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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27 파묘의 트라우마

Hi Yeon 2025. 6. 27. 17:02

250627 파묘의 트라우마

 

‘3년 쉬면 집안 형편이 좋아질 거야, 그때 다시 공부하자며 형이 나를 달랬다. 그래서 나는 19792월 나는 대학교 2년을 마치고 군대에 지원했다. 논산 훈련소를 마치고 대구 군의학교에서 6주간 약제 교육을 마치고 전방에 투입되었다. 사단에 자리가 없어 연대 약제실에서 근무했다. 그곳에서도 밀려 대대, 중대, 소대까지 내려가 철책 가까이 최전방 작은 위생실에서 군의관, 운전병과 함께 복무를 했다. 철책 가까이 산속 외딴 곳은 무척이나 외롭고 추웠다. 의사와 고참을 모시는 것 또한 무척이나 힘들었다.

 

첫 휴가를 다녀오고 나서 둘째 휴가를 포기했다. 휴가를 끝내고 돌아올 때는 푸짐한 선물을 가져와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 둘째 휴가 시기가 지나고 어느 날 동료들에게 포상 휴가가 나왔다. 그중에 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휴가를 가야 했다.

 

산을 넘고 다리를 건너 적성면을 지나 동두천에 왔다. 그곳에서 서울로 와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경주로 왔다. 서울에서 좀 놀고 갈 수 있었으나 집으로 가는 경비가 빠듯했다. 경주에는 큰형 댁이 있었다. 가보니 집이 텅 비었다. 옆집에 물어보니 고향에 상이 났다는 말만 했다.

 

불길했다. 나는 달렸다. 버스를 잡아타고 토함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버스가 읍내 길목에서 들어서고 속력을 줄이자 나는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뒹굴었어나 일어나 집으로 달렸다. 저 멀리 우리 집에 하얀 천막이 보였다. 갑자기 바닥에 쓰려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울부짖으며 집까지 기어갔다.

 

이놈이 이제 웬일이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군대에 연락을 했는데, 이제 오는 거야?”

 

아버지를 뵈어야 해.”

 

이놈아, 내일 상여가 나가야 돼.”

 

포상 휴가로 집에 오니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4일째였다. 아버지 마지막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다행이 마지막 절은 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읍내 젊은이들이 맨 꽃상여는 읍내 한 바퀴를 돈 후 장지로 향했다.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따랐다.

 

상여는 읍내에서 그리 멀지 않는 동해안이 보이는 언덕에 올랐다. 그곳에 상여가 내려지고 마지막 인사의 제사가 있었다. 동네 청년들이 장지를 다듬고 삽으로 땅을 팠다. 그 안에 아버지를 두고 한 사람씩 삼베 옷깃에 흙을 담아서 뿌렸다. 상여소리가 한동안 나자 둥근 무덤이 만들어졌다.

 

무척이나 더웠다. 나는 삼베 모자와 삼베옷을 열고 풀밭에 앉았다. 저 멀리 동해안이 보인다. 이게 꿈인가? 아버지 모습도 보이고 어린 초등학생도 보인다. 아버지는 어린 나의 손을 잡고 집에서 가까운 산중턱에 가고 있다. 바로 양지바른 언덕이 나타나고 저 멀리 동해안이 다가온다. 아래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아버지 저 밑에 우리 집이 작게 보여요. 그런데 여기는 어디에요?”

 

아버지가 나중에 여기에 산소를 쓰고 싶어서 왔단다.”

 

이 산등선 너머 저 멀리 할아버지, 증조, 고조 산소가 있는 문중 산이 있잖아요?”

 

그곳은 너무 멀어, 여기는 너희들이 오기 쉽단다. 동해안이 보이고 양지바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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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청년기는 해방 직후였으니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경주에서 토함산을 넘어 산골짜기 외진 곳에서 살았으니 오죽 어려웠으리라. 더구나 8형제를 두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자, 맏이인 아버지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처지였다. 아버지는 읍내로 나가서 기술을 배워 경제 활동을 하면서 형제들을 돌보고 먹여 살렸다. 뿐만 아니라 조카들의 교육과 장래까지 돌보았다. 한마디로 대가족의 어른이었다.

