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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

Hi Yeon 2017. 6. 10. 18:00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

무기, 병균, 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재래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지음.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생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저자는 현재 캘리포니아 주립대(UCLA)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류학, 진화 생물학, 생물 지리학을 공부하였으며 라틴어, 그리스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수개 국어를 구사한다.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는 1998년 퓰리처상과 영국의 과학출판상을 수상한 책으로 인류 문명이 대륙별 민족별로 불평등해진 원인을 다각적인 시각에서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다.


 

 


 

 

인류의 기원


 

아프리카에서 인류의 기원(7백만년 전), 4백만년전 인류는 직립 

서아시아로 이동(1백만년 전)

유럽으로 이동(5십만년 전)

북러시아로 이동(2십만년 전)

호주로 이동(4만년 전), 뉴질랜드로 이동(33,000년 전), 그리고  폴리네시아로 이동(BC1,200년 전)

베링 해협을 넘고(12,000년 전), 북아메리카로 이동(11,000년 전), 그리고 남아메리카로 이동(10,000년 전)


폴리네시아의 고립과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온 부족들의 생존

 

 

1835년 모리오리족(농경민 사회, 총과 곤봉과 도끼로 무장)과 마오리족(수렵 채집민)의 잔혹한 충돌에서 모리오리족은 마오리족을 무차별 살해하였다. 두 집단은 1,000년경 뉴질랜드로 이주했던 폴리네시아 농경민의 후손이다. 모리오리족은 농경민 사회였고, 마오리족은 수렵 채집 사회였다. 발전과 미발전 사회의 극단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아메리카 오랜 고립에 따른 생존의 결과

 

 

1532년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잉카 황제, 8만 병력, 곤봉 등으로 무장)는 피사로(스페인, 168명의 총과 칼로 무장한 기마병과 보병)에게 생포되고 살해되면서 잉카 왕국의 주민들은 몰살당하고 제국은 몰락한다. 피사로의 병사는 한 명도 다치지 않았고, 그 전투에서 순식간에 7천명의 원주민 전사를이 살해됐다. 아수라장이었다.

 

아타우알파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이룩한 국가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풍요로우며 가장 인구가 많은, 또한 행정 및 기술 면에서도 가장 발전된 국가를 다스리는 절대 군주였다. 그런데 잉카 왕국이 그렇게 쉽게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남 보다 먼저 가축화 작물화를 했던 정주사회는 (가축화 작물화 -> 정착화 -> 인구 증가 -> 기술 증가 -> 중앙 집권 정치 -> 다른 부족 압도)라는 결과를 만든다는 사실의 좋은 예이다. 

 

 

1. 처음 보는 총과 칼, 그리고 말 - 군사 기술

 

2. 유럽인이 상륙하면서 함께 온  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발진티푸스, 페스트 등등 전념병은 원주민의 95%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유럽의 총칼에 목숨을 잃는 인디언보다 병원균에 의해 죽는 수가 더 많았다. 이 같은 인디언만 골라 죽이는 수수케끼 같은 병원균들은 대부분의 인디언과 그 지도자들을 죽이고 생존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림으로써 인디언의 저항을 약화시켰다.  -  전념병

 

3.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많은 전사들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전함이 있었다. - 해양 기술

 

4. 스페인 전사들은 잉카 제국(카하마르카)과 가까운 중앙 아메리카를 이미 정복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문자 부재에 따른  정보 부재

 

5. 168명이라는 작은 부대가 전투 병사가 아니라고 생각한 인디언의 오판, 피사로는 영원한 정복을 위하여 침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인디언의 오판 - 인간 관계의 폭 넓은 경험의 부재


농작물의 진화


많은 식물들은 종자를 분산시키기 위한 특수 기법을 갖고 있다. 그러한 기법을 갖추지 못한 돌연변이 종자들만이 수확되어 현재 우리가 재배하는 농작물의 선조가 되었을 것이다. 농작물의 개발 원리는 잘 알려진 변종을 재배하다가 그 종자를 뿌렸을 때 약간 더 나은 변종이 나타나면 다시 그것을 선택하는 식으로 되풀이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인 과정이었다. 즉 우리가 야생 식물의 여러 개체 중에서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밭에서 재배되는 식물 개체 사이의 경쟁은 야생 상태에서와 또 다른 개체들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진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식물군의 작물화가 가장 일찍 이루어졌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식물군의 작물화 이점은 무엇일까?


1.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이다. 겨울은 온난다습하고 여름은 길고 덮고 건조하다. 이러 기후에서는 초본의 크기가 작고 큰 종자를 만드는데 많은 에네지를 투자한다. 현대의 주요 12종 작물에 6종이나 포함된다.


2. 야생 조상은 이미 풍부하고 생산성이 높았다. 재배가 시작된 후에도 많은 변화가 필요치 않았다. 우리가 먹는 밀과 보리의 야생 조상들은 이미 현 농작물과 거의 흡사했다.


3. 비옥한 초승달 지대 식물군은 자웅동주형 제꽃가루받이의 비율이 높다. 이 지역에서 최초로 작물화 된 8종의 중요한 농작물은 모두 제꽃가루받이 식물이었다. 밀은 단백질 함량(8-14%)은 또 하나의 이점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동아시아와 신세계에서 각각 가장 중요한 곡류 농작물인 벼와 옥수수는 단백질 함량이 낮다는 것이 영양면에서 심각한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4. 세계에서는 그와 유사한  지중해성 기후를 가진 곳이 4군데나 더 있다. 캘리포니아, 칠레, 오스트레일리아 서남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예 토착적인 농업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와 다르게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적어도 5가지 이점이 있었다.


