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바람 Yeon 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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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며 창조하다

감상문-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영화 "The Road Home (집으로 가는 길)"을 보고

Hi Yeon 2014. 11. 8. 01:12

The Road Home (집으로 가는 길, 1999)를 감상했다. 중국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내용은 부부의 순수한 사랑과 죽음이다. 첫 장면을 보자마자 나는 영화에 파뭍혀 버렸다. 중간 중간 가끔 눈물도 찡 나왔다. 순수한 기다림, 사랑, 그리고 남편을 먼저 보내는 노모의 애뜻함이 잘 보인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매우 서정적이다. 배경음악은 보는 이의 심금을 뜯는다. 영화 후반부에는 지금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긴 상여 행렬이 보인다. 이 장면에서 나는 마치 내 것인 양 더 깊이 몰입하게 된다.

 

내가 군복무를 할 때였다. 최전방 휴전선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에게는 휴가는 매우 드물었다. 정기휴가라고 해봐야 군복부 전체기간에 3번 정도이다. 첫휴가는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가 되고 난 다음 조금 안정이 되면 보통 돌아온다. 그 시절에 우리는 사는 것이 어려웠고 그래서 휴가오는 조카나 형제들에게 노자돈을 두번이상 주기란 힘이 들었다. 그것이 부담스러워 나는 첫휴가만 다녀오고 그 다음부터는 휴가를 가지 않았다.

 

최전방에서 고생하다 보면 왜 휴가를 가고 싶지를 않았겠는가. 그러나 부모 형제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 보아 자제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본의 아니게 포상휴가를 가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을 거처 남쪽 고향까지 한번에 내려갔다. 먼저 도시에 사시는 큰형님댁에 들렸다. 이때 어쩐지 집은 설령했고 아무도 없었다. 기다려도 마찬가지 였다. 답답한 차 이웃에게 물어보니 고향에서 부초상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자마자 나는 설마 다른 사람이겠지 하고 위안을 하면서도 몸은 시외터미날로 날았다.

 

시외버스터미날에서 고향 읍내 중심지에 내리기까지 2시간이라는 시간은 한마디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우리집은 터미날에서 100여 미터의 떨어진 읍내 중심에 있다. 차가 터미날에 도착도 하기 전에 나는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커버길을 달려서 돌아서는 데 나는 갑자기 그자리에 서 버렸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저 멀리 우리집 앞에 하얀 상가천막이 보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어떻게 집에까지 갔는 지 지금도 기억에 없다. 

 

이제 10일장의 마지막 이틀이 남았다. 아마도 아버님이 막내인 나를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아버님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이미 모든 절차가 끝나고 상여가 떠날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다음 날 나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시상주복을 입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그리고 곡을 하면서 형님과 함께 꽃상여 뒤를 따랐다. 선두는 수십가지의 깃발이 먼저하고, 다음으로 수백송이 생화로 장식된 상여가 뒤를 이었다. 그 다음으로 상주와 가족, 지인, 기타 문상객들이 따랐으며 마지막으로 다시 여러가지의 깃발이 따랐다.

 

상여는 30명 조금 안되는 장정들이 메었는 것으로 기억된다. 이 행열이 작은 읍내를 빙빙 돌아 나갈 때 모든 읍민들이 나와서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읍네를  빠져나가는 데 그 행렬의 길이는 100미터는 족히 되는 것 같았다. 따사로운 봄날이었다. 바람에 흔들어 대는 들꽃의 언덕과 이제 막 봄옷으로 갈아 입은 산등성 구비구비를 넘고 넘었다. 반나절이 걸려 예정지에 도착하니 이미 선발대로 온 장정들이 삽으로 구덩이를 파 놓았다. 여러가지 절차가 진행되고 마지막으로 상주가 나와서 모시옷깃으로 흙을 받아서 관위로 부어넣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 눈물과 울음으로 이것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아버님은 환갑을 보내고 몇해 후 치려진 국회의원선거 충격 때문에 쓰려졌고 그리고는 영영 일어나지 못하셨다고 하였다. 어머님은 많은 대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종손의 어른이 이렇게 일찍 가면 여자몸인 내가 이제부터 대가족을 어떻게 꾸러 가는냐 고 하면서 울고 울고 하시다 혼절하셨다.이때 많은 어른과 형제들, 조카들, 그리고 읍내 많은 사람들은 읍내의 어른으로 지낸 아버님의 마지막 길을 슬퍼하셨다.  

 

그 이후 군을 제대하고 고향에 잠깐 머물게 되었다. 한번은 형님이 내가 상여를 메어야 하는 데 급한 일 때문에 할 수가 없으니 나보고 대신 가라고 하셨다. 나는 형님이 주신 흰옷과 신발, 머리띠, 그리고 장갑과 수건을 받아 등에 지고 예정된 상가에 갔다. 장정들은 우선 상여를 짤 자재를 운반하여 와서 그중 기둥같은 나무들을 가로 세로로 두고 흰천으로 엮었다. 그 다음 관을 그 위에 얹고 꽃상여로 덮었다. 다시 그 위에 깃발지붕을 씌었다. 모든 것이 완성되자 마지막 이별식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상여를 메고 사자의 집을 떠났다. 

 

우리 장정들은 상여를 메고 우선 읍내를 향했다. 읍내를 지날 때는 읍내 중앙에서 절을 여러번 하면서 마지막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떠나는 인사를 하는 데, 상주와 친지로부터 돈 봉투가 적당히 나오지 않으면 상여가 꿈쩍하지 않았다. 몇번 실랑이가 벌어졌고 결국 상여는 읍내를 빠져 나갔다. 

 

이때부터 곡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처음이라 어색했다.  어이 어어이,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이 어어이.  선두가 선창을 하고 다음 후렴이 이어졌다. 술 기운인가? 선창소리 기운인가?  한두번 하니 나도 모르게 술술 잘 나왔다. 그러자  왠일인지 순간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눈물이 앞을 가로 막았다. 

 

어느 듯 상여는 동네 어귀를 돌아서 이제는 좁은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가로 5줄 세로 7줄 정도의 사각형의 상여가 언덕에서 춤을 추며 구불 구불 기어갔다. 그에 따라 어깨에 걸린 하얀천 줄이 나를 눌렸다 들었다 하였다. 나는 그 안에서 마치 내가 저승길을 밟 듯 덜렁덜렁 춤을 추게 되었다.

 

모든 과정이 끝나면 장정들은 운반된 음식과 술로 그들만의 술판을 가진다. 술로 밤을 세우기도 하고, 비가 올 때면 진흙탕에서 딩굴기도 한다. 산에서 일을 하고 혹은 술먹고 바닥에 뒹굴다 보면 하얀 상복이 시커멓게 검게 될 정도가 되기도 한다. 장정들은 상주가 직접 하기 힘들 모든 것을 다 하기에 설령 술이 취해서 추태를 보인다 하더라도 동네사람 아무도 그들을 나무라는 일은 없다. 

 

그 이후 몇해가 지나자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형님 말씀에 의하면 우리도 이제 늙어 가는 데 상여를 짜서 멜 젊은이들이 이 고향에서도 없다는 것이었다. Andr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