 

우리 집은 큰집이었다. 그래서 제사는 한 달에 한번 꼴이었다. 그때마다 삼촌들과 사촌들은 우리 집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평소 아버지가 삼촌 땅인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 아버지 밑으로 남동생이 네 분이나 계셨다. 소유자인 바로 밑 동생(삼촌)뿐만 아니라 모두 기뻐했다.

 

형님 잘 하셨어요. 가깝고 위치도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당연 사촌들이나 나의 형제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안 일이었다. 이 땅은 맏이인 아버지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이었다. 아버지가 도시로 나가고 난 후 아버지 바로 아래 동생(삼촌)이 농촌 집을 지키면서 농사일을 하였다. 그때 동생이 그 땅에 농사를 지었다. 세월이 흐른 후 아버지가 삼촌에게 소유권을 이전해 주었다.

 

아버지는 그 당시 공화당 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함으로서 우리 집은 기울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그 영향으로 쓰려지고 말았다. 2년을 요양하였으나 결국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아버지 제사 때는 삼촌과 사촌들이 모이는 큰 행사가 되었다. 그때 큰형이 산소가 있는 땅의 소유권을 이전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 놓았다. 그러나 삼촌은 단호했다.

 

너에게는 아버지이지만 나에게는 둘도 없는 형님이다. 내가 당연 모셔야지.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된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려 88년 월드컵이 한국에서 열렸다. 한국의 경제도 세계화가 되어 획기적인 발전을 하였다. 덩달아 부동산 가격도 수직 상승했다. 특히 동해안 지역은 투기장이 되었다. 해변을 따라 동해안이 보이는 도로변 언덕이나 밭이 평당 몇 천 원도 안 되는 가격이 평당 수십만으로 뛰었다. 많은 투기꾼들이 땅주인을 찾아내어 흥정하고 땅을 싸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 고향에서 살 던 내 친구들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아 큰돈을 쥐었다.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그 양지바른 땅도 예외가 아니었다. 삼촌은 그때 70세를 넘겨 기력이 없을 때였다. 투기꾼들의 꼬임에 늙은 삼촌도 노망했다. 대뜸 큰형을 찾아와서 통보했다.

 

그 땅을 팔았다.”

 

삼촌의 자녀들은 5형제다. 모두 출세하여 떵떵거리고 살고 있다. 돈에 아쉬운 사람들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다. 이렇게 출세한 것도 큰아버지의 도움이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안다. 아버지 건너편에 삼촌의 며느리 묘도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산소를 이장하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나도 공부를 계속 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두 형과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일을 하였다. 반면 삼촌의 자손들은 사업을 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풍부했다. 그런데 삼촌은 자기 형 묘소가 있는 그 땅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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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으로 사회 물정을 잘 모르는 장손인 큰형과 어머니는 놀라 자빠졌다. 고지식한 큰형은 울분을 토하고, 어머니는 내가 죽어야지하며 죄인인양 울먹였다. 순식간에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먹구름이 온 집안에 꽉 들어찼다. 삼촌이든 아니든, 소유자가 그렇게 고집을 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았다. 그러나 나도 미쳐서 외쳐댔다.

 

자기 형이니 자기가 손수 파서 버리든가 말든가? 이장을 하든가 말든가?”

 

과거 집안 어른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우리 집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버지 형제들이나 사촌들의 구심점은 사라졌다. 삼촌 자손들은 도시에서 큰 부자가 되어 각자 이익대로 살아갔다. 이제 장손인 큰형의 말은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었다.

 

어쩌라 현실이 그런데, 털어버리고 살면 되는 데 큰형은 그렇지 못했다. 큰형은 찾아오는 친척들이나 지인을 볼 때마다 짜증을 부리고 그때 일을 들추기면서 화를 내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형님, 지나간 일 제발 그만 하세요

 

아버지, 잊으세요. 제발

 

이제는 가족끼리 형제끼리 싸웠다. 큰형이 골병이 드니 어머니는 마음의 병이 되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면서 한숨만 쉬었다.