1) 세계에서 가장 넓은 지중해성 기후대이다.


2) 계절별 연도별 기후 변화가 가장 크다. 그래서 종의 다양성과 한해살이 식물의 비율이 높았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56종의 볏과 식물 중에서 자그만치 32종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반면 캘리포니아 1종, 칠레 2종, 오스트레일리아 서남부 0종, 남아프리카공화국 1종만 있었다.


3) 짧은 거리 안에서도 고도 및 지형 변동이 심하다. 이는 다양한 환경에 다양한 야생 식물이 존재한다. 또한 고도차에 의하여 수확기가 각각 다르다.


4) 다양한 야생 식물군 덕분에 가축화된 대형 포유류의 야생 조상도 풍부했다. 염소, 양, 돼지,  소가 매우 일찍 가축화되었다.(개를 포함하여 가장 중요한 5종 중의 4종이다) 3종의 곡류는 탄수화물의 주 공급원, 4종의 공류(20-25%함유)에는 단백질, 4종의 가축은 단백질의 주 공급원이 되었고, 부족한 부분은 밀의 풍부한 단백질 함량으로 보완되었다. 아마는 섬유와 기름의 공급원이 되었다.


5) 마지막 이점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는 수렵 채취 생활의 경쟁력이 약했으리라는 점이다. 서남아시아는 큰 강이 별로 없고 해안선이 짧아 수산자원이 비교적 빈약했다.


AD 1100년경에 옥수수, 누에콩, 호박이라는 멕시코 3대 작물이 완성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미 자기지역의 작물된 품종을 포기하거나 그 비중을 감소시키는 선택을 하였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여러 민족들은 훨씬 일찍이 다양한 토종 식물을 작물화 하였다. 집중적인 식량 생산을 발전시켰고 조밀한 인구를 더 빨리 증가 시켰다. 결과적으로 근대에 들어오면서 더 진보된 기술, 더 복잡한 정치 조직, 그리고 다른 민족들을 감염시킬 수 있는 더 많은 유행병을 갖게 되었다. 이는 민족이 가진 취약점이 아니라 주변환경, 즉 야생 동식물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고대의 대형 포유류 14종이 유라시아에 집중된 이유는 대형 야생 육서 포유류의 종 수가 가장 많았다. 유라시아에서 가축화가 된 주요 5종의 포유류(소, 양, 염소, 돼지, 말)는 비유라시아로 전파되면서 받아 들인 부족들은  다른 수렵 채집민들을 정복하였고, 그리고 기병대가 생기면서 전쟁의 양상도 바뀌었다. 이런 현상은 똑 같은 일을 반복시켰다.


148종에 달하는 전 세계의 대형 야생 초식성 육서 포유류(가축화 후보종) 중에서 겨우 14종만이 가축화 시험에 통과 했다. 사실상 대형 포유류의 가축화는 4500년전에 이미 끝났다. 현대의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포유류의 가축화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아직도 추가적인 종의 가축화는 미미하다. 이는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 적용한다. 야생 후보종이 가축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특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 필수적인 특성들 중에서 단 한가지만 결여되어도 행복한 결혼을 만드려는 노력이 실패하는 것처럼 가축화의 노력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가축화 실패의 6가지 원인


1. 식성

2. 성장 속도

3. 감금 상태에서 번식시키는 문제

4. 골치아픈 성격(사람에게의 위험성)

5 .겁먹는 버릇(감금 상태에서 관리의 문제)

6. 사회적 구조(무리를 이루어 살고 무리의 수성원 사이에 우열 위계가 잘 발달되어 있다. 결국 인간을 지도 자로 본다. 그래서 각자 세력권을 갖고 혼자 살아가는 동물들은 몰고 다니기가 불가능하다. 군거 동물 중에 우열 위계가 분명하지 않고 우세한 지도자를 본능적으로 기억하지도 않는(따라서 인간도 기억하지 않는) 종들이 많다.


인간과 동물의 결혼이 대부분 불행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수 많은 이유 중에서 한가지 이상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야생포유류 중에서 낮은 비율만이 인간과 더불어 행복한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 모든 항목에서 합격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유라시아인들에게는 기타 대륙 사람들에 비해 가축화할 만한 대형 야생 초식성 포유류가 훨씬 많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유럽 사회가 대단히 유리해진 것은  바로 포유류의 지리, 역사, 생태 등 3가지 기본적인 현실 때문이었다.

 

첫째, 유라시아는 넓고 처음부터 후보종 수가 많았다.

둘째, 홍세기 말에 엄청난 멸종으로 대부분의 후보군을 잃고 말았지만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는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거기서 살아남은 후보종 중에서도 유라시아의 경우에는 기타 대륙에 비해 가축화에 적합한 동물들의 비율이 높았다.


