의문을 품은 채 아무도 반겨주지 않은 주검 앞에 촛불을 켰다. 나도 한번 총을 메고 둥근 달이 걸쳐져 있는 철조망에 서 보았다. 보름달 아래 비친 산야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초라했다. 나도 이대로 방아쇠를 당기면 어떨까 하는 찰라가 스쳐갔다.
대학 졸업 후 건설 현장에서 근무할 때였다. 죽을 병이 걸렸다는 의사 진단을 무시하고 '인생이 별 것인가, 가면 그만이지' 하고는 현장에서 자포자기한 채 사라졌다. 고향에서 동해안을 바라보며 병마와 싸우던 그때, 짙푸른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나를 출렁이는 파도에 던졌다. 오히려 인생이 참으로 담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직장을 얻고 앞만 보고 달렸다. 그때마다 고통스려워하는 내 육체는 나를 자주 위험의 순간으로 밀어 넣었다. 술이 취한 채 고속도로를 달리기도 하였다. 고향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뵈올 때면 '왜 사람들은 이렇게 해야 하나'하며 인생에 대한 심한 회의를 느끼며 눈물을 솟아 내기도 했다.
가족을 데리고 이민을 갔다. 뭔가 되는 것이 없었다. 약한 내 몸도 한 몫 했다. 죽을 것만 같았다. 살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어떤 때는 강다리에 메달려 뛰어 내리면 되지 하는 유혹을 맛보았다. 도데체 '죽음의 순간은 어떨까?'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술만 퍼마시며 며칠동안 '나'가 없는 '시체'가 되어본 적도 많았다. 한편으로는 내 자신을 지키고자 땀을 흘리며 육체를 단련하였다. 저녁에는 고통스러운 육체의 피곤함을 안고 글로 그림으로 인생을 새겼다.
도데체 나와 내 육체는 무엇이고 무슨 관계란 말인가? 내 몸이 고기 덩어리이라면 나는 도데체 무엇이란 말인가? 왜 그리 내 몸은 나를 괴롭히는가? 그럴 바야 형편없는 내 몸을 과연 지닐 가치가 있는가? 너가 없어지면 나는 있는가? 없는가?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나라는 것은 너에 의해 존재하고 너에 의해 좌우되었으나 나는 결국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식으로 너를 다루고 조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내가 있고 너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너를 바꿀 마음은 있어도 나를 바꿀 마음은 없다. 나는 너 때문에 많이 방황하고 철이 들었지만 그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주체이고 너는 객체이다. 더 이상 너에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너를 관여치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와 나는 한 몸이 아닌가. 너가 없어지면 나 역시 없어진다.
모르지, 대부분은 내가 영원하다고 한다. 그래서 영원이 있거나 영혼으로 존재한다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 신념은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의심을 한다는 것이다. 여러 순간 죽음의 문턱에서 알게 된 것 하나는 설령 죽고 난 뒤에 나가 있다고 쳐도 그 나가 현재의 나가 아니면 나는 없다는 것이다. 숨쉬는 이때만 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도 작가 Shelly Kagan는 그렇게 말한다.
EATH(번역 제목: 죽음은 무엇인가), Yale University 철학 교수, Shelly Kagan (미국 대표 현대 철학자, 박사) 지음, Open Yale Courses (OYC, 열린예일강좌, 웹사이트 http://oyc.yale.edu,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의 내용이기도 하다. 1995년부터 예일대에서 진행해 온 교양철학 정규과정 DEATH를 새롭게 구성한것이다.
영혼과 영원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보편적인 반응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 스스로 만든 보편적인 신념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놀라운 기계이다. 사랑하고 꿈꾸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기계이다. 계획을 세우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그런 기계이다.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죽음은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신비가 아니다. 이를 거대한 미스터리, 너무 두려운 나머지 감히 마주할 수 없는 압도적이고 위협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사람이 죽으면 그대로 영원하다는 영생 그 자체는 오히려 저주가 된다. 영원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생은 부적적한 반응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이 놀라운 행운도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때 삶은 무슨 일이 벌어지건 어떤 상황에 처하건 끝까지 무조건 이를 악물고 지켜야 할 의무도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가 있다. 삶과 죽음에 관한 다양한 사실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해보고 나아가 두려움과 환상에서 벗어나 죽음과 직접 대면해보기를 저자는 권한다.
나는 이 책을 조금이라도 읽찍 읽었더라면 삶에 대한 애착을 더 갖고 더 나 답게 살았지 않나 한다. 이제는 영생이나 영혼이 있고 없고는 나에게는 중요치 않다. 영생이나 영혼이 있다면 그것이 현재 나가 아닌데 대체 지금 그것이 현제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육체가 죽을 때 나 역시 없어진다면 미래의 나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제라도 더 나를 위하여 오늘의 행복을 주워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육체인 '너'에게 의존하지 않고, 더 '너'를 버리고, 더 '나'를 낮추어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만 너가 없어질 때 나는 두려움도, 신비도, 미련도 없을 것이다.
결국, 영생이나 영혼을 생각하거나 내가 너의 죽음에 너무 의존한다면, 나는 무척이나 무거워진다. 그래서 죽을 때는 감당할 수 없이 큰 두려움과 미련이 생긴다. 오늘만을 생각하고 나를 깃털보다 더 무척이나 가볍게 한다면, 무심으로 왔던 나는 무심으로 바람같이 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Andrew. 2016. 07. 11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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