 

영감, 나를 두고 어찌 먼저 가셨소?”

 

사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부터 지금까지 고향에서 홀로 사시면서 마음을 삭히고 울면서 살아가셨다. 나와 내 여동생이 공부를 하고 있었고 가세는 기울었다. 먼저 가신 아버지가 미울 정도였다. 어머니가 장사를 하면서 겨우 겨우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리고 15년의 세월이 흘렸다. 내가 캐나다로 이민을 하고 1년이 지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 무슨 낙이 있다고, 기대고 살던 막내아들마저 저 멀리 가버리니, 어머니는 병환을 이기지 못했다.

 

내 죽으면 화장을 해 달라.”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를 뵈면 듣는 말씀이었다. 그 의미는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귀국하지 않았다. 대신 밤낮으로 죽어라 술만 퍼마셨다. 고향에 계시는 맏이인 큰형이 어련히 잘 하시겠지. 나는 노약한 어머니를 두고 난만 살겠다고 멀리 떠난 놈이다. 생전에 불효한 놈이 돌아가신 후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어머니 삶의 끈을 단단하게 지켜주지 못한 불효한 자식이라 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큰형은 어머니를 화장하고, 동시에 아버지를 파묘한 뒤 아버지를 화장하였다. 그리고 저 멀리 문중 땅 양지 바른 곳에 아버지 어머니를 합장하였다. 결국 아버지 산소`있고 싶었지만 먼 곳에서 하나의 비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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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2년 후 나는 귀국하여 부모를 찾았다. 자동차에 내려 산속으로 한참 걸어 올랐다. 양지 바른 곳에 아버지 어머니 이름이 새겨진 비석 하나만 달랑 있었다. 문중 땅 반대편 언덕에는 삼촌들의 릉이 줄지어 있다. 그 당시에는 판돌을 둘리고 봉분을 만드는 시절이었다.

 

큰형은 명절에 이곳에 오기만 하면 엎드려 중얼거리면서 한참이나 울었다. 아직까지 과거의 울분에 사로 잡혀 살고 있다. 나이가 들어 80을 넘기니 더 그렇다. 이미 삼촌 가족들과 연락을 끊은 지 오래다. 3년 전이었다. 큰형이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사설 공원묘원을 알아보라고 하였다.

 

내가 문중 산에 가면 그곳은 자식이 가까이 하기에는 멀다. 가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 아버지 곁으로 못 갈 것 같다.”

 

죽어서 장손이 부모와 함께 안하면, 홀로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는? 나는 어떡하고

 

공원묘원을 구입하여 먼저 아버지 어머니를 이장하고 그 앞에 우리가 가면 된다.”

 

또 이장을 해요?”

 

큰형이 평생 파묘의 트라우마로 힘들게 살았기에 가족도 진절머리가 났다. 장손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문중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가까이 가면 좋다고, 죽어서도 잊고 사시라고 형수와 조카들이 꼬였으리라. 차라리 쉽게 갈 수 있는 공원묘원이 났다고 말이다. 그러나 작은형과 나는 극구 반대하였다. 이것이 큰 사건이 되어 또 형제끼리 싸웠다.

 

동생, 이놈들, 너희들까지도 이 형의 말을 듣지 않는구나!”

 

동생들을 꾸짖으면서 과거의 기억이 또 하나의 의심을 만들어 그것이 울분이 되었다. 그 후로 큰형은 기력이 나빠질수록 점점 심해졌다. 다행이 형수는 큰형을 매우 사랑했다. 시집와서 남편을 정성껏 따랐고, 맏며느리로서 굳은 일을 다 하였다. 큰형이 은퇴하여 집에만 머물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정성껏 셋 끼를 차렸다. 내가 큰형 댁을 방문할 때 집에서 큰형과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럼 큰형이 내심 좋아했다. 그때 형수에게 물었다.