유라시아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축과 식물의 전파 속력


남북축(아프리카, 아메리카, 호주, 뉴기니)은 매우 느렸다. 열대기후와 사막이 장벽이었다. 예로 가축이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전파되는 데는 8,000년이 걸렸다. 동서축(유럽, 파키스탄, 인도) 매우 빨랐다. 기후 조건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단 인도에서는 우라시아는 여름이 건기인데 반대로 인도는 우기인 까닭에 다소 늦었고 중국은 산맥이 장벽이었다. 그래서 중국은 BC 2,000 - BC 1,000년에 밀, 보리, 말이 전래되었고 독자적으로 작물화 가축화가 많이 되었다.


바퀴는 BC 3,000년경 서남 아시아에서 최초 사용되었고, 알파벳은 BC 1,500년 이전에 초승달 지대에서 최초 사용되었다.


유럽이 여러 대륙에 준 사악한 선물 - 병원균


2,000만명에 달했던 멕시코 인구가 1618년에 이르렀을 때는 약 160만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다른 예로, 북아메리카의 가장 크고 최고의 농경지의 사회는 미시시피 강 유역이다. 이 지역의 경우 그곳의 사회가 붕괴되기까지 정복자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대신 한발 앞서 전파된 유라시아의 병원균이 모든 일을 해치웠다. 본래 북아메리카 인구는 약 2,000만명이었다. 콜롬버스가 도착한 이후 한두 세기에 걸쳐 인디언의 인구는 최대 95%가 감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유라시아인들이 오랫동안 가축과 밀접하게 살면서 진화된 병원균이 없었다면, 유라시아인들이 아무리 군사 해양 기술과 정보 문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쉽게 인디언을 정복 못 했을 것이다.



문자 고안


1, 독립적으로 고안된 문자


수메르인의 설형 문자 - BC 3000

멕시코 인디언 - BC 600


2. 독립적으로 고안됐다고 추측되는 문자


이집트 문자 - BC 3000

중국 문자 - BC 1300

이스터 섬 문자 - 1851년 이전


3. 아이디어 확산을 통해 만들어진 문자


체로키족 문자 - 1820년경 아칸소 주 세쿼이아 체로키족 인디언

한글 - 1446년 동아시아 한국

오검 알파벳 - 4세기경 영국 켈트족


4. 알파벳 : 최초는 BC 2000-1000년경  시나이 반도 지역에서 살았던  셈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다. 정확성과 간소함이라는 잠재적 이점을 가진 문자 체계이었다.


3가지 알파벳의 특징


1, 단음자의 기호 - a, b, c, d

2, 순서대로 배열하고 이름 붙임 - a(sleph), b(beth), g(gimel), d(daleth). g는 현재의 c이다.

3, 모음 고안


알파벳의 복사와 발전


최초 셈계 알파벳 - 초기 아라비아 알파벳 - 현대의 에디오피아 알파벳

최초 셈계 알파벳 - 아랍어 알파벳 - 현대의 아랍어, 헤브라이어, 인도어, 동남아시아어

최초 셈계 알파벳 - 페니키아 알파벳 - 그리스 알파벳 - 에트루니아 알파벳 - 로마 알파벳 - 현재 알파벳


문자 전파에서 특이점


유라시아 대륙은 동서축 방향으로 이동은 빠른 편이었다. 반면 수직 방향 축인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그리고 호주 뉴기니는  매우 느리거나 이동이 없었다. BC 600년 멕시코 인디언 문자가 독립적으로 고안된 이유이기도 하다. 문자의 전파는 작물화와 가축화 이동의 추이와 그 맥략을 같이 했다. 동서 축이라 하더라도 유라시아와 중국과는 높은 산맥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이동이 많이 늦었다. 그래서 중국어가 독립적으로 고안된 문자라고 주장이 된다. 그러나 이동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아이디어 확산을 통해 만들어진 문자라고 의심도 되어진다.


발명은 필요의 어머니


기술이란 어느 영웅의 개별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누적된 행동을 통해 발전한다는 것, 그리고 기술이란 대개 어떤 필요를 미리 내다보고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된 이후에 그 용도가 새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유리창이 발명된 한 예이다.

 

화덕에서 불에 탄 모래와 석회석 잔해를 발견(빙하기의 수렵 채집민)

물질 표면에 유리를 입히다(BC 4000년경)

유리 물건 만들다(BC 2500년경,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유리 그릇을 만들다(BC 1500년경)

유리창이 탄생(AD 1년경 로마)


또 다른 예이다.

 

19세기의 화학자들은 원유의 중간 분류층이 기름 램프의 연료로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화학자들은 휘발성이 가장 높은 분류층(휘발유)을 쓸모없는 폐기물로 간주하여 내버렸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내연 기관의 이상적인 연료라는 점이 밝혀졌다.

 

인류의 두가지 도약

 

1. 5만-10만 년 전 유전자 변화 -> 언어와 두뇌 기능을 가지는 현세인의 신체적변화

2. 정주형 생활 방식(수렵 채집에서 가축화와 작물화로 전환) -> 소유 가능, 경제와 기술 발전 가능, 경쟁 사회로 전환

 

유라시아인들의 기술 발전 원인

 

각 대륙의 면적, 인구, 확산의 난이도, 식량 생산의 출발 시기 등에서 나타난 차이에 따라 기술 발전의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기술은 자가 촉매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라시아는 처음부터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지리적 요인 덕분에 훨씬 일찍이 정주 생활을 하였기에 작은 면적에 많은 인구가 살게 되었다), 1492년에 와서는 엄청나게 앞서게 되었다. 그것은 유라시아인들의 지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유라시아의 지리적 요건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정주 사회로 변화에 따른 사회 변화

 정주 사회로 들어감으로서 식량 생산이 증가되었고, 그것이 인구 증가로 이어졌으며, 다시금 인구 증가와 식량 생산 증가는 서로 촉매제가 되어 식량과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이에 따른 인간 관계의 복잡성 증가로 사회는 중앙집권화, 계급화 되었다.

