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다. 오랜간만에 고국에서 맞이하는 추석이다. 보통 추석 며칠 전에는 벌초를 한다. 올해 나는 고향 문중에서 하는 벌초 행사에는 참석을 못했다. 캐나다에서 귀국하자마자 작은 가게를 처분하는 동안 내 심신은 지쳤다. 몸과 마음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하여 정진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옛적에는 직접 낫을 들고 벌초를 직접하였지만 요즈음은 현지분들에게 돈을 주고 벌초를 부탁한다, 그래서 벌초 날에는 산소에서 절만 한다. 당연 많은 시간이 남는다. 이때 모인 형제, 아재, 조카들과 만남의 즐거움으로 우리들은 이야기 꽃을 피운다.
세종에서 경주 사이에는 고속버스가 운행한다. 세종과 전국의 작은 도시간에는 거미줄과 같이 교통이 잘 연결되어 있다. 어지간한 작은 도시도 고속버스로 세종을 오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세종이 행정도시인 득분이다. 추석 전날 오전 9시 경에 경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도착하여 경주 형님 댁에서 점심을 같이 하였다. 점심 상을 준비하여 나를 기다려 주는 형님과 형수님이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다.
형님이 왜 벌초에는 오지 않았나고 물었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 할 수는 없었다. 바빴다고 둘려 대었다. 바쁘다고 못 오면 되는냐고 형님이 되물었으나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물었더라도 “예, 너무 바빴습니다”라고 씩씩하게 말하였을 것이다. 부모 형제들이 나에게 안부를 물었을 때는 항상 “잘 있습니다”로 답하였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에 부쳤을 때도 있는 그대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추석을 일찍 지내고 차로 한시간을 달려 산소에 갔다. 가을 하늘이 이렇게도 청명할까?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내려 놓아도 될 것만 같았다. 전번에 산소에 왔을 때는 조금의 감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무덤덤했다. 그냥 모든 것이 자연의 일부분처럼 느꼈다. 청명한 가을 날씨 탓인가? 60줄에 드는 내 나이 탓인가. 아니면 조상신을 그리 밎지 않은 내 탓이가? 절을 하고 음복을 하니 정신이 흐려졌다. 옆에 앉아 있는 맏조카에게 말을 걸었다. 맏조카는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나를 매우 좋아했다.
여기 이 넓고 좋은 터에 비석이 하나 있다. 화장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봉분 없는 하나의 비석에 모셔졌지. 옛 풍습으로 그렇게 했겠지. 그래도 내 어머니를 처다보고 만져볼 대상이 있으면 좋으려만. 너의 할머니는 문중의 큰 며느리였다. 문중 장손인 너의 할아버지의 비석에 할머니 본가만 표기가 되어 있구나. 나는 이 비석 앞에 엎드리면 아버지를 느낄 수 있지만 어머니를 동시에 상상할 수가 없구나.
저 옆 구릉을 보아라. 그곳에는 내 삼촌 봉분이 있고 그 옆에 숙모 봉분이 있지. 산소가 경제적인 규모에 좌우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여도 처다볼 내 어머님의 비석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지. 아버지의 7형제들과 그 자식들을 먹이고 보살피고 키우기도 하였던 내 어머니였는데 말이다. 너는 맏손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머니를 별도의 비석으로 하면 좋겠지.
맏조카야, 여기 이렇게 비석을 뒤로 하고 앉아 저 낮은 구릉과 구릉 위 산천초목을 내려다 보니, 문득 나는 이 좋은 터에 무엇이 될까 하는 생각이 나는구나. 나는 흔날리는 바람이 되고 싶구나. 가족장 디자인을 건축사에게 의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지. 내가 건축사이고 보니 모든 것이 허망해 보인다.
산소에 돌아와서는 막 팔순을 넘긴 누님댁으로 향했다. 누님과 자형을 위해서 맬라토닌, 비타민 C, 그리고 얇은 봉투를 내 밀었다. 자형은 매일 잠을 쉬이 이루지 못하였고 강건했던 누님마저 몸이 아프다고 하였다. 내 누님 내외가 내 부모로 보였다. 주변에는 약봉지가 많이 보였다. 내가 20대였을 때, 아버지께서 아침을 드시고 몇 개의 알약을 드시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무심코 넘겼다. 내가 60이 되고 보니 쉬이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몸을 제대로 움직이질 못하는 자형은 얼마나 힘들까? 그 옆에서 자형을 돌보는 누님은 얼마나 마음이 무거울까? 이제는 누님 몸마져 아파오는데?
누님이 추석 상을 보고 와서는 한잔을 권했다.
한잔해라?
나도 모르게 쭉 마시고는 누님에게 한잔을 권한다.
오후 늦게 세종의 집으로 돌아왔다. 내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나도 몰랐다. 얼른 눕고 싶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스스로 모든 생각을 내려 놓았는지 모른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책상에 앉아 보니 책상 위에 무심코 보았던 여러가지 약병이 눈에 확 들어왔다. 진통제와 신씨로이드, 우루사와 비타민 C, 그리고 종합영양제… …
“먹지 못하는 환자가 아닌 이상 어떤 영양제도 무용하다”라는 생각을 신처럼 믿은 내가 이렇게 되었다. “육체는 극한으로 다룰수록 더 제 역활을 한다”라는 말도 믿었다. 신씨로이드는 호로몬 제재이니 어쩔 수가 없다 하더라도 그 이외 모든 약은 먹어도 그만 아니 먹어도 그만이다. 그런데 그런 내가 캐나다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친 이후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마음이 약해지면서 약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프다”라는 말이 조금씩 느는 것이다.
아프면 내가 아프고 외로우면 내가 외롭다. 스스로 참거나 겪어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아프다, 외롭다고 말을 되풀이 하면 가족마저도 등을 돌린다. 힘들어도 웃으면서 “괜찮아” 하는 것이 자신에게 힘을 보태주고 남에게도 최고의 변이다. 젊었을 때는 그랬었지. - 2018년 9월 25일 추석 다음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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