 

매일 신선한 채소에 진수성찬이네요. 매일 세 끼를 차리는 것이 힘들 텐데, 형수님?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뭘요

 

시집와서 평생 남편을 의지하면서 살아오신 형수다. 큰형이 공직에서 은퇴를 하고 집에만 머물 때에도 여전했다. ‘내가 좋아서 한다는 말은 아마도 사랑을 에둘러 말한 것이리라. 늙어 무슨 사랑이냐고 하겠지만 평생 사랑했기에 가능하리라. 그것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았다. 형수 사랑 덕분에 큰형은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해를 넘기면서 큰형은 점점 말 수가 없어지더니 올해 2월 목욕탕에서 쓰려져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큰형 소원대로 큰형은 자식들이 자주 올 수 있는 집 가까이 공원묘원에 묻혔다. 나와 작은형의 반대로 부모를 이장 못하고 부모를 문중 땅에 그대로 둔 상태로 홀로 공원묘원에 가셨다.

 

공원묘원 한 장소에서 화장과 장례식, 묘원을 일괄 처리하니 매우 편리했다. 개인적으로 미리 구입하는 사설 공원묘원이기에 직원들은 매우 친절했다. 비문에 경력과 자식 이름도 새겨졌다. 양지 바른 언덕에 장식이 딸린 비석을 보니 좋아 보였다.

 

큰형은 장손으로 아버지 어머니의 기대와 사랑을 받고 살았고, 또한 평생 형수의 사랑도 듬뿍 받고 살았다.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상처에 몰입되어 살아왔지만 이제는 편안히 가셨다. 어쨌든 이곳에 큰형이 편안히 있다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바로 옆에 형수 자리도 있다. 형수도 조카들도 좋아했다. 이렇게 과거의 어두운 역사는 큰형이 돌아가면서 사라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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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 과거를 멀리 한다. 망각한다. 나에게는 잊는 것이 사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민하면서 한 번 더 모든 것을 지워 버렸다. 10년 후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3년 전에 고향과 형제가 그리워 고향으로 돌아와 전원주택을 지어 살았다. 자주 큰형을 만났다. 그때마다 듣는 말이었다.

 

이제부터 부모 산소를 동생, 네가 관리해라.”

 

그래서 작년부터 부모 산소 벌초를 내가 했다. 기억은 단지 의식의 저 깊은 곳에 묻혀 있을 뿐인가? 억지로 잊고 살아왔던가?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과거의 어두운 기억들이 솔솔 살아나기 시작했다.

 

산속 양지 바른 언덕에 부모가 계신다. 갑자기 나도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은 멀어서 가까이 하기 어렵다. 그곳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한다. 그럼 아버지 어머니는 어떻게 하나? 갑자기 후회가 되었다. 왜 나는 큰형이 부모 이장을 원했을 때 적극 찬성을 못하였던가? 그때 만약 이장을 했더라면 가기 쉽고 관리하기 쉬운 공원묘원에서 아버지, 어머니, 큰형, 작은형, , 이렇게 모두 함께 했을 텐데. 나도 쉽고 내 아들들도 쉽게 올 수 있을 텐데.

 

큰형은 공원묘원으로 가셨다. 이제 나만 남았다. 죽은 후에 어디에 있으면 어떠하리. 그러나 홀로 계시는 부모 산소가 걱정이 된다. 매우 후회가 된다. 이장이 뭐 큰일이라고 하면 될 일이다. “이장하면 자손이 잘못된다.” 그래, 나도 섞어 빠진 옛 관습에 얽매었구나! 2년 전 작은 형을 보내고 올해 큰 형을 보내고 나니 요즈음 나는 자주 혼란에 빠진다.

 

나는 어떻게 하지?”

 

부모 곁으로 갈까? 그럼 반이라도 우리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 내가 사는 도시 가까이 공원묘원에 혼자 갈까? 그럼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다. 죽어서도 함께 할 필요는 없지만 일부러 흩어져 있을 이유는 없다. 그때 왜 큰형의 제안을 못 받아 들였을까? 또 자꾸만 후회가 된다.