 

1. 무리 사회: 5-80명, 확대 가족, 유목 채집 생활, 지도자가 있었다.

 

2. 부족 사회: 수백명, 정착 생활, 하나 이상의 공인된 친족 집단, 대인이 있었다.( 공식적인 지위가 아닌 단지 의견 조율자, 외관상 다른 사람과 구별을 할 수 없음)

 

3. 추장 사회: 수천에서 수만명, 추장은 공인된 세습제로 유지되는 공인된 직위, 독점적 무력 사용, 영원한 중앙집권 권위체, 다른 사람과 확연이 구별할 수 있는 외관상 차이를 가졌으며, 비평등 사회, 계급의 발생(추장, 평민, 노예 계급), 공물과 노동력 징발(공공 건축물 건설)이 있었다

 

4. 국가 : 5만명 이상

 

중앙 집권적으로  통치되는 모든 비평등 사회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근본적 딜레마가 바로 추장 사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잘 되면 개인적으로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큰 일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지만, 못 되면 평민들로부터 빼앗은 것들로 상류층을 살찌우는 뻔뻔스러운 '도둑 정치'의 기능을 한다. 도둑 정치가와 현명한 정치가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이다. 즉 생산자로부터 거둬들인 공물 중에서 얼마만큼의 비율을 엘리트 계급이 가져가는지, 그리고 그 공물 중에서 얼마만큼이 공공 용도에 사용되어 평민에게 재분배되는지가 관건이다.

 

그러면 지배자가 평민들보다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금을 막론하고 도둑 정치가들은 다음 4가지 해결책을 혼합하여 사용했다.

 

1. 대중을 무장 해제하고 엘리트 계급을 무장시킨다.

2. 거둬들인 공물을 대중이 좋아하는 일에 많이 사용하여 재분배함으로써 대중을 기쁘게 한다.

3. 무력을 독점하여 공공질서를 유지하고 폭력을 억제함으로써 대중의 행복을 도모한다.

4. 도둑 정치가가 대중의 지지를 얻는 마지막 방법은 도둑 정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구성하는 것이다. 제도화된 종교는 도둑 정치가들에게 부가 이동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일 말고도 중앙 집권적 사회에 두 가지 중요한 이득을 가져다준다. 1)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공유하고 있으면 서로 무관한 개인들이 서로 죽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데 보템이 된다. 2) 이데올로기나 종교는 사람들에게 유전적인 이기심을 떠나서 타인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국가와 그보다 단순한 사회가 충돌할 때 대개 국가가 승리를 거두는 한가지 이유는 무기류를 비롯한 기술들이 더 우수하며 인구도 더 많다는 이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추장 사회와 국가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이점으로는 두 가지가 더 있다.

 

1. 중앙 집권화된 결정권자가 있으면 군사력과 물자가 집중화 된다.

2. '국가는 공인된 종교를 퍼뜨리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경우' 많아서, 그로 말미암아 군대는 기꺼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국왕과 조국을 위하여' 스페인에서는 ' 신과 에스파냐를 위하여'라는 식이다.

 

이 같은 정신은 무리 사회나 부족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정복 전쟁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광신적 행동'이 지구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추장 사회가 생기기 시작한 후, 특히 지난 6,000년 사이 국가들이 탄생하면서부터였다. 

 

대규모 사회가 중앙 집권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

 

1. 사람이 많아지면 서로 무관한 사람들 사이에 갈등도 많아진다.

2. 인구 규모가 커질수록 공동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기가 점점 불가능해진다.

3. 물자를 서로 주고 받아야 하는 경제적인 측면이다.

4. 인구 밀도 문제이다. 좁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 경우 그 만큼 더 복잡해진다.

 

만약 동일 수준의 복잡성을 가진 여러 사회가 경쟁을 하게 되었을 때, 사회적 복잡성의 수준은 한 단계 상승하게 마련이다. 이때 중앙 집권화는 정복, 합병이라는 다툼에서 비교우위를 얻는 수단이 되었고, 더불어 정복에 따른 규모 확대의 결과에 따른 문제 해결에서 중앙 집권화는 다시 더 강화되었다.

 

정복의 궁극적인 원인과 목적

 

수렵 채집민들의 무리 사회가 점유하고 있는 지역은 대체로 그렇듯이 인구 밀도가 매우 낮다. 패배한 집단의 생존자들은 적으로부터 멀찌감치 이동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인류의 확산의 이유일 것이다). 식량 생산자 부족이 점유하고 있는 지역처럼 인구 밀도가 중간 정도인 곳에는 패배한 집단의 생존자들이 도망칠 수 있는 지역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아직 집약적 식량 생산을 하지 않았는 관계로 노예를 부릴 만한 일도 없고 공물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잉여 식량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승리자들이 패배한 부족의 여자들을 데려다가 결혼하는 것 말고는 생존자들을 써먹을 데가 없다. 결국 패배한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영토는 승리자들이 차지한다. 반면

국가나 추장 사회가 점유하고 있는 지역처럼 인구 밀도가 높은 곳에서도 역시 패배자들은 도망칠 곳이 없지만, 승리자들은 이제 그들을 살려두면서 두 가지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1. 패배자들을 노예로 사용한다.

