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일찍 핸들을 잡고 도시로 나왔다. 도시 전체가 자욱한 안개와 빗속에 잠겨 있었고 가을비를 받으며 조용히 얻드리고 있었다. 바람은 세지 않았고 차지도 않았으며 빗줄기는 굵었다. 내가 제일 먼저 그곳들을 뚫고 가기 시작했다. 강변따라 이어지는 도로를 거쳐 구름다리 같은 철교 다리위를 지나니 내가 구름위에 매달린 것 같았다. 양옆으로 나무들이 늘어선 주택길에 들어서니 비와 안개로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고 해드라이트의 불빛은 물방울에 산란되어 마치 몽롱한 꿈속을 헤메는 것과 같았다. 이른 새벽에 비와 안개속에 파뭍힌 가을 나무들 사이로 뿌연 세상이 오직 나만을 위해 내 눈앞에 펼쳐졌고, 오늘 그 누구의 흔적도 허락하지 않았던 비오는 새벽의 가을을 내가 제일 먼저 맛 보았다 .
차를 몰면서 손님과 함께 꿈속과 같은 잿빛 세상을 몇시간 이리저리 돌았다. 새벽이 가고 늦은 아침이 되었건만 구름에 갖힌 빛은 어느정도 어둠을 몰아 냈을 뿐, 여전히 하늘은 온통 회색빛으로 가득찼다. 더구나 허공에 빗물마저 흐르다 보니 세상은 마치 흐릿한 흑백 영화를 보는 듯 하였다. 비가 계속 내리자 바닥의 물줄기는 모여서 제 갈 길을 가다가 떨어진 낙엽을 하수구로 밀어 넣었고 그 위로 빗물이 모여 작은 호수가 되었다. 그 물 위로 비치는 가을의 나무그림자는 잿빛 하늘 위에 걸려있는 나무와 함께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위로 차 바퀴는 두줄로 그 그림자를 자르면서 지나갔다.
정오가 되어도 비와 구름은 여전히 태양을 깊숙히 감추었고 그나마 아침보다 좀 더 밝아 졌을 뿐 하늘은 빗줄기와 비구름으로 섞여 있었다. 그 회색빛 아래 빗물을 머금은 나무잎의 색깔은 더욱 선명하게 빛났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의 그 갈색은 더 진하게 보였다. 가을의 빛깔은 강한 태양빛으로 본래의 자기의 빛깔을 뽐내지 못하였는가 회색의 배경색앞에 더 진하게 나타났고 그리고 물방울을 머금면서 싱싱하게 빛났다.
오후가 되어 하늘은 조금 더 밝아졌으나 비는 계속 주룩주룩 내렸다. 이제 세상은 젖을 만큼 젖어서 마치 물에 빠진 것 같이 나무 가지가지에서는 수액같은 물줄기가 줄줄 흘려 내렸다. 이제 수목과 땅, 그리고 우리네 인생은 온종일 내리는 가을비로 푹 젖어 버렸다. 나도 하루종일 내리는 가을비로 얼큰 취해 버렸다.
저녁이 되면서 비와 어둠은 세상을 다시 품었고 도로 위에, 떨어진 낙옆 위에, 나무 위에,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붕 위에 가을은 내려앉으면서 조금씩 깊어갔다. 이제는 바람이 세어지기도 하고 빗방울이 굵어지기도 하면서 하얀 운무가 지상에 다시 내려 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보니 올해 가을은 유난히 찬란했다. 그 가을의 빛깔은 쓸쓸함과 공허함으로 가을의 완숙으로 채워져야 할 내 가슴에 오히려 큰 구멍을 만들었다. 오늘 새벽부터 저녁인 지금까지 비내리는 가을속에서 나는 눈으로 마음으로 가을비에 흠벅 젖어 보았지만 나 자신만 취할 뿐 가을은 다시 저만치 있었다. 이제는 나는 가을과 가을비 속을 돌아다니며 어둠을 헤치고 운무를 뚫지는 않았다. 부질없는 일임을 조금씩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어서야 그 가슴의 큰 구멍을 그대로 둔채로 나의 욕망과 자신을 조금씩 버려 보았다. 그러자 그들이 나에게 조금씩 다가왔다. 다시 마음을 내려 놓고 내 자신을 하나씩 비워 보았다. 조금씩 흐릿한 하늘 사이로 빗줄기와 뿌연 백색 안개로 가려진 가을사이로 가을의 선명한 빛깔이 오히려 나에게 다가옴을 느꼈다. 이제는 내가 그곳에 있으니 가을어둠과 가을비가 밀려오고 나는 우주속을 비행하듯 그 속을 자유로이 유영할 수 있었다.
단풍으로 쌓인 터널과 강물 위에 걸친 다리를 지나고, 강물과 가을나무를 옆에 두고 난 도로를 달리고, 사람들이 붐비는 빌딩사이를 지나면서 하루종일 시시각각 변하는 빗줄기와 안개와 비구름이 연출하는 세상속을 내가 뚫고 다녔으나, 이제는 그 가을과 가을비가 나를 뚫고 다가왔다. 그리고 비에 젖은 가을이 내 영혼을 맑게 해주고 신선하게 해 주면서 내 눈속을 그들의 전경으로 촉촉하게 새겨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제야 나는 익어가는 가을의 곡식을 틀어내듯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비우고 가을비로 나를 씻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가을비에 젖어 초목들이 더 붉게 더 충실하게 가을을 열 듯 나도 이 가을비에 젖어 이 겨울을 더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내일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수액을 마신 초목위로 눈부시는 태양이 다시 떠 오를 것이다. 그때 붉게 물든 가을 잎들이 햇빛아래서 반짝거리면서 춤을 출 것이고, 다시 좀 더 붉게 타들어 갈 것이다. 이제는 그 곳에서 내가 가을속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 나를 맞이하고 보낼 것이며, 더불어 나는 인생의 작은 완숙함을 맛볼 것이다. And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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