 

문중 산에 있는 부모 산소를 보았다. 사설 공원묘원을 둘려보았다. 내가 사는 이 도시의 공원묘원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래서 내가 사는 세종 주변도 둘려보았다. 시립 공원묘원은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야외 묘원을 둘려 보았다.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개개인의 시설은 매우 작았다. 비석 대신 작은 돌판을 잔디에 두었다. 잔디가 자라면 안 보일 것 같았다. 반면 오래전에 지어진 사설 공원묘원은 매장형식과 비석형식도 있고 작은 돌판 형식도 있었다. 실외 납골탑과 실내 납골 항아리 형식도 보였다. 수목장 형식도 보였다.

 

사설은 돈을 주고 미리 구입할 수 있고 시립은 죽는 순서대로 모셔진다. 모두 존치 기한은 15-20년이다. 즉 자손이 계약 연장을 안 하면 파헤쳐지고 그곳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 방문해 보니 많은 곳에 계약 연장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15-20년이 지나면 자손들도 잊는 모양이었다.

 

내가 만약 부모 곁으로 가면 외롭지 않다. 형식과 기한의 제한도 없다. 영원히 그렇게 있다. 다만 관리가 없으면 비석이나 분묘는 있되, 주변은 언젠가 저절로 숲으로 변한다. 모두 내세의 일이다. 나 죽고 누가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이다. 그래도 부모 비석과 아들 비석이 함께 영원히 있으면 좋겠다. 비석은 하나의 이미지다. 죽은 후에라도 인간에 의해 파헤쳐지는 것은 싫다. 차라리 숲이 되어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좋다.

 

그래 사람을 시켜 미리 비석을 만들어 놓을까? 애들이 와서 내 육체의 가루를 비석 뒤에 두기만 하면 된다. 너무 간단하다. 그러면 10년 혹은 20, 아니 더 많은 세월이 흘려도 부모 비석과 아들 비석이 함께 숲에 파묻혀 세상에서 잊어진다. 전세 살듯이 홀로 공원묘원에 가는 것보다, 머물 곳이 없는 노숙자가 홀로 떠돌며 살듯이 산이나 강에 뿌려지는 것보다 낫다.

 

나는 애들 둘 모두 태평양 건너 저 멀리 있다. 나는 아내와 헤어져 혼자 살고 있다. 두 형은 이미 가셨다. 내가 죽으면 주변에 아무도 없다. 죽어도 언제 죽었는지 모른다.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큰형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벗어나기 위해 죽어서도 부모를 떠나 쉽게 갈 수 있는 공원묘원을 선택했다. 그리고 큰형 소원대로 되었다. 다행이 작은형은 부모 곁에 모셔졌다.

 

부모 곁으로 가고 싶지만 그것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없다. 뾰족한 묘안이 생각나지 않다. 마음을 비우면 무엇을 선택하든지 쉬운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계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냥 답답하다.

쉽게 과거를 잊는 나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쿨하지 못하다. 나는 실용주의자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관습에 영향을 받는다. 아니다. 억지로 잊었던 과거의 트라우마가 조금씩 살아 나와서 나를 괴롭힐 것 같다.

 

작은형은 79세에 큰형은 85세에 가셨다. 지금 내 나이는 67세다. 두 분 나이 평균 나이가 82세다. 내가 82세까지 산다고 하면 아직 15년 남았다. 그런데 두 분 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5년 동안은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했다. 결국 나는 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기간은 10년 정도다. 이도 장담을 못한다. 두 분은 큰 지병이 없었고 건강했다. 그러나 나는 젊었을 때 죽을 고비를 넘겼고 지금도 비실하다.

 

살아도 징징거리며 살고 싶지 않다. 가지고 있는 것 알뜰히 다 쓰고 가고 싶다. 성질은 더러워 제 고집에 죽을 것 같다. 작은형과 큰형을 보낸 후 생각이 많아진다. 문득 장례식에서 받은 장례 지도사의 명함이 생각났다. 전화를 했다.