2. 식량이나 물품 등 공물을 바치게 한다.

 

이상과 같이 정복의 궁극적인 원인은 '식량 생산과 각 사회 사이의 경쟁 및 확산'이다. 거기서 시작된 인과 관계의 사슬에 의해 병원균, 문자, 기술, 중앙 집권적 정치 조직 등 정복의 직접적 요인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구체적인 인과 관계는 언제나 '조밀한 대규모 인구와 정주형 생활'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의 환경적 차이가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리적 환경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사회를 창조한 사람들은 다름아닌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었다. 물론 그들이 창조한 사회에는 문자도 없었고 식량 생산도 없었으며 산업화도 민주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오스트레일리아의 환경이 지니고 있는 특징들 때문이었다.

 

유럽의 총(원주민을 사살로 제거), 병원균(원주민의 유행병으로 병사), 중앙 집권체제가 원주민을 제거했다. 오늘날 오스트레일리아를 지배하고 았는 사람들은  2000만명의 비원주민들이다.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무렵에는 80%나 감소한 30만명에서 1921년에는 6만명으로 줄어들었다. 현재 그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하류층을 형성하고 있다. 과연 오늘의 원주민이 이렇게 만든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리적 환경이었다.

 

1. 대륙으로부터 오랫동안 고립

2. 오스트레일리아 대부분 지역의 지리적 기후적  천박성

3. 식물화 가축화 할 수 있는 종 수의 미비

4. 이러한 고립과 작은 인구 규모는 오스트레일리아를 근대까지 수렵 채집생활에 머물게 하였다. 즉 상대적으로 기술 퇴보 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그 엿날 인도네시아에서 이주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비옥한 지역에서 조차도 원주민들은 수렵 채집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약간 다른 뉴기니의 지리적 환경

 

1. 오스트레일리와 비교하여 덜 고립된 지리적 환경

2. 좁은 지역이지만 식량 생활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지역의 존재, 그에 따른 인구증가

3. 식물화 가축화 할 수 있는 종의 수가 적었으나 토착적인 식량생산을 시작하였다. 돼지와 닭은 가축화하며 살았다.

4. 고지대 뉴기니에서는 독립적으로 식물의 작업화가 시작되었다.

5. 뉴기니의 높고 낮은 지역, 그리고 협곡의 산재라는 지리적 여견 때문에 각각의 좁은 면적이 그 지역의 인구 증가을 제한했다. 그에 따라 대규모 추장 사회 진입이나 중앙집권화가 되기 어려웟다.

 

유럽의 병원균에 의한 피해는 최악을 피했다. 그 이유로는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팽창과 함께 뉴기니에는 벌써 3500년 동안이나 인도네시아로부터 정착민이나 상인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뉴기니인들은 유라시아의 병원균에도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으므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 비해 저항력을 훨씬 더 많이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반대로 유럽인들은 뉴기니 저지대의 병원균에 속속 쓰러졌다. 1880년경 뉴기니에 정착하려는 유럽인들의 90%는 말라리아를 비롯한 열대성 질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의 뉴기니 정착화는 번번히 실폐하였다. 유럽인들은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 문자와 중앙 집권 정치제도, 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질병, 험준한 지형, 식생활 따위의 모든 문제점 때문에 결국 유럽인들은 뉴기니 동반부(현재 독립국인 파푸아 뉴기니)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유럽 정착민은 소수이고 뉴기니 인구의 대다수는 뉴기니 원주민들이다. 하지만 뉴기니 서반부는 또 달랐다. 1963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넘겨받아 다스리고 있다. 지방 인구는 뉴기니인들이 압도적이지만 도시인은 주로 인도네시아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오래 전부터 왕래가 있었고 그래서 열대성 질병을 경험했으며 식생활 면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인이라말로 현대의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와 중국

 

미국은 최근 정치적 통일을 이룩한 나라이며 지금도 수백 개 언어와 민족 집단이 공존한다. 러시아는 모스크마를 중심으로 한 작은 슬라브 민족 국가였는데 19세기에 이르러 많은 비슬라브 민족을 흡수했으며, 그 중 많은 민족들이 지금까지도 각자 고유의 언어와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도 최근에 이룩된  정치적 창조물이며 각각 850개, 670개, 210개 언어가 공존하고 있다.

 

이 같은 규칙에서 단 한 곳 예외적인 존재가 바로 전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 중국이다. BC 221년이미 정치적으로 통일 되었고 지금까지 하나의 언어, 문화, 정치 체제로 유지했다. 중국 대륙은 황하강과 양쯔강이 동서(내륙과 해안)로 연결해 주었고, 두 강 사이(황하강과 양쯔강)의 운하가 건설되어 남북으로는 연결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과 북, 내륙과 해안 사이에는 산맥이나 기후적인 장벽이 없다. 그래서 중국 대륙은 일찍이 하나의 문화 정치적으로 통일되었다고 보아진다. 복잡하고 다양한 유라시아의 지리적 특성과 다른 중국 대륙의 지리적 특성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

 

중국의 문물은 주로 북에서 남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제철술과 벼농사 그리고  문자였다. 중국 최초의 세 왕조인 하, 상, 주 왕조는 모두 BC 2000년-1000년 북중국에서 탄생했다. 산맥을 넘어 유라시아에서 가축이나 농작물이 전래되었다. 중요한 것으로는 밀과 보리, 소와 말, 그리고 양과 염소였다.

 

 

 

 

환경이 역사를 형성했던 예를 보여주는 동아시아 및 태평양 일대

 

우리는 동아시아 및 태평양 일대의 사회를 통하여 배울 점이 많다. 환경이 역사를 형성했던 수많은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및 태평양 일대 사람들의 경우에도 지리적 환경에 따라 가축화 작물화 할 만한 야생 동식물이 각기 달랐고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여건도 달랐다. 그리하여 가축화 작물화 할 수 있는 좋은 지역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지역의 사람들을 점령하고 교체하였다. 그리고 교체한 이주민들의 후손들도 각자의 다양한 지리적 환경에 따라 또 다르게 발전했다.

 

즉, 북중으로부터 문자, 정치 구조, 기술을 받아들인  남중국인들은 동남아시아 및 타이완에 이주하여 원주민을 거의 교체했다. 그리고 타이완 및 인도네시아로부터 이주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다양한 지역 특성 때문에 다양하게 발달했다. 발달한 불교 왕국이 있기도 하였고 수렵채집 생활을 계속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집약적 식량 생산을 하였는 원시국가 형태(하와이)도 있었다. 뉴기니 일대에서는 오스트로네시아의 팽창과 반대의 결과가 일어났다. 오스트로네시아의 팽창이라고 오늘날 부른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지역에서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은 토착 인구가 침입자에 의하여 사라졌다. 그러나 뉴기니 일대에서는 대체로 토착 인구가 침입자를 무사히 물리쳤다. 침입자는 동일한데 결과를 정반대였던 것이다. 어째서 일까? 뉴기니에서는 이미 가축화 작물화가 되어 수천년 동안 식량생산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인구 밀도가 상대적으로 높았고 정치,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병원균에서 어느 정도 저항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유럽인들이 도착하였을 때 유럽인들은 기술, 정치 등과 같은 이점으로 태평양 일대 섬들과 열대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일시적인 식민지를 만들어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대부분의 지역에는 이미 토착적인 식량 생산자들과 병원균이 있었으므로 많은 유럽인들이 정착하지 못했다. 오늘날 많은 유럽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뉴질랜드, 누벨칼레도니, 하와이 뿐이다. 그리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및 남북아메리카와 달리 동아시아와 대부분의 태평양 섬들은 지금도 동아시아 및 태평양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다.

 

남북아메리카가 유라시아보다 낙후됐던 원인

 

 

1. 식량 생산이다. 대형 포유류가 홍적세 말기에 대부분 멸종하였다. 그후 가축화 작물화할 만한 야생 동식물이 없었고 지리적 생태적 장애물로 인해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에서 작물화된 식물이나 가축화된 소수의 동물들이 도입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2. 식량 생산의 차이가 인구 증가의 차이를 만들고 병원균, 기술, 정치 조직, 문자의 발달 차이를 만들었다. 이 가운데 식량 생산의 차이와 가장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요인은 병원균이었다. 병원균은 가축으로부터 시작하였고 인구 밀집으로 진화하여 유라시아에서는 페스트 등 치명적인 질병을 만들었다. 이러한 병원균들은 단절되고 가축화가 안된 남부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원주민들은 면역력이 없었던 것이다. 총과 칼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3. 문자이다. 남북아메리카에서 문자 사용은 중앙아메리카의 한 좁은 지역에서만, 그것도 엘리트 계급에만 국한 되었다.

4. 역사적 궤적이다. 왜 남북아메리카는 예외 없이 유라시아보다 뒤처졌을까? 우선 남북아메리카는 유라시아보다 출발부터 늦었다. 유라시아는 50만-100만년전부터 시작하여는데 반하여 남북아메리카는 겨우 1만-1만2천년 전이었다. 더구나 남북아메리카 지역에는 가축화 작물화에 적합한 야생 동식물이 적었다는 점, 확산의 장애물이 많았다는 점,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 좁았고 고립되었다는 점마저 매우 불리했다.

 

유라시아인들의 남아메리카 식민지 정책 

 

스페인이 대서양 건너편에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1,492년부터였고 15세기는 항해술, 돛, 선박 설계등 구세계의 여러 사회(이슬람,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가 발전시킨 기술들을 결합한 유럽의 해양 선박 기술이 급속히 발전한 시대였다. 스페인이 신세계에 식민지를 개척하자 곧 유럽의 대여섯 국가가 동참했다.

 

아메리카에 생긴 최초의 유럽 정착촌들은 1,492년 콜럼버스가 세운 정착촌을 필두로 서인도 제도에 몰려 있었다. 이들 섬의 인구는 발견 당시 100만명이 넘었지만 질병, 노예화, 사살 등으로 대부분의 섬에서 전멸되고 말았다.

 

1,508년경 아메리카 본토에서는 처음으로 파나마 지협에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그 이후 본토의 대제국이엇던 아스텍과 잉카가 정복되었다. 두 경우 모두 유럽인들이 퍼뜨린 유행병이 중요한 역활을 했다. 황제를 포함하여 전체 인구의 많은 부분이 그 병으로 죽었고 살아 남은 원주민들은 분열되면서 미지의 공포 속에서 유럽의 총칼에 사살되었다.