 

저는 혼자 살고 있고, 아들 둘은 해외에서 살고 있지요. 만약 제가 죽으면 아마도 공공기관이 제일 먼저 알고 처리하겠죠. 멀어도 문중 땅에 있는 부모 곁으로 가고 싶습니다. 걱정입니다.”

 

보호자가 없는 홀로 사시는 분이 돌아가시면 공공기관에서 자식에게 제일 먼저 알립니다. 자식들이 해외에 산다고 해도 요즈음 연락하기 쉽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보통 기관에서 안 날 다음날이나 그 다음날 도착하더군요. 직계 자식의 동의가 없으면 시신을 처리 못합니다. 자식이 도착하여 동의를 하면 공공기관에서 잘 처리해줍니다.

간단하게 장례를 치르고자 하면 자식이 잘 몰라도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설령 보호자가 없더라도 관공서에서 다 알아서 화장하여 시립 공원묘원에 안장시켜 줍니다. 경비는 많이 들지 않습니다.

어디를 장지로 선택할 것인가를 너무 고민 마시고 아직은 나이가 괜찮은데 편안한 마음으로 건강하게 사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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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의 추억이 감미롭고 생생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경주 시청이나 공화당사에 간 기억도 많다. 아버지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아버지 올 때까지 기다려라.” 신식으로 지어진 공화당사 건물에 들어가니 높은 천장의 넓은 홀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 내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는 매우 엄하시고 말씀이 없는 분이었다. 내가 막내아들이어서 항상 데리고 다녔는가?

 

세월이 흘려 내가 아버지 나이보다 더 먹어도 아버지와의 추억은 아직까지도 나에게 애틋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래서 그냥 부모가 있는 산소에 가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좀 복잡하다. 쉽게 강이나 산에 뿌리는 요즈음 세상인데 내 뜻대로 될 것 같지도 않다. 죽으면 바로 시립 공원묘원 행이다.

 

이왕이면 부모 곁으로 가고 싶다. 쉽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럼, 멀어서 가끔 아들을 보지만, 아니 전혀 볼 수 없을 수도 있지만, 부모는 항상 내 옆에 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보는 것이나 죽은 자가 죽은 자를 보는 것이나 모두 허상인 것을 안다. 마음은 끌리는 데로 하라고 하지만 과거의 트라우마가 이를 가로 막는다. 정신을 차리고 장례 지도사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래,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하냐? 죽은 뒤에 절차가 무엇이 필요하고 죽은 뒤에 찾아오는 이가 무슨 소용이냐? 모두 늙은이의 허영이야. 과거는 흘려가는 것, 미래는 다가오는 것, 머무는 오늘 그냥 살아라.”

 

오늘 드라이브를 했다. 자동차를 몰고 토함산 터널을 지나 동해가로 나갔다. 지금 나는 울산에서 포항까지 동해안 도로를 자동차로 달리고 있다. 솔밭도 있고 백사장이 보인다. 백사장 저 그 끝에는 큰 바위 작은 바위가 동해바다에 잠겨있다. 군데군데 작은 촌집도 보인다. 그곳에 막걸리를 마시며 밤새도록 노래 부르는 친구가 있다. 작열하는 햇살 아래 반바지만 입고 해안가에서 어깨동무하며 노는 내 모습도 보인다.

 

35년 전 동해안의 영상은 없어지고 차창너머 화려한 건물들이 무수히 지나간다. 팬션과 카페, 레스토랑이다. 건물 형태는 제 모습을 자랑하듯 특별하다. 마치 지중해 도시에 온 기분이다. 밤의 건물은 야릇한 실루엣이 되고, 불빛은 바닷물에 비치어 알록달록하다. 예상치 못한 35년 변화다. 내 모습만큼이나 크게 변했다. 핸드폰이 울린다. 핸드폰, 오늘따라 그놈이 무척이나 나에게는 어색하다.