 

북아메리카 일대에서는 원주민 인구는 최고 95%까지 감소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 대신 구세대 사람들(유럽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이 들어왔기 때문에 오늘날 남북아메리카의 전체 인구는 1492년 당시의 10배에 달한다.

 

아프리카는 왜 유라시아를 정복 못하고 정복 당했을까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살아온 기간은 그 어느 대륙보다 훨씬 길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약 7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아프리카 대륙은 적도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다. 그 만큼 지리적 환경의 다양성을 가진다. 그래서 원주민의 다양성은 어느 대륙보다 크다. 1,500개의 언어가 띄섞여 있다. 유럽의 중요 고대 언어가 아프리카 언어 중 하나이다는  말도 있다. AD 1,000년 당시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주요 다섯 인종은 흑인(중부), 백인(북부), 아프리카 피그미족(중부 일부), 코이산족(남부), 인도네시아인(마다가스카르)이다.

 

아프리카에서도 작물화 가축화가 북아프리카에서 우선적으로 시작되어 중부인 사휄, 에디오피아, 서아프리카로 전파되었으며 그렇지 못한 원주민들을 침탈했다. 북아프리카는 지중해 기후와 비슷하여 유라시아의 작물화 가축화 종을 쉽게 받아 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메마른 사하라의 사막을 넘을 수 없었다. 사하라 사막의 이남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다양하게 분포하여 다양하게 발전하였으며 결국 외부의 침탈에 사라졌다. 식량생산에 따른 병원균, 기술, 정치 조직, 문자의 우월의 차이로 다양한 지리적 환경에서 살아온 다양한 원주민들이 쫓겨났거나 사라졌던 것이다. 마다가스카르 섬은 AD 800년 이전에 인도네시아(버르네오)인들에게 침탈됐다.

 

아프리카는 수백만 전부터 인류가 최초로 살아온 인류의 고향이었다. 이처럼 다른 대륙보다 훨씬 일찍 출발했다는 이점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기후와 생식지도 다양하고 인종도 가장 다양하다는 이점을 두루 갖추고 있었슴에도 불구하고,  왜 유라시아를 정복 못하고 정복 당했을까?

 

이 역사적 사실은 모두 식량 생산의 발전에서 비롯되었다. 그 까닭은 1. 가축화 작물화할 만한 토종 동식물이 적었고 토착적인 식량 생산에 알맞는 지역이 훨씬 좁았으며 남북 축 때문에 식량 생산과 발명품의 전파가 지연되었다. 2. 아프리카 면적은 유라시아 면적의 절반에 불과하다.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으면 그만큼 서로 경쟁하는 사회 수가 많아지고 발명품도 많이 만들어지며 그만큼 더 빨리 발전하게 된다.

 

그 결과, 1498년 동아프리카 해안에 첫발을 디딘 후 4년도 채 지나지 않아 바스코 다 가마는 함대를 이끌고 동아프리카의 가장 가장 중요한 항구이며 당시 짐바브웨의 황금 무역을 좌우하고 있던 킬와를 양도하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각 대륙의 사람들이 경험한 장기간의 역사가 서로 크게 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들의 타고난 타고난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의 차이 때문이었다. 1. 가축화 작물화의 재료인 야생 동식물의 대륙간 차이이다. 2. 대륙 내에서 확산과 이동의 차이이다. 3. 대륙 간의 확산과 이동의 난이도 차이이다. 4. 각 대륙의 면적및 전체 인구 규모의 차이이다.

 

그러나 유라시아 내에서 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중국이나 인도가 아니라, 하필 유럽의 사회들이 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를 식민지하고 기술을 선도하며 현대 세계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세하게 되었을까?

 

첫째, 비옥한 초승달의 지대의 경우에는 원래 가축화 작물화에 적합한 동식물이 집중되어 있어서 다른 곳보다 몇천 년 일찍  출발할 수 있었지만, 일단 그 선발 간격을 추월당한 뒤에는 더 이상 지리적인 이점이 없었다. 처음에는 힘의 중심이 비옥한 초승달에 머물다가 점점 힘의 중심이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다시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이동했다.

 

둘째, 초기에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였으나 신석기 때부터 개발에 따른 환경 파괴로 현재는 사막, 반사막으로 변하였다. 지금은 석유로 일시적인 부를 누리고 있을 뿐이다.

 

중국은 식량 생산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거의 맞먹을 만큼 일찍 시작되었고 지리적으로 탁월하여 1만년 가까이 농업을 하여 왓었고 기술도 전세계적으로 선도했다. 그러나 정치 조직이 그 뒷바침을 하여 주지 못했다. 14-15세기 중국 조정은 두 파벌(환관과 그 반대파)의 파벌 싸움으로 중국의 기술과 선단이 퇴보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유럽은 분열되어 있었어 서로 경쟁을 하였고 중국은 통일되어 있어 내부의 파벌 논쟁만 있었다.

 

중국의 만성적 통일과 유럽의 만성적 분열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

 


 

유럽의 해안선은 섬에 버금갈 만큼 고립되어 있는 큰 반도가 5개나 있어 매우 들쑥날쑥하며 가가의 반도에는 모두 독립적인 언어와 민족 집단과 정부(그리스, 이탈리아, 이베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가 들어섰다. 반면에 중국의 해안선은 훨씬 완만하며 별개의 중요성을 갖게 된 곳은 인근 한반도밖에 없다.


유럽에는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고 자기들의 언어와 민족성을 유지할 만큼 큰 두 섬 (Great Britain and Ireland)이 있고 그중 한 섬(Great Britain)은 유럽의 중요한 독립 강국의 하나가 될 만큼 크고 또한 유럽 본토와 가깝다.


그러나 중구의 경우에는 가장 큰 두 섬인 타이완과 하이남조차 각각 아릴랜드 면적의 절반 이하에 불과하며 최근 타이완이 부상하기 전까지는 둘 다 중요한 독립 강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일본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탓에 최근까지 아시아 본토로부터 정치적으로 격리되어 있었는데 Great Britiain과 유럽 본토의 경우보다 훨씬 그 정도가 심했다. 


유럽은 여러 개의 높은 산맥(알프스, 피레네, 카르파티아, 노르웨이 국경 산맥) 때문에 언어, 민족, 정치 등의 측면에서 각각 독립적인 단위들로 조각조각 나누어져 있는 반면, 중국에서는 티벳 고원 동쪽에 있는 산맥들은 그리 대단한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중국의 중심부는 충적토로 이루어진 비옥한 유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두 개의 큰 강(양쯔 강과 황허 강)이 있어서 동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두 강 사이를 남북으로 잇는 통로들도 비교적 평탄한 편이다(결국에는 두 강이 운하로 연결되었다) 그 결과 중국은 매우 일찍부터 생산성 높은 두 개의 거대한 핵심 지역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두 지역이라고 해도 분리 상태가 그리 심하지 않았으며 결국 하나의 핵심 지역으로 합쳤다.


그에 비하면 유럽에서 가장 큰 두 개의 강인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은 규모가 작아서 훨씬 좁은 지역밖에 연결해 주지 못한다. 또한 중국과 달리 유럽은 작은 핵심 지역들이 여기저기 산재하고 있는데, 다른 지역들을 오랫동안 지배할 만큼 큰 지역은 하나도 없었고, 각 지역이 만성적 독립 국가의 중심지였다.


BC 221년 마침내 중국이 통일되자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다른 독립 국가가 창건되어도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물론 BC 221년 마침내 중국이 통일되자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다른 독립 국가가 창건되어도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물론 BC 221년 이후에도 몇 차례의 분열 시대가 있었지만 언제나 재통일로 마감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샤를마뉴 대제, 나폴레옹, 히틀러 등 강력한 정복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재통일 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절정기의 로마 제국도 유럽 면적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지 못했다.


중국이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내부의 장애물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점은 처음에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북중국, 남중국 해안 내륙이 각각 다른 농작물, 가축, 문화적 특징을 낳아서 그 모두가 차후 통일된 중국에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연결성은 불이익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어느 한 폭군의 결정은 당장 혁신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또 실제 그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그와 대조적으로 유럽의 지리적 분할 상태는 서로 경쟁하는 수십 또는 수백 개의 독립 소국과 혁신의 중심지를 만들었다. 그중에서 어떤 국가가 특정 혁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또 다른 국가가 그 일을 했고, 따라서 이웃 국가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에게 정복당하거나 경제적으로 뛰떨어질 수밖에 없다. 유럽의 장애물들은 정치적 통일을 막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기술과 아니디어의 전파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처럼 유럽 전역의 유통망을 한꺼번에 차단할 수 있는 폭군은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같은 비교를 통하여 지리적 연결성이 기술 발전에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주 장기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적당히 연결되어 있는 곳, 다시 말해서 연결성이 너무 강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는 곳에서 기술은 가장 빠르게 발전했다. 지난 1,000년간 중국과 유럽, 인도 대륙에서 진행된 기술의 발전 과정은 연결성이 너무 강하고, 적당하고, 너무 약했을 때  나타나는 각각의 결과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중국의 역사는 현대 세계에 유익한 교훈을 던지고 있다. 즉, 상황은 변하는 것이며 과거의 우위가 미래의 우위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교훈이다. 오늘날에는 각종 아이디어가 인터넷을 통해 즉각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으며, 또한 화물도 비행기에 실려 하룻밤 사이에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날아간다.  세계의 각지 사람들 사이에도 전혀 다른 규칙들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일질도 모른다. 마치 타이완, 한국, 말레이시아, 특히 일본 등 신흥 강국들이 부상하는 것도 그것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전혀 다르다는 그 규칙들도 잘 살펴보면 종전 규칙의 변형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나라들도 따지고 보면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식량 생산을 바탕으로 한 옛 중심지에 편입되어 있던 지역이거나 아니면 그 같은 중심지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므로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식량 생산을 시작한 두 중심지(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중국)가 아직도 현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직계 후손들의 국가(현대 중국)를 통해서든지, 일찍이 두 중심지의 영향을 받던 이웃 지역의 국가(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유럽)를 통해서든지, 아니면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는 국가(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를 통해서든지 말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원주민, 아메리카 원주민 등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다. 사회가 인간의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환경의 차이 때문에 각 대륙마다 다르게 발전했다. 그래서 BC 8,000년 당시의 역사가